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무고를 예견하고 법을 인(仁)의 도구로 생각하다
조비가 즉위하고 위가 건국되었으나, 민심은 흉흉했다.
항간에 소문이나 선동이 나돌았다.
조비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여, 소문을 퍼뜨리고 선동하는 자들을 주살하고 그들을 밀고하는 자들에게는 포상하도록 했다.
하지만 밀고자를 포상하는 것은 결국 포상을 노리고 무고하는 자들도 많아질 것임을 의미했다.
고발이 많아지면 진위 여부를 따지기 위한 사법 자원이 낭비되고, 억울하게 처벌받거나 부당하게 포상받는 이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고유는 이를 간파하여 아뢰기를, ‘범죄자에게 착하게 바로 잡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범죄자는 넘쳐흐를 것입니다. 이전에 주공 단이나 한 태종(문제)을 보면, 비방이나 미혹하는 말에 대하여 관대하게 대처했습니다. 응당 비방이나 미혹하는 말을 밀고한 자에게 포상하는 법률을 폐지하고, 하늘이 만물을 어질게 양육하는 것을 융성하게 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비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고유의 예측대로 갈수록 무고자들이 많아졌다.
할 수 없이 조비가 다시 명하여 무고죄를 신설하였다.
d. 포훈 사건 : 공명한 사법을 위하여 황제에게 항명하다
포훈은 제북상 포신의 차남이었는데, 이때 법관을 맡아보았다.
조비는 일찍부터 포훈을 싫어했다.
포훈이 217년에 출사했을 때, 조조는 그를 태자중서자로 임명해 동궁에 배속했는데 그는 매우 꼿꼿하여 세자 조비는 그를 꺼려했다.
뒤에 조비의 처남이 현관(縣官)을 맡아보았는데, 관의 재산인 베를 훔쳤다.
포훈이 이를 적발하여 처벌하고자 했는데, 위왕부가 있는 업에는 조비만 남아 있었다.
조비는 포훈에게 수차 편지를 보내 처남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포훈은 결국 법대로 조비의 처남을 참했고, 이 일로 조비는 포훈에게 앙심을 품었다.
225년에 조비가 황제로서 오를 치겠다고 했을 때, 포훈은 여기에 정면으로 반대했는데 결국 조비는 광분하여 포훈을 처형하고자 했다.
고유는 준법을 고수하며 조비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조비는 다시 대노하여 고유를 상서대(황제 비서실)로 출두시키고 포훈을 살해해버렸다.
다행이도 고유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았고, 조비는 고유를 원직 복귀시켰다.
조비의 광기와 고유의 이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e. 유귀와 장경 사건 : 밀고자는 공범일 수도 있다
사냥에 관한 법이 엄격해서, 천자의 사냥터에서 수렵하면 처형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유귀라는 사람이 몰래 천자의 사냥터에서 토끼를 잡았다.
곁에 있던 장경이 이 일을 사법 당국에 고해바쳤는데, 당시의 황제였던 조예는 유귀를 체포해 투옥했다.
하지만 고발자인 장경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고유는 고발자의 이름을 밝혀야 한다고 아뢰었는데, 조예는 아무렴 자신이 임의로 유귀를 체포했겠느냐며 화를 냈다.
고유가 답하기를 ‘정위는 천하에서 공정한 법관의 직입니다. 어떻게 황상의 희로에 의지하여 법을 허물어뜨리게 하겠습니까?’
결국 조예는 장경의 이름을 말했고, 고유는 판결을 내려 유귀와 장경에게 모두 벌을 내렸다.
f. 두례 사건 : 사건을 세밀히 살피고, 실체적 진실을 추적하다
두례는 병사였는데, 그가 근처로 외출했다가 돌아오지 않으니 소속 진영에선 그가 탈영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례를 추격해 체포하고, 그의 처와 남매를 관노비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
두례의 처는 억울하게 생각하여 지방 관청에서 가서 하소연했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중앙의 사법관인 고유에게 가서 사정을 말했다.
