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고통

by 남킹

여인과 보낸 하루는 무거운 날이었다.


짙은 구름, 높은 담장, 거친 바람, 누런 시트, 노란 벽지, 진한 입술. 그녀는 기묘하게도 나비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이 고통받는 육신은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야. 나는 애벌레거든. 어느 날 나의 영혼은 이 모든 더러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날아오를 거야.” 여자는 벗은 몸을 심하게 구부렸다. 마치 척추가 다 빠진 것처럼.


나는 주눅이 든 채 있었다. 칙칙하고 소박한 소도시의 골목. 바람이 비집고 들어간 곳을 따라간 나는, 뜬금없이 화사한 네온사인에 놀랐다. 지친 여인들이 서성거렸다. 추저분한 골목. 그녀가 나를 주시한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꽁무니를 사린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주머니 속 지폐가 사라진다.


“난 아담파 신자처럼 살고 싶었어. 블타바강의 나체주의자 말이야. 권력도 계급도 노동도 화폐도 정부도 군대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사회 제도가 사라진 세상이지.” 여자는 나체 사진이 수북이 꽂혀있는 앨범을 내게 펼쳐 보였다. 다양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자세의 연속.


“언제부터 이런 아나키즘에 빠진 거야?” 방 한쪽을 무질서하게 채우고 있는 수많은 책이 달려들 듯 위태롭게 쌓여있다.


“오래전.”

“오래전? 모호한데.”

“어릴 때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였거든. 내 물건에 절대로 남들이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 특히, 내 동생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깨우친 거야. 내 모습이 남우세스러운 짓이라는 것을.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에 대해서도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세상에 묘한 매력을 느낀 거지.”


“너는 어때?” 여자는 짙은 색의 입술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며 침대에 벌렁 드러눕는다. 출렁거리는 파도에 젖이 덜렁거린다.

“뭐가?”

“뭐, 아무거나. 뭐 어떠냐고? 결혼은 했을 거 아냐.” 여자는 이제 돌아누워 벽을 마주한다.

“응, 얼마 전.”

“얼마 전? 모호한데.” 작고 여윈 동양 여자 곁에 크고 뚱뚱하고 축 늘어진 성기를 드러낸 서양 남자들이 활짝 웃고 있다.

“난 고독이 두려웠거든.”

“바보같이. 다들 그것 때문에 하는 거야! 멍청하게도. 두려움을 참지 못하는 거지.”

“그럼 너는?”

“나? 나는 두려움이 없지.”

“왜?”

“자기의 가장 악독한 적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나는 더 두려울 게 없어.”

“이해가 안 되는데.”

“간단해. 나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면 가할수록 삶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법이거든.”

“그건 고통이잖아. 자신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것. 이건 모두의 권리이자 의무인 거로 알고 있는데….”

“확실히 나의 예전은 그랬거든. 마치 공격을 받지 않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거든. 뭐 사회가 그렇게 요구한 것도 있고. 그냥 스스로 분노를 삼키는 거지. 물론, 속으로 삭인다는 것은 외부로 뻗어야 할 주먹을 내게로 향하는 거지. 그래서 아팠던 거야.


<행동 억제>는 질병을 유발하지. 그러다 어느 날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도피 행위>로 바꾸기 시작했지. 약물은 또 다른 약물을 낳지. 술, 담배, 마약, 강장제, 안정제, 수면제 등등 안 먹어 본 게 없을 정도지. 하지만 약물의 가장 큰 단점은 그 효과가 점점 떨어진다는 거지. 점점 양이 늘어나지. 그리고 늘어나는 양만큼 현실은 점점 견디기 힘든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돼.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각성했지. 모든 약물을 끊고 도서관에 처박혔어. 소위 <예술적 도피>로 넘어갔지. 수많은 책을 읽고 나만의 이야기를 꾸미기 시작했지. 나의 상상 속에 갇히기 시작한 거야. 나의 궁전에서 나는 무소불위의 왕이었고 세상의 고통을 없애주는 의인이었으며 어리석은 자들을 깨우치는 현명하기 이를 데 없는 학자였지. 비로소 나는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은 거야.”


그레고리 흘라디의 묘한 죽음 (21).jpg
거짓과 상상 혹은 죄와 벌 (2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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