재상평전 7. 고유 高柔 (1)

by 남재준

1. 고대 법치의 수호자


고유(高柔, 174-263, 향년 89세)는 난세에 태어나 관료로서 천수를 누렸다.


하지만 이 점만으로는 그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처세술 때문에 살아남았다기보다, 능력과 혜안 덕분에 살아남은 경우였기 때문이다.


고유는 위(魏)의 법관으로서 오랜 세월 재임하면서 공명정대한 판결만이 아니라 때로는 천자에게 사실상 항명하는 행동까지 동원하며 쉽게 황권의 의지에 의하여 흔들릴 수 있었던 법치를 지켜냈다.


후술하겠지만, 여기서 법치란 현대적인 법치주의(법의 지배, Rule of Law)나 한비자의 법가(法家) 사상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고유는 유가(儒家)에서 연원한 덕치(德治)의 원리를 사법(司法) 작용에서 모범적으로 실현한 예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법을 적용하는 기술보다는 공명(公明)한 판단력과 어짊(仁)을 바탕으로 천자와 백성의 신뢰를 받은 재상이었다.


2. 천하에 서다


고유는 진류군 출신이었는데, 진류군은 연주에 속했다.


진류는 일찍이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한 장막이 태수로 있는 등 장막과 연관이 깊은 지역이었다.


장막은 젊은 시절부터 조조, 원소와 교분이 있었는데 반동탁연합군 때 맹주인 원소의 교만함을 장막이 비판하자 원소가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라 했음에도 조조는 그러지 않았다.


조조와 장막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장막은 조조를 온전히 믿지 못했고 끝내 여포와 결탁했다.


이러한 상황을 읽은 젊은 시절의 고유는 고향 사람들에게 불안한 형세를 언급하면서 장막이 일을 벌이기 전에 먼저 피난해야 한다고 권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조와 장막의 친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고유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말을 무시했다.


여포는 점점 불리해졌고 장막도 결국 원술에게 지원을 청하러 가다가 부하들에게 살해되었으므로, 고유의 전망은 적중했다.


고유는 본래 원소로부터 출사의 요구를 받았는데, 이는 고유의 친척 고간이 원소의 조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고유의 아버지가 익주에서 사망했다.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기 위하여 고유는 군대, 도적, 험준한 지형, 먼 거리 등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익주로 가서 시신을 맞이했는데 갖은 고생을 하고 3년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3. 위태로운 입지에서 믿을 만한 법관으로


고유의 출사는 조조가 원씨 가문을 멸한 후 조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현관(縣官)으로 임명했는데, 이때 이미 고유의 명성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를 두려워한 부패한 관리들은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고유는 관대한 처결을 내렸다.


‘옛날에 병길은 정치를 담당할 때, 과오가 있는 관리를 오히려 포용하였소. 하물며 지금 도망친 관리들이 내 수하에서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았음에랴! 그들을 불러 복직시키시오.’


그의 명에 따라 해당 관리들은 귀환했고 개심하였다.


고유가 병길을 언급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유는 병길과 마찬가지로 정위 즉 형법을 맡아보는 법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러면서도 혹리(酷吏)가 되지 않고 인덕(仁德)을 발휘하여 직무를 수행해 명재상으로 성장했다.


두 사람의 인생 궤적은 비슷한 면이 상당하다.


고유에게는 곧 곤란한 일이 닥쳤다.


원소의 조카 고간이 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고유는 자진해서 조조에게 항복했지만, 의심 많은 조조는 기어이 고유를 죽이고자 했다.


그래서 형법을 다루는 예민한 직무를 고유에게 맡겨 그가 실패하면 그 책임을 물어 죽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오히려 고유를 구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천수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고유는 타당한 법적 처리와 신속한 재판을 통해 미결수들이 없도록 했다.


「위씨춘추」에서는 고유가 얼마나 직무에 열중했는지 아예 문서를 품고서 무릎을 안고 생각하다가 잠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조조가 이를 지나가다 보고는 슬프게 생각하여 자신의 갖옷(짐승의 가죽이나 모피를 대어 만든 옷)을 덮어주고는 더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4. 고유가 맡은 사건들과 그의 법적 식견


a. 송금 사건


이 사건은 조조가 위왕으로 즉위한 후에 발생했다.


