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평전 4. 사마소 司馬昭 (1)

by 남재준

1. 찬탈과 통일을 향한 가도를 달리다


사마소(司馬昭, 211~265(향년 54세), 서진 태조 문제 *추증)의 집권기간은 255년부터 265년까지의 10년으로, 각각 약 2년과 4년간 집권한 아버지 사마의와 형 사마사의 재임기를 합친 것의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아버지가 정변을 일으키고 형이 내우외환을 통제하여 반석에 올려놓은 권력을 사마소는 10년간 확고하게 다졌다.


제갈탄, 등애, 종회 등 사마씨 정권에 대한 마지막 도전들을 정리했고 촉한을 멸망시켜 천하통일의 국면 진입이라는 실질적 전기를 만들었으며 오등작제도 부활과 「진률」 편찬 등 서진 왕조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사마소는 아들인 사마염(서진 세조 무제)이 제위를 받기만 하면 되도록 찬탈 직전까지 가 닿은 직후에 사망했다.


2. 사마소의 집권 과정


<진서> 경제기는 사마소가 고평릉의 변 전날 밤에야 모의를 알았다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고평릉의 변 시점에 사마사와 사마소는 모두 병권을 맡아보는 관직에 있었으나, <진서> 문제기를 보면 집권 전 군 경력에 관한 기록은 사마소가 더 많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사마사는 아버지가 정변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후 바로 권력을 이어받았지만 사마소는 아버지와 형이 집권한 6년간 경험을 쌓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고평릉의 변에 이르기까지의 두 형제의 행적을 보더라도 사마소의 군 경력이 좀 더 뚜렷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만 활약상에 대한 구체적 기록보다는 그냥 ‘혜안을 보였다’라는 식의 미화된 서술이 많아서, 얼마나 사실일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사마소의 최초의 전쟁 참여 기록은 조상 집권기의 흥세 전투이다.


축적된 군공의 권위가 있는 사마의를 의식했는지, 조상은 244년에 촉을 치기로 한다.


사마의를 포함한 다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상은 출정을 강행했는데, 사마소는 이때 여기에 종군한 하후현의 보좌로 함께 출정했다.


한중 이북의 흥세산을 거점으로 촉군은 위군보다 적었음에도 지형에 의지하여 확고하게 상황을 통제했고, 조상과 하후현의 위군은 한중을 치려고 남진한 것이었으나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이미 수십 년 전인 219년에 유비와 조조가 한중에서 충돌했으나 조조가 참패하고 위의 남진이 저지되었었다.


그보다 더 나은 조건이 아닌 상황에서 남진한 데다 조상은 촉의 군대나 지형을 상대하는데 능수능란하지 못했다.


흥세산에서의 수성전을 주도한 왕평이 버티는 사이에 촉의 대장군 비의가 지원군을 이끌고 왔고 조상은 하후현의 권유로 마지못해 퇴각하다가 퇴로를 차단해버린 비의의 촉군에 호되게 당했다.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패배가 임박했으니 조상에게 철수를 건의하라는 말을 전했고, 사마소는 하후현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의는 험준한 지형을 점거하여 방어하고 있으니 싸우기 어렵고 싸운다 해도 이기기 어렵습니다. 속히 철수해야 합니다.’


하후현은 사마사의 부인 하후휘와 남매 사이였으므로 사마소가 보좌하고 사마의가 말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5년 뒤인 고평릉의 변 때 형인 사마사는 각 진영 또는 구역을 점령하는 역할을 맡고 아우인 사마소는 황궁을 수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왕릉의 난과 동흥 전투 때에도 사마소는 현장 최고사령관으로 지휘를 맡았고, 동흥 전투에서의 패전에 따라 형과 함께 자진해서 후작을 내려놓아 작위를 깎았다.


234년 제갈량 사후 246년까지 장완이, 253년까지 비의가 사실상 집정을 맡아보았는데, 비의가 암살당하자 강유가 온전히 촉의 군권을 잡게 되었다.


비의는 253년 새해 첫날에 암살당했고, 강유는 그해 여름에 그전에 장완과 비의의 만류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태도를 전환해 보다 적극적인 북벌을 시작한다.


농서, 남안 등은 옹주에 속했는데 위-촉 국경의 거의 최서단에 위치했다.


특히 농서는 후일에 관중 지역과 더불어 ‘관롱’으로 묶여 수당시대 지배층의 출신지로도 알려지게 된다.


이 지역은 강족들이 활동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관중 분지가 동쪽에 있었고 여기에는 장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농서는 지대가 험했으므로 군사기지로 삼을 수 있다면 이점이 있었고, 강족 등을 동원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었으며, 강유 본인이 농서와 인접한 천수 출신이기도 했다.


