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 전성시대

by 남킹

여자와 밤을 보낸 나는 아침에 그녀를 깨워 출근을 시키고 뜨거운 목욕을 한 뒤, 천천히 여관을 나왔다.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다. 인적없는 고요한 아침 골목에 새소리, 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가 낮게 흘러온다.


나는 편의점에 들러 김밥과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간이우산을 산 뒤, 까칠까칠한 입에 담배를 문다. 빗물에 반사되는 어렴풋한 빛의 이미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학원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한 무더기의 새벽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해방의 기쁨을 느끼는지 혹은 경쟁 시대에 남들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만족감의 표출에서 인지, 삼삼오오 짝지은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송골송골 맺혀있다.


낯익은 얼굴도 몇몇 눈에 띈다. 학원이 보너스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멤버들이다.


예를 들면, 팝송반, 작문반, 영화리뷰반, 시사영어반 등등이다. 그들은 출근 전과 마찬가지로 퇴근 후에도 곧장 이곳으로 달려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아낌없이 인고의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그들 중 몇 명은 나를 인지한 듯 꾸벅 인사를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 나는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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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서 회사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다. 그래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냥 걷기로 작정을 했다. 나는 자동차 소음으로 범벅된 대로를 피해 좁은 골목으로 길을 택하고 일부러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현수는 나보다 천천히 걷는다. 남자와 같이 걷다 보면 어느새 내가 몇 발자국 앞서 있곤 한다. 무심히 걷다 보면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도 있다. 나는 가다가 멈춰서 기다리고 그가 다시 나를 앞질러 가면 다시 간다.


남자는 일정하고 나는 빨랐다가 늦기를 반복하면서 그와 보조를 맞춰가며 가야만 했다. 남자는 거의 듣기만 한다. 나는 거의 말만 한다. 자연히 나의 음성은 커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한다.


희미한 아침 스모그 속으로 빗방울이 톡톡하며 떨어진다. 그러자 골목 어디선가 휙휙 거리며 돌풍이 달려들듯 스치며 지나간다. 쓰레기와 비닐들이 춤을 춘다. 나는 가방에서 양산을 꺼내 펼쳤다.


머리 위에서 톡톡 하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나는 조금 전까지 누렸던 방의 따스함을 애써 되새김질하려고 노력한다. 남자는 두 손을 베게 삼아 드러누워 있었다. 남자의 품속에서 숨을 죽인 몸에는 아주 따스한 느낌이 감돌았다. 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파고들어 가슴에다 나의 얼굴을 밀착하고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방안은 언제나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사각거리는 이불 속에서 정액 냄새와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부스스 섞여 올라왔다. 나는 그냥 이렇게 영원히 있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1시간 후에, 나는 들어 왔을 때와 변함없는, 지나치게 굳은 표정으로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마치고 출근을 서둘렀다. 반쯤 열려 있는 커튼 사이로 삐죽 삐져나온 흐린 햇살이 조롱기를 머금고 차가운 현실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다 나는 문득 거울 속에 있는 남자를 들여다봤다. 담배를 문 채, 천장의 한 곳을 무신경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 남자를 말이다. 그는 햇살이 끊어진 위치에 놓인 간이소파에서 벌거벗은 채,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받친 채, 무아경의 세계에 도취해 있는 듯하기도 하고 혹은 자기만의 세상에 갇힌 자폐증 인간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는 나를 사랑한다, 혹은 좋아한다고 한 적이 없고 나를 만나 행복하다 혹은 즐거웠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지독한 에고이즘 환자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릴 적 나르시시즘에서 아직 잠이 덜 깰 소년일 수도 있을 터이다.


그는 ‘오늘 하루쯤 병가 내고 나와 더 있는 게 어때?’ 하는 제안을 하지 않을 지구 최후 인간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 걸까?’

‘나에 대해 단 일 분이라도 생각은 하는 걸까?’


나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빠듯한 한계점에서, 그의 생각을 떨쳐 버리고, 긴장과 우울이라는 공간 속으로 다시 나를 구겨 넣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바닥이 삽시간에 젖어 든다. 마치 무언가 고요함과 정적에서 튕겨 나오는 듯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자동차 경적도 더 크게 들려온다.


