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설은 이제 시(City)에 속한다 — 라이언 공업에... 최소한 폭동이 가라앉기까지는. 그런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불운이긴 하지만... 인정해야겠지, 이 건물이 몰수된 것을 보는 것이 기쁘다. 폰테인은 사라졌다. 램도 사라졌고...아니면 거의 사라졌거나. 나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나의 도시와 함께 혼자가. _ 앤드류 라이언(Andrew Ryan)의 오디오 일기, ‘마침내 혼자 남다(Alone at Last)’
내가 오류를 범했을 수 있을까? 의심에 사로잡힌 자는 도시를 건설할 수 없다. 하지만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통치할 수 있을까? 내 신념이 나를 끌어올려 왔음을 아는 만큼 내가 그간 거부해 왔던 것이 나를 파괴할 수도 있음을 안다. 하지만 도시가... 내 눈앞에서... 내가 내 믿음에 너무 깊게 빠져서 진실을 직시하기를 멈춰버리게 된 걸까? 그럴지도. 하지만 아틀라스가 저 밖에 있고, 그는 나를 파괴하고 내 도시를 파괴하려 하고 있다. 의문은 항복이다. 나는 의문하지 않을 것이다.
_ 앤드류 라이언(Andrew Ryan)의 오디오 일기, ‘오류(Mistakes)’
마침내, 우리의 유다를 찾아냈다... 내 사람들 중 하나가 내 활동의 증거들을 라이언에게 가져다 바쳐오고 있었고, 이제 나는 감금될 것이다. 종교로서는, 그들은 단지 우리를 감시할 뿐이었다. 코뮌(Commune)으로서는, 그들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들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되겠지만, 앤드류 라이언은 이미 사람들을 잃고 있다. 내가 어디로 가건, 랩처는 따라올 것이다.
_ 소피아 램(Sofia Lamb)의 오디오 일기, ‘첩자(A Spy)’
선행과 악행의 경계 그리고 악역의 서사나 악인의 행위를 더 깊이 고찰하게 만드는 것은, ‘알면서도 악행’하는 경우일 것이다. 사실 한층 더 복잡하다. 무의식적으로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악행을 인정하면 그것을 정당화했던 자신의 세계관이나 신념까지 붕괴하므로 악행을 멈추지 않는 경우가 있다. 너무 멀리 와 버려서. 의식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또렷하게 앎에도 불구하고 악행을 했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순수한 악인과 악행의 정의 요건에 해당할 것이다.
라이언은 이미 자문을 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잘못할 수 있는가를 묻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최소한 일정 부분은 죄책감을 느꼈을 수 있다. 그것을 명확히 표현한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의문이다. 라이언의 비극은 그가 스스로 생각한 ‘의문을 했다’는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의문을 거부하고 진압해 버렸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앞만 보고 달려오며 러시아의 밑바닥에서 미국의 꼭대기까지 성공한 기업가는, 자기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의 간극을 메우는데 실패했다. 이 간극이 결국 그와 그가 창조한 도시의 운명에 치명타를 날렸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거짓된 이념의 파편들을 모두 치우고 나면 그는 그저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좀 더 그의 사상의 문법으로 설명하자면 도시를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며 소유권행사의 방해배제를 자력구제를 통해 관철하려는..) 폭군이자 대량학살자이자 폭행과 살인과 협박 등의 교사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직면해야 했을 거라는 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문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아픈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만사에는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이다. 도시라는 사회 전체, 그리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명운을 책임졌던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는 매우 거대하다. 그의 생명과 세계는 모두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설득하고 애원하고 심지어 그를 암살하려 하는 지경에 와서도 그는 오히려 자신의 잔인한 인식과 신념을 더 잔혹하게 변질시켜 가며 보존했다.
어떻게 보면 객관주의자의 파멸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적어도 사회적 맥락과 사회적 사실에 있어서는, 객관과 주관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이성과 합리 그리고 진취적 개인은 중요하긴 하지만 이기심에도 정도와 다른 가치와의 균형이 필요한 법이다. 이타심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기심은 근본적으로 그 주체가 딛고 서 있는 사회적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이기심의 추구라는 이기심을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앤드류 라이언이 건설한 랩처(Rapture)는 객관주의 거시사회 실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극한의 자유지상주의와 객관주의는 빈곤, 범죄, 복지, 종교 등의 사회문제들을 가져오며 이는 이기심의 사회적 기반과 사회적 기반 없는 이기심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기심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라는 것이 소멸하면 사회가 파멸하고 그러면 이에 기반한 개인도 파멸한다. 프랭크 폰테인과 소피아 램은 이러한 반작용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개인이 바쳐진다는 것은 더욱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라이언의 철학은 그 ‘시초’만큼은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설령 공동체라 해도, 개인이 사회와 진정으로 ‘혼융’될 수 없다는 점은 사실이고 현실이며 진실이다. 앞서 언급했듯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비극이 닥친다. 라이언과 그의 도시에 닥친 최후처럼.
극단적 집단주의를 넘어 아예 개인의 자아를 생물학적 수준에서 근절해버리려고 한 소피아 램의 그로테스크한 철학보다는 나았을지도. 사실 소피아의 철학도 ‘시초’만큼은 옳긴 했다. 소수만 살아남는 극단적 경쟁 사회에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평등하게 우울하고 불행하다. 약자와 이타심을 무시하고 심지어 경멸하며 배격하는 라이언의 사상은 미묘하게 나치즘의 요소를 담고 있다. 소피아는 라이언의 안티테제이며 치명적인 반격이었다.
인간은 미묘한 존재이다. 악하지만도 선하지만도, 이타적이지만도 이기적이지만도 않다. 어쩌면 그사이 어딘가를 평생 오가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의 삶일지도 모른다. 선, 악, 이기심, 이타심 등은 단지 인간의 단면을 이해하는 개념적 틀일 뿐이다. 진정한 문제는 그 이해를 위한 개념적 틀을 실천적 방향으로 바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직결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