250년대 초 강유의 북벌 초기에는 위의 남서쪽 방면에서 사마소가 총지휘관을 맡아보았는데, 실전에서의 공은 그다지 없으나 후일 사마소가 촉한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점도 간접적 기여를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관구검과 문흠의 난이 발생했을 때 사마사는 친정하면서 낙양의 수비를 사마소에게 맡겼다.


255년 봄에 회군하던 사마사가 허창에서 사망하니, 사마사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사마소가 대권을 이어받아 대장군, 시중, 녹상서사를 겸하고 검을 차고 신을 신은 채 전각에 오르는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사마소는 이 특권은 고사했다.


다만 이때 사마소는 부하와 종회의 권유를 수용해 군을 이끌고 수도로 귀환했다.


사마소로 하여금 허창을 통제하도록 황명이 내렸기 때문에, 군은 허창에 주둔해야 했고 사마소 홀로 낙양으로 돌아오는 게 맞았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구태여 허창을 진수하라는 명을 내리고 또 부하와 종회가 별도로 조언을 했다는 것은 다소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조씨 황실을 되살리고자 한 조모의 시도와 이를 어느 정도 간파한 사마소 측의 신경전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다음 해 1월에 대도독을 더하고 조정에 나아가 아뢸 때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하였다.


여름에는 구석과 부월(군권 상징)을 내렸고 다시 검을 차고 신을 신고 전각에 오르는 특권을 내리려 하였으나 이 특권은 사마소가 또다시 고사했다.


가을에는 황월(황권 상징)을 내렸다.


이렇게 사마사에서 사마소로의 정권 이전은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3. 제갈탄의 난 (257년~258년)


257년에 수춘삼반의 마지막인 제갈탄의 난이 발생한다.


제갈탄은 오래 군무를 맡아 보며 왕릉의 난, 관구검-문흠의 난, 하후현-이풍-장집 등의 보정 교체 모의 사건 등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는 일찍이 하후현, 그리고 조상의 측근이었던 등양과 가까운 관계였음에도 군재를 인정받은 덕분인지 숙청을 피해 갔다.


그러나 관구검과 문흠 등 전선에서 함께 활약한 동료들의 결말은 제갈탄에게도 불안을 가중했던 것 같다.


제갈탄은 회남에 주둔했는데, 이곳은 양주의 최북단으로서 예주와 서주와 경계를 함께 하고 있었으며 오가 북진할 때 이곳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관구검, 문흠과 마찬가지로 제갈탄도 반란에 오를 이용했는데, 한편으로는 위 조정에 오를 핑계 대어 군사 10만과 성 축조를 요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러한 요청은 자연히 사마씨 정권에서 제갈탄을 의심하게 했고, 257년 5월에 제갈탄은 사공으로의 승진이라는 명목으로 낙양으로 소환된다.


이것은 사실상 제갈탄의 반란을 당기는 불씨가 되었는데, 마치 개전을 위해 상대방이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하는 것과 같았다.


<세설신어>에서는 가충이 사마소에게 ‘어차피 소환해도 반드시 오지 않겠지만, 소환하지 않는다면 늦게 더 큰 화가 닥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마소는 제갈탄이 더 힘을 키우고 축적하기 전에 차라리 빨리 반란을 일으키게 하여 처리하자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사마소가 주도하는 사마씨 정권은 지구전을 택했다.


조정의 논자들이 속전속결을 청하니 사마소가 말하기를 ‘제갈탄은 관구검이 경솔하고 급하게 움직이다가 패망하는 것을 보았으니, 반드시 오와 결탁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이 반란은 장기전이 될 것이다. 모든 힘을 집중해 한 번에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수춘이 중심지인 회남(구강)은 맨 처음에 영포가 제후왕으로서 받은 봉지였는데,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기원전 19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고제 유방에게 토벌된 바 있었다.


7월에 사마소는 이 점도 함께 언급하며 상주하여 조모와 명원황후를 대동하여 출정한다.


오에서는 문흠(난의 실패 후 투항한 그이다), 그리고 손권의 사위이자 오의 대장 중 하나였던 전종의 조카 전단과 아들 전역 등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통솔하여 지원하도록 하였다.


위군은 수춘을 겹겹이 견고하게 포위하였는데, 오군은 이를 쉽게 돌파하지 못했다.


8월에 오에서 장수 주이가 약 1만을 거느리고 와서 짐을 가볍게 하고 나아갔으나 석포, 주태, 호열 등이 그들을 대파하였다.