‘아버지는 깼을까? 오빠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남자는 여관에서 나왔을까? 아침 먹을 돈은 갖고 다니는 걸까?’

남자에게 물어보지 않은 게 갑자기 후회되기 시작할 때쯤, 나는 회사 입구에 도착했다.


건너 주차장 쪽에서 과장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는 우산을 펼치고 차에 탄 누군가에게 손을 흔든 뒤, 차 문을 닫는다. 차는 천천히 오던 길을 돌아서 대로를 꽉 채운 차들 홍수 속으로 빠져든다.


과장은 본사에서 좌천된 인물이다. 좌천이라는 표현에 약간의 의구심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입사 동기 중 가장 빨리 과장으로 승진했고 본사 인사 부처라는 핵심 요직에 근무하던 이가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와 한직에 불과한 품질관리 부서를 맡게 되었다면, 누가 봐도 이건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꼴이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여러 가지 설과 알 수 없는 풍문들이 꼬리를 물고 돌아다닌다.


그의 독주를 두려워한 동기들의 모함이라는 설에서부터 회사 실세인 부회장의 딸을 건드렸다는, 터무니없는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소문까지 퍼졌다.


여직원들은, 화장실, 복도, 계단, 옥상, 탕비실, 혹은 회식 자리에서든 가리지 않고 그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전파하고 채색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 이면을 잡아끄는 이러한 관심에는 틀림없이 그가 아직 미혼이고 한때 전도유망한 젊은이였으며, 추락이 가져다준 동질감 내지는 연민이 짙게 깔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태연하다. 상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직원에게 친절하며 또한 성실하다. 그는 본래부터 이 자리가 그의 것이었으며 세상의 야망이나 욕심에는 태연한 듯 살짝 비켜주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열 명쯤 모인 회식 자리에서 그는 항상 미소진 모습으로 앉아 있다. 낯가림이 심해, 이야기를 이끌지도, 주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농담도 주고받지 않은 채, 귀를 기울이고 조용히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모두가 웃으면 함께 웃기만 한다.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태생의 기품이 서려 있다.


그래서 나의 사무실에 있는 남자 둘은 한직으로 밀려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으나, 그 분자는 판이하게 상반되었다.


하나는 말초적 본능에 사로잡혀 혀끝과 손끝을 잘못 놀리는 바람에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혀 끝없는 입방아에 올라 있다면, 나머지는 세상의 모함과 부조리에 희생된 양으로 전락하여, 여자들의 지속적 동정과 관심을 한몸에 받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과장에게 여자가 나타났다.


그 징조는 그의 책상에 라벤더가 놓이고 나서다. 두 달 전 어느 날 갑자기 여자가 나타나서는 그 곁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여자는 오전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남자를 회사에 데려다주고 퇴근 시간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나타나 그를 데려간다. 즉, 동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둘 직원들의 목격담이 늘어나고 그에 곱절이나 해당하는 소문들이 무성하게 부풀려 번져갔다. 가뜩이나 눈엣가시처럼, 저와 다른 부류의 인간들에게 느끼는 시기와 질투로 똘똘 뭉쳐, 탐탁지 않게 여기던 부장은, 과장이 자리를 비우면, 예의 그의 내연녀에게 전화를 걸어, 어둡고 칙칙한 온갖 종류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의 입에서 과장은 천하의 호색한으로 그려지고 반사회적 불륜으로 총칭되는 것이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부장의 태도는 불량스러워지고 말버릇도 고약하여 요즈음은 노골적으로 깔보는 듯하여 지켜보는 나를 안쓰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홀대를 바보라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장은 여전히 온화하고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러기에 미스테리한 그 여인에 대한 궁금증만큼이나 나는 그의 처지가 너무도 안타깝다.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나쁜 놈 전성시대가 되었다.


나쁜 놈이 더 잘 벌고 더 잘살고, 나쁜 놈이 권력을 더 많이 지닌 것처럼 보였다. 비열한 거리에는 비열한 인간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많이도 활개 치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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