고유 : 너는 남편이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두례의 처 : 저의 남편은 조실부모하여 할머니 한 분을 어머니로 생각하고 자랐는데 그분을 정성껏 모셨고, 남매를 불쌍히 여겨 자상하게 보살폈습니다. 그러니 집안 식구들을 돌아보지 않고 탈영할 사람이 아닙니다.
고유 : 네 남편이 타인과 원한 관계는 없느냐?
두례의 처 : 저의 남편은 선량하여 그런 일이 없습니다.
고유 : 네 남편이 타인에게 돈이나 재산을 빌려준 적이 있는가?
두례의 처 : 예전에 같은 진영 안의 병사 초자문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를 찾아가 달라고 했지만 받지 못했습니다.
이때 초자문은 경범죄로 투옥되어 있었는데, 고유는 이번에는 초자문을 불러 물었다.
고유 : 너는 예전에 타인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느냐?
초자문 : 홀로 가난하게 살고 있어서 타인에게 돈이나 물건을 빌리지 않습니다.
(잠시 초자문의 안색을 살피더니)
고유 : 너는 옛날에 두례의 돈을 빌렸는데, 무엇 때문에 빌리지 않았다고 했느냐?
초자문 : ...... .
고유 : 네가 두례를 죽였으니 빨리 자백하라.
초자문은 결국 두례를 살해한 사실과 시신을 매장한 곳을 밝혔고 고유는 이에 따라 두례의 시신을 파내어 찾도록 했다.
조예에게 이를 아뢰니, 두례의 처자식을 평민으로 회복시켰다.
수사의 의의는 실체적 진실의 발견에 있고, 이 과정이 있기 전에는 당연히 공소제기도 심리도 판결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기초적 사실은, 적법절차라는 생각이 거의 전무하던 고대와 중세에는 ‘빤히 보이는 일인데 그냥 처리하면 된다.’라는 위험한 판단으로 인해 자주 무시당했다.
그 시대에 법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피의자나 피고인을 위하여 반드시 절차를 엄수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다지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고문을 통한 토설과 이를 바탕으로 한 판결이 이루어지던 때이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고유는 사건 처리에 있어 신중하고 세밀하게 심문과 수사를 진행해 결국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고 이를 바탕으로 피고인을 신원(伸冤)했다.
사법도 여느 사회구조나 사회제도 등과 마찬가지로 잘못 작동하면 한 사람과 그 주변인의 인생까지 모두 파탄을 낼 수 있다.
한 사람은 한 세계이고, 인명은 한 번 꺼뜨리면 다시는 피워올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법관으로서 관성에 빠지지 않고 사건을 세심하게 살폈던 고유는 사법관으로서의 매우 중요한 덕목을 보여준 모범적 사례였다.
5. 인(仁)의 법을 실천하다
법은 흔히 엄정한 정의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실은 엄정함 못지않게 관용과 포용이 중요하다.
사회에게 요구하는 강제력 있는 규범이고, 최소한의 윤리이며, 최종적인 분쟁해결 수단이라는 법 정확히는 사법의 특성은 그 근거가 된다.
고유는 어짊과 정의의 가치를 적절하게 배합할 줄 알았다.
관리가 보일 수 있는 어짊이란 결국 융통성 없는 제도나 정의로부터 개인이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세심히 살피고 배려하는 섬세한 행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해홍이라는 사람은 하급 관리였는데, 당시 규정으로는 부모의 상을 당하면 100일 후 모두 업무에 복귀토록 하였다.
그런데 부친상을 당한 해홍은 전쟁의 발발로 소환령이 떨어졌음에도 슬픔으로 얻은 병으로 인하여 원직 복귀할 수 없었다.
조예는 해홍이 겁이 나서 효(孝)로 인한 질병을 꾸며낸 것이라며 그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고유는 직접 해홍을 찾아가 그의 몸 상태를 살피고 사정을 상주해 관대한 처리를 요청했고 이는 수용되었다.