그런데 패배한 주이를 오인(吳人)들이 죽였다.


이를 두고 사마소가 말하기를 ‘주이가 수춘에 도달하지 못한 건 그의 죄가 아니다. 그런데도 오인들이 그를 죽인 것은 수춘에 사과하는 꼴이 되어, 제갈탄의 구원에 대한 믿음만 더 굳게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반군은 어떻게든 포위를 깨뜨리려 했을 것이다. 반군은 우리의 대군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여겨 식량을 아끼고 병력을 줄이는 등 사태 전환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면서 탈출을 대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위군은 포위를 합치고 노약자와 병자를 회북으로 보내 곡식을 얻게 하고 군사들에게 제한적으로만 콩을 지급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또 사마소는 스스로 수척하게 하여 그 모습을 보여주고, 반간계를 써서 오의 구원이 곧 도착할 것이라 소문을 퍼뜨렸다.


문흠이 기뻐했고 제갈탄은 더욱 느슨해졌다.


석포와 왕기가 전투를 청했으나, 사마소는 ‘제갈탄의 반역 모의는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니, 곡식을 비축하고 오와의 연계를 도모하는 등의 행보들은 장기전을 대비한 것이었다. 지금 그들을 치면, 그들을 쉽게 깨뜨리기는 어려울 것인데 오의 지원군이 협공하면 우리가 위험하다. 제갈탄과 문흠 등 반역자들이 내분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이 기회를 노려 보급을 끊고 기다리는 것이 맞다.’라고 하였다.


이때 수춘 성내에 있던 전단의 조카인 전의 형제가 투항해 왔다.


이는 손권의 장녀이자 전종의 부인이었던 손노반이 숙청되어 그 여파를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일찍이 손노반은 이궁의 쟁에서 손패파였는데, 이는 238년에 사실상 황후로 대우받던 손노반-손노육 자매의 어머니 보연사가 사망하자 손권이 황태자 손화의 모친 왕부인을 황후로 고려하던 것을 손노반이 참소로 저지하면서 자연히 손화와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252년에 손권이 죽기 직전에 손화를 복위할 것을 고려했으나 손노반은 손준 등과 더불어 이를 말리면서 태자 손량이 그대로 계승하도록 권하면서 제갈각을 보정으로 추천했다.


249년에 이미 전종이 죽었는데 제갈각을 살해한 손준이 집권했을 때 손노반은 손준과 간통했고 손화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손준 암살 모의가 발각되었을 때 손노반은 동생 손노육도 여기에 가담했다고 몰아붙이며 죽이도록 하는 등 악행을 벌였다.


258년에 손량은 손준의 뒤를 이은 손침을 제거하려다 실패했는데, 손량의 후견인이었던 손노반이 이때 이에 연계되어 유배되었다.


그래서 그 화가 자신들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전의 형제가 위에 투항한 것이다.


종회의 계책으로 전의 형제의 명의로 편지를 보내 전정에게 항복을 권하니, 그 형제가 위에 투항하였고 수춘 성내에서 동요가 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음이 급해진 제갈탄과 문흠은 결국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성을 나왔지만 실패했다.


문흠이 오 출신 군사들 위주로 수비하고 위 출신 군사들은 온전히 믿기 어려우니 주로 포위망 돌파 병력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위 출신 군사들을 이끌고 있던 제갈탄은 이를 거부했고 끝내 제갈탄이 문흠을 살해했다.


문흠의 아들 문앙이 제갈탄과 맞서 싸웠지만 패했고, 결국 성을 뛰쳐나와 위에 투항한다.


관구검과 문흠의 난 때의 활약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앙은 군재가 뛰어났으므로, 그의 투항은 이미 내분으로 약화된 반란군에 치명타였다.


문앙으로 하여금 성을 순회하며 항복을 권유하게 하니, 성 위에서 활을 들고도 쏘지 않는 군사들마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에 사마소가 쾌재를 부르며 ‘이제 공격해도 되겠다!’라고 제장들에게 말하며 공성을 명하였고 수춘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제갈탄을 주살하고 삼족을 멸하였으며, 오 출신의 잔당이 모두 항복했다.


어떤 사람이 ‘오의 병사들은 쓸 수 없으니 생매장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사마소가 말하기를 ‘설령 도망쳐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너그러움을 보게 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4월에 사마소는 낙양으로 귀환했고, 그를 진공(晉公)으로 봉하고 상국에 임명하며 구석을 내렸다.


사마소는 아홉 번 사양한 후 이를 받았다.


(계속)


*참고) 「진서」 권(제기)2 문제기 / 「삼국지」 위서 권(열전)28 왕관구제갈등종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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