송금은 본래 군악대에 소속되었는데, 위-오 국경 지대의 주요 거점이었던 합비에서 복무하다 탈영했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군이 토벌 중인데 병사가 도주하면 그의 처자식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형을 강화한다고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 일반적인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되어, 탈영병은 줄지 않았다.


결국 조조는 형을 가중하는 선택을 했다.


우선 송금의 모친, 처, 두 동생을 관노비로 삼았고, 사건 담당 관리는 전원 사형 의견을 올렸다.


고유가 소를 올리기를, ‘병사의 탈영은 한탄할 만합니다. 그러나 제가 사사로이 듣건대 그중에는 때때로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저의 관견으로는 응당 그들의 아내와 자식을 관대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하면 첫째로 적들이 탈영병들을 믿지 못하게 할 수 있고, 둘째로 그들에게 돌아오려는 마음을 가지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탈영병의 가족을 연좌하는 법을 따른다면 탈영병이 후회하고 개심하려는 희망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형벌을 더욱 무겁게 하려고 하니, 이후로 병사들은 한 명의 도주자를 보고 처형이 자신들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연달아 탈영하려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사형에 처할 사람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형벌의 가중은 탈영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더욱 많이 탈영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조는 이를 수긍하고 송금의 가족들을 살려주었다.


고유의 이 소 덕분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했다.


이는 형사입법·형사정책에 있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심오한 이치를 알려준다.


형벌을 강화하는 일은 죄형비례의 원칙에 따라 가벌성에 상응하는 형벌을 응보로서 과하는 데 의의가 있다.


만약 형을 무게를 가중하거나 종류 자체를 강화하면서 주로 일반예방(일반사회의 범죄예방), 특별예방(범죄자의 교화와 재발 방지)을 입법목적 내지 정책목표로 한다면, 효과를 장담할 수 없다.


범죄와 형벌은 문명의 발생부터 있었겠으나, 죄가 없었다면 형이 없었을 것이고 형이 있다고 해서 죄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형벌은 형벌일 뿐, 교화와 예방은 원칙적으로 별도의 문제이다.


또 어떤 법률이나 판결이 열 사람 중 아홉 유죄자를 놓쳐도 한 사람의 무죄자를 잡지 않는 이상은 그렇게 해야 한다.


나아가 마찬가지로 비록 반사적인 문제이긴 하나, 예방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볼 때도 한 사람이라도 개심의 여지가 있다면 무조건 형을 과중하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이와 연관하여, 고유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탈영한 이들의 사정을 한 번 들어보려고 한 점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탁상입법이 아닌, 실제로 현장에서 제도나 법이나 정책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를 관찰하고 순기능과 역기능 그리고 반사효과나 파급효과 등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정치인이건 행정관료에게건 중요할 것이다.


b. 조달 사건


조조는 조달 등을 감찰관으로 삼아 관리들의 과실을 감시토록 하였다.


고유가 아뢰기를 ‘관직의 직무를 1인당 1개씩만 두십시오. 지금 감찰을 설치한 것은 상관이 하관을 신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조달 등은 누차에 걸쳐 자신의 호오에 따라 포상과 폄하를 진행해 전횡했습니다. 이에 응당 그들의 재능이 마땅한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조가 답하기를 ‘조달 등에 대한 그대의 이해는 아마도 나만 못한 것 같소. 타인의 과실을 탐색하고 적발하여 많은 사건을 처리할 수 있어야만 하오. 헌데 현인이나 군자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하면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달 등은 후에 부정한 이익을 꾀하다 적발되었고, 조조는 그들을 주살하고 고유에게 사례했다.


이 사건의 경우, 고유의 비판적 의문에 대한 조조의 주장은 그의 성격과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능력주의에 기반해 아무리 죄가 있어도 능력이 있다면 기용하고, 인품이 고결해도 능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라고 생각하는 그의 인사철학이 말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조조의 이러한 철학에 대한 치명적인 결함을 보여준다.


도둑을 잡기 위해 도둑을 쓸 수밖에 없다는 말은 맞을 수도 있지만, 이는 조건부이다.


도둑을 잡기 위해 쓰는 자가 결국 도둑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그가 정말 개심했는지, 또 최근의 행동은 어떠한지 등을 생각해야 한다.


유능한 자라도 그 능력을 자기를 위해서만 쓸 것인지, 아니면 임명권자의 기대대로 대의를 위해 쓸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능력은 있지만 인품이 떨어지는 사람은 능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사람보다 기용할 때 보다 면밀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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