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가나 문화에서도 성숙의 요소는 비슷한 면이 있다. 자제, 책임, 공감 이런 요소들이 성숙함을 구성한다. 그런 사람들은 차갑다고 오해받거나, 지루하다고 폄하되거나 리더십이 약하다는 말도 듣고 한다. 이들은 신중하고 복잡하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거나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정치인을 비롯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오늘날 포퓰리즘과 SNS와 감정이 지배하는 정치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정치를 생각할 때 이제는 이념보다도 태도 내지 윤리의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요청이랄까. ‘침묵의 미학’이라던가 ‘비정함에도 이유가 있고 천박함에도 사연이 있는’ 인간적인 면모가 없고 모든 것이 여러 차원과 수준에서 ‘얇은’ 시대인 것 같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나쁘게만 생각하진 않는다. 이전에는 감정과 개성의 표현이라던가 하는 인간적인 면모의 또 다른 측면이 억눌려 의무만 남고 모두가 불행한 시대인 면도 컸다.
모든 것의 양면성을 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좀 더 개성과 감정 등이 부상할 필요가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책임과 이성 등이 부상할 필요가 더 크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특히 그렇다.
2017년 총선 몇 개월 후의 인터뷰에서 고든 브라운(1951-, 노동당 대표, 영국 총리 2007-2010)은 테레사 메이(1956-, 보수당 대표, 영국 총리 2016-2019)와의 성격적 공통점에 대한 인터뷰어의 언급을 수긍했다.
‘제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성공회 사제였죠. 저는 ’네가 해야 할 일을 계속 해 나가야 한다. 공적으로 너의 감정을 보이지 말아라.‘고 배웠고 ’너는 사실 꽤 내성적이고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잖니.‘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중략)
기억하시겠지만, 제 딸이 죽고 아들이 낭포성 섬유증을 안고 태어났을 때 계속 대외적으로 노출되고 거대한 공적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아들이 언론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야만 했죠. 아이들이 자라면서 공적인 시선에서 이상하다는 취급을 받을까 의식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중략)
제가 다우닝가를 떠날 때 아들의 손을 잡고 떠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제게 편지를 보내 아이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말했죠. 그분들은 그러한 가족적 따뜻함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틀렸을 수도 있지만, 저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놓고 보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스타일을 가졌는가, (사람 자체가) 쇼맨십이 있는가 혹은 멋이 있는가를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쇼맨십, 멋) 유의 정치인이 아닙니다. 아마도 SNS와 텔레비전의 시대에는 제가 언급한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무엇을 했느냐와 무엇을 이루었느냐로 평가받고 싶지 제 말이 어떻게 들렸느냐로 평가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브라운이나 메이의 리더십은 아쉬운 면도 있다. 그들의 전임자들인 토니 블레어와 데이비드 캐머런은 유창한 언어 구사와 젊음 과시 등 쇼맨십이 강했다. 현대사회에서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연예인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인은 연예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 영향력을 미치는 공공정책에 관한 논의를 주도하고 결정을 내리며 국가적 방향이나 시대 의식 등을 제시한다.
브라운과 메이는 감성적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는 정치인의 필요조건(?)은 없었지만 충분조건은 있었다. 특히 정치인으로서 사명감, 책임감, 신념이 뚜렷했다. 이 점에서 중심이 없는 중도 정치인들과는 차이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정치 성향이랄까 하는 것이 미세하게 바뀌는 데에 있어 테레사 메이 재임기의 모니터링은 나름대로 내게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3년 임기의 막바지로 달려갈수록 당시의 영국 내외 여론과는 달리 개인적으로는 의회가 그녀를 지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수용하면서도 질서 있는 유럽연합 탈퇴를 위해 유럽연합과의 협상을 통해 제도나 시스템 등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테레사 메이가 맞았다고 본다. 정치적 맥락을 제외하고 보면 그런 정도로는 너무 막대한 손해를 감당할 수 없는 건 안다. 하지만 정치적 맥락 정확히는 국가 분열의 치유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민주적 결과가 항상 옳은 건 아니긴 하지만, 현실 정치인 특히 정부수반된 자의 입장에서는 국민투표까지 한 사안을 다시 뒤집는다는 건 주관적 정의로 나라를 분열로 내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국민투표까지 한 바를 그냥 무시하거나, 아니면 패한 측의 의견을 들어 재투표를 하겠다고 들면 나이젤 패라지나 보리스 존슨에게 멍석을 깔아주는 꼴이었다. 결국 메이의 협상이 좌초되고 존슨과 패라지가 날뛰게 되었지만, 그 결과만으로 메이를 탓하는 건 문제가 있다. 적어도 그 시점에선 강경 브렉시트 선동가들에게 더는 명분을 안겨줄 수 없었다.