앞서 유귀 사건에서 언급했듯, 위에서는 수렵을 엄하게 규제하여 사냥터의 사슴을 죽이는 경우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고발자에게는 포상했다.
하지만 고유는 이러한 법은 타당하지 않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군주는 농업을 권장하고 몸소 절검하여 자원을 축적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천하를 통치하신 중기 이래로 백성들의 노역이 많아 농업 참여도가 떨어졌습니다. 또 사냥금지법 때문에 사슴들이 농사를 망쳐놓아 피해가 컸습니다. 목책 정도로는 사슴을 막기가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해 징병하고 거기에 흉년까지 닥치면 대처할 방법은 전무할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백성에게 관대한 정책을 펴서 백성들이 사슴을 잡을 수 있도록 이 금령을 폐지하시옵소서.’
이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고유의 의견은 수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렇듯 비이성적인 일들은 조비와 조예 대에 차고 넘쳤다.
진군, 사마의 등과 마찬가지로 고유도 조예가 중기 이후 국사에 태만해지고 궁실 증축에나 열중하며 농번기에 백성들을 징발하는 것을 반대하는 취지의 소를 올렸지만 무시당했다.
공손연의 형 공손황을 죽인 일도 조예 대의 비이성적인 국사 처리에 해당한다.
공손연의 난이 발생했을 때, 공손황은 수도에 있었는데 난이 발생하기 전에 공손황은 누차 공손연의 모반을 고했다.
난이 발생한 이후 조예는 공손황을 죽이려고 했지만, 고유는 이를 반대했다.
‘공손황과 그의 처자식은 반역자의 동족이긴 하지만, 공손황이 이전에 폐하께 몇 차례 모반을 폭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로 미루어 그의 본심은 역심이 아니니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대로 두면 사면도 아니고 그렇다고 의율도 아닌 채로 옥에 갇혀 불안해하다 자살할 수도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긴다면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조예는 고유의 의견을 무시했고 금가루를 내려 공손황과 그 처자식을 모두 죽였다.
이렇듯 신하들의 간언을 제대로 듣지 않고 광기와 태만을 보인 것이 고유를 비롯한 신료들이 서서히 위나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6. 말년과 평가
고유는 23년간 정위로서 형사사법을 맡아보았다가 재상으로 승진해 사공, 사도를 맡아보았다.
249년에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켰을 때, 고유를 대장군 대행으로 하여 조상의 군영을 장악하도록 하면서 ‘그대는 주발이오.’라고 말했다.
이 정도로 고유를 신임한 것을 보면, 사마의와 고유는 일찍부터 매우 가까웠던 것으로 짐작되고 어쩌면 고평릉의 변 모의에도 고유가 가담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유는 174년생으로 179년생인 사마의보다 5년 연상인데, 251년에 72세로 사망한 사마의보다도 십수 년을 더 살아서 사마사의 집권 기간을 지나 사마소의 집권 말년까지 살아남아 263년에 89세로 사망했다.
사마씨 정권에서도 명예직이긴 했지만 태위에 임명되는 등 주요 인사가 되었고, 천수를 누렸다.
고유는 행정관료, 사법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인재였다.
뚜렷한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백성에게 관대하고 법을 덕치를 위한 도구로서 활용하고자 했던 유가적 이상에 최대한 가 닿았다.
그러면서도 처세술 또한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틀리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던 조비, 조예(중기 이후) 치세에서도 항명하거나 황제에게 반대의견을 내면서도 별탈 없이 살아났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출중해 버릴 수 없었던 점도 있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그가 보신에도 능통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사마의와도 닮은 측면이 있는데, 주로 대외/국방 즉 황제의 시선 밖에서 능력을 발휘했던 사마의와 달리 중앙에서 사법을 맡아보면서 즉 황제의 시선 안에 상시 있었으면서도 처신을 잘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고평릉의 변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사마의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성공을 완벽하게 장담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참했다는 것은 고유가 마냥 충신이었던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