그러니 테레사 메이의 결정 내지 해법은 타당했다고 본다.
메이의 퇴임 후 6년쯤 지난 현재,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몇몇은 메이가 적어도 지도자로서의 성숙함은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
브라운의 말처럼 나는 정치인을 판단할 때, 개인적 성격이나 느낌만을 본위로 평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다만 정치인의 신념이라던가 리더십 등은 그의 인격과 불가분인 면이 있다. 그래서 여러 행보들을 통해 볼 때, 적어도 그 정치인의 특정 측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문제가 있다거나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때가 상당히 있다. 다만 처음부터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윤석열과 이재명을 감정적으로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행보를 무조건 악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진 않았다. (윤석열이 계엄이라는 핵폭탄을 투하하기 전까지는. 그전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냥 시정연설 불참 등 국정에의 불성실을 불쾌한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세대의 시대적 과제가 포퓰리즘, 내셔널리즘의 극복 나아가 자율적 통합과 공동체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생의 복잡성에 대한 절감이라던가 정책적 집행가능성이나 현실성, 생활자의 관점 등이 강하게 자리잡으면서 사상적으로 보수주의의 방향으로 상당히 이동한 면이 있다.
다만 인본주의(Humanism),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코어는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개인으로서의 사람 본위 사회의 구현과 지속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과거에는 단지 개인의 집단으로부터의 압제만 극도로 경계했다. 지금은 그것이 공동체의 지속가능성과 안정성을 위해서 공감과 자율적 통합 등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정보와 시각의 범람 속에서 가스라이팅에 당하지 않도록 독립적, 능동적 사고를 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공동체의 진로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를 숙의하는 대안적 사고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오직 성찰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자율적 시민만이 중요하다. 그 외에 교회, 지역공동체, 노동조합, 시민단체, 언론, 기업, 정부, 법원 등 어느 조직도 젠더, 세대, 인종, 종교 등 어느 집단도 믿을 수 없고 경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책적으로 보면, 예컨대 복지국가와 사회보장이 필요하다는 점도 여전히 같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더 절절히 느낀다. 그렇다고 사람을 선하게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점도 안다. 어느 사람이나 젠더, 계층, 세대 등과 무관하게 비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서로를 수단적으로라도 믿지 않으면(최소한 이번 한 번은 믿을 수밖에 없다와 같은 생각)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또 정책은 비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모두 구하거나 모두 버려야 하는데, 골라야 한다면 비천한 사람에게 이익을 주더라도 비천하지 않은 사람이 이익을 볼 수 있다면 모두 구하는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적 고립과 박탈감 등이 모여 SNS라던가 커뮤니티 중심의 음모론이나 극단적 사고방식의 확산 근원이 된다. 사람들이 버려지지 않도록 돌보고 공감하며 소통하도록 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빠르게 만들려면 서로에 대한 공감과 통합이라는 것이 요구된다. 그 미덕들은 민주주의를 느리게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분열된 채로 포퓰리즘이나 집단주의적으로 민주주의를 하는 것과 다를 것이다. 현상이 민주주의의 필연적 결과는 아니며 하나의 경우의 수일 뿐이다. 체제는 시스템이고 그 위에서 어떤 원리와 행태를 보일 것인가는 사람들이 형성하거나 결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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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은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내 경우는 사회과학이 사회를 참신하게 과학적/체계적으로 본다는 점, 또 응용성이 있다는 점에 끌렸다.
지금 로스쿨에 있는 나의 모 친구는 정치에 관심이 있고 나아가 정치를 하고 싶은 이유를 그냥 하고 싶어서로 심지어는 권력을 잡고 싶어서 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선 곤란하다. 과학자나 순수한 탐구적 관심이면 상관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세상은 과학적, 기계적으로 딱딱 잘라 이해되지 않는다.
또 응용이라는 건 최종적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이들 중에는 구조나 제도나 문화의 부정적 영향 하에 있으면서도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어떤 결정에 익자와 손자가 있음을 알고 공감하면서도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이라고 본다. 공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정치는 바이브이다. 같은 정책도 어떤 느낌인가에 따라 다르다. 노동계급의 해방이냐 기독교적 공동체주의냐의 갈림길에서의 사민주의와 기민주의의 차이 그리고 복지국가라는 공통점처럼.
순전히 정치의 무대에서 배우처럼 주목 받고 싶거나 그냥 자기의 신념을 모두를 무시하고 관철하고 싶은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자기가 그 구조/문화/제도 하에서 고통받고 또 그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정치인들이 합리성이라는 명목으로 감정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좀 더 진솔하고 개방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는 단순하게 말해 공적 영역 Public Sphere이다. 공적 마인드가 요구된다. 정치를 사적 마인드로 하는 순간 모두가 불행한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없는 정치는 안 된다. 권력을 잡고 싶더라도 구체적인 왜가 있어야 한다.
현대사회의 리더는 강하기만 하거나 성과에만 집착해 마키아벨리스트가 되면 안 된다. 포용적이면서 나약하지 않고, 책임감과 신념을 가지되 폭력적이면 안 된다. 사려 깊은 사람은 단정하지 않는다. 분명한 문제의식과 윤리적 사명감을 가진다. 이 점은 이낙연, 안철수, 키어 스타머 등의 중도 리더에게는 없는 자질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과 고든 브라운, 테레사 메이, 그리고 이시바 시게루 등을 동일선상에서 평가하지 않는다.
테레사 메이는 약한 총리가 아니었다. 일국보수주의(One-nation Conservatism, ‘Tackling Burning Injustice’, ‘A Country that works for Everyone’), 보수당의 정식 당명(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에서 연합주의(Unionism)의 강조 등 분명한 신념이 있었다. 고든 브라운의 말처럼 ‘Get on with the job’을 위해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녀는 브렉시트 협상의 난항과 대내적인 그렌펠 타워, 윈드러시 스캔들, 긴축에의 저항 등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했다. 더구나 거대한 포퓰리즘-내셔널리즘의 감정과 국민투표에서 패배하고 분노하거나 강력하게 항의하는 거대한 반포퓰리즘의 감정 사이에 끼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녀가 보수주의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여성적(현대적 관점에서는 젠더 스테레오타입)이었다. 그녀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저는 런던시 내의 한 구의회 의원이었죠. 많은 여성들처럼, 저는 사실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리며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 해보셨나요?‘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인터뷰어, ’왜 ‘많은 여성들’이라고 말씀하시죠?)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 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남자는 계획을 세우고 난 25세에 총리가 되겠어, 이 공보물을 봐주십시오, 저는 이렇게 해 나갈 겁니다 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제 세대의 많은 여성 그리고 어쩌면 아직까지도 일정 부분에선 여성들은 내가 자격이 있을까, 할 수 있을까를 자문하고 누군가가 넌 할 수 있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죠. (중략)
저는 다이닝 클럽에 가입하거나, 파벌을 만들거나, 바에 드나들며 술을 마시는 그런 정치인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죠. 어떤 사람은 말도 안 된다, 여기저기 인맥을 만들어 둬야 한다느니 그런 말을 하겠죠. 하지만, 저는 모두가 명백하게 국회의원은 일을 하는 자리라는 점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큰 특권이죠. 공중이 당신을 선출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그들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인터뷰어, ‘자신을 내성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음... 몇몇은 제가 내성적이라고 묘사하겠죠. 저는 자신이 이것이라거나 저것이라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지만, 나 자신으로 있는 것에 편안하다는 생각은 합니다.‘
보수주의는 여성과 결합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사려 깊은 보수주의는 통하는 면도 있다. 자기만의 브랜드보다 흘러온 공동체적 전통을 따르고 현재의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려는 면모는 여성일 때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감대를 표하는 식으로 나타나지만, 남성일 때는 그 자신이 권위의 주체로서 자기 이니셔티브를 펼치려는 식으로 나타난다.
어떤 여성들 또는 여성주의자들은 그런 여성의 ’수동성‘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메이와 같이 여성이 리더십의 지위에 나아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스테레오타입을 깨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성에의 귀착을 제거하고 보면, 전통적인 여성적 미덕은 어쩌면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필요하다. 공감, 겸손, 온정 이런 것들이. 물론 여기에 여성성은 고정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미덕은 여성에게 규범적으로 권장되는 것이라거나 여성에게만 귀착된다는 식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미덕의 내용은 우리 모두가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