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의 꿈 (Julia Dream)
"I have no desire to the relationship I mean."
"프로필에 올리신 글을 보고 이 말씀 미리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영어와 한글로 각각 이런 메시지가 왔다. 보낸 이는 juliadream.
나는 내 프로필에 ‘dating’이라고만 썼다. 그녀의 프로필은 영어, 한글, 독어가 섞여 있었다.
living and working in Germany.
I am trying to be positive thousand times but failed 999 times.
Hope it is the last time for this loop.
all kinds of talks are welcome.
지긋지긋한 삶.
입담 없는 수다쟁이.
벗어나지 못한 뻔한 인생에서 아등바등하는 못난이.
Ich bin auf Suche nach äußerlichem Ehrgeiz und innerlichem Glück, die ich seit langem verloren habe.
(I am looking for external ambition and happiness that I have lost for a long time.)
35/여성/중국/160.68km
그녀는 회색 하늘과 고성, 호수를 배경으로 한 사진을 올렸다. 작은 얼굴. 둥근 안경. 아담한 체구. 옅은 달걀색 바바리는 무척 커 보였다. 그리고 불그스레한 작은 입술에서 희미한 미소가 느껴졌다. 무거운 자기소개와 짙은 배경의 사진이지만, 얼굴은 희망의 풍선을 탄 듯 가벼워 보였다. 나머지는 모두 제라늄꽃 사진이었다. 배경 음악으로 <Kwoon>의 <I lived on the Moon>이 흐른다.
나는 살짝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초면에 실례지만, 남녀관계를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인간뿐일 겁니다. 아마.”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사실 여러 가지 답장을 생각하였으나 피곤으로 관두었다.
독일에 온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폴란드에서 비행기가 갑자기 결항하는 바람에, 베를린까지 택시를 타고 와서, 다시 국내선을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거의 하루를 까먹으며 도착하였다. 항공기로 한 시간이면 족한 거리를 말이다.
나는 공항에서 사장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사장님, 무사히 잘 도착했습니다. 오늘부터 2주, 호텔에서 자가 격리 후, 사무실을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국경봉쇄만 아니었다면 벌써 다니고 있을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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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면, 현대인답게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본다. 카카오톡 39개, 라인 22개, 왓츠앱 9개의 읽지 않은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채팅에 중독되었다.
익숙한 솜씨로 메시지를 훑어보고 지나간다. 대부분이 짤막한 단문이거나 이모티콘이다. 우리는 모두 묵시적으로 알고 있다.
내게 온라인 여자 친구가 많이 있듯이, 그녀들 또한 수많은 남자친구가 온라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풍족함은 부족에서 기인하는 절박함을 앗아간다. 그러니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사이라면, 서로의 귀한 시간을 아끼는, 사려 깊은 대답 한마디로 관계 확인만 하고 지나간다. 그것도 아까우면 그냥 이모티콘 하나 콕 찍어 버리면 그만이다.
“도대체 몇 명과 채팅하는 거예요?” 가끔 이렇게 물어보는 멍청한 여자가 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무 많아서 헤아리기 힘듭니다. 대충 삼백 명 넘어요.” 데이팅 앱을 시작하면서 나의 메신저에는 모두 317명의 친구가 실제로 등록되었다. 모두 여자다.
“저 오늘부터 다른 관계 모두 끊고 당신하고만 채팅할 거예요.” 아주 가끔 이런 말을 하는 친구가 있다. 화상 채팅으로 서로가 진짜인 것을 확인한 직후에 주로 벌어진다. 그러면 나는 무조건 차단해 버린다. 이런 여인의 특징은 경험으로 터득하였다. 그녀는 집요하게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물을 것이다.
“당신도 결국은 변태군요?” 이혼한 싱글맘에게 육체적 욕구는 어떻게 해결하세요? 라고 물어보면 종종 이런 답을 듣게 된다. 주로 아시아계 혹은 이슬람교도 여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는 “구글에서 검색하면 당신보다 훨씬 이쁘고 날씬한 여인들의 음란한 사진들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어요. 안타깝게도 당신에게서 어떤 성적인 매력도 느끼지 못하니 그다지 걱정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라고 쏘아붙이고는 나가버린다.
사실 이성 간의 채팅에서 로맨틱한 대화를 빼 버리면 정말이지 할 말이 남지 않는다. 강아지 사진과 밥 먹는 장면으로 한 달 이상 관계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유럽과 남미 쪽 여인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들은 칭찬받는 것을 즐기고 성적인 대화에 큰 거부감이 없으며 섹시하다는 표현을 받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솔직하다. 내면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들은 이미 삶을 깨달을 듯 보였다.
‘인생 뭐 별거 있어?’
‘바람처럼 삽시간에 사라질 운명.’
‘그냥 즐기는 거지 뭐. 애써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잖아. 그들도 먼지처럼 가버릴 텐데….’
그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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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지탱할 만큼만 무겁기를 바랄 뿐이에요.”
“삶을 감당할 힘이 점점 옅어지고 있거든요. 초면에 송구스럽지만.” 나는 juliadream이 보낸 메시지에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머릿속 회로에 때가 낀 듯 적절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뭐지? 자살이라도 하려는 걸까?’
“최근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나는 결국 평범한 메시지를 띄우고 한동안 화면을 쳐다봤다.
최근에는 드문 행동이었다. 다양한 하트 이모티콘을 쑥쑥 날리고는, 답장받는 대로 사랑 타령이나 야한 이야기로 응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뇨, 그런 거는 아니고요. 항상 안 좋을 뿐이에요. 아무튼, 고마워요. 걱정을 해주셔서.” 얼마 동안 기다린 걸까? 다시 머리가 굳어졌다. 답장을 미룬 채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다.
“죄송해요. 쉬는 시간이 다 끝났어요. 내일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나는 시계를 봤다. 얼추 오후 2시가 되었다.
다음날, 오후 1시 반쯤 그녀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세요? 바람속의먼지님. 별일 없으시죠?”
“한글 엄청나게 잘하시던데, 언제 배웠어요? 학교에서?”
“한국인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5년 동안. 그리고 조선족이에요.”
“그럼, 영어와 독일어는?”
“영어 선생이었어요. 중국에 있을 때. 그리고 독일 남자친구와 3년 정도 살았어요. 여기에서.”
“그런데, 혹시 자살하려는 거는 아니신 거죠?”
“하하하, 자살할 수도 없어요. 아기가 있어요. 네 살 된.”
“아빠는?”
“휘리릭….”
“네?”
“그냥 사라졌어요. 어느 날.” 그녀는 사진을 보내왔다. 아기를 품은 모습. 티 없이 맑은 미소.
“혹시 아기의 아빠가 될 사람을 찾는 건가요?”
“아뇨, no desire to the relationship.”
“아, 맞다. 제가 깜빡했네요.”
“아뇨, 제가 죄송해요. 그냥 하루에 한 번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해요. 아주 외롭거든요.”
“그럼, 차라리 가까이에 있는 친구를 사귀는 편이….”
“죄송해요. 시간이 다 되었네요. 그럼 다음에. 감사합니다.”
다음날에도 비슷한 시간에 그녀가 나타났다. 까닭 모를 반가움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우리는 사진을 교환하고, 몇 가지 개인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폴란드에서 내가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 회사에 우크라이나 운전사를 새로 뽑았어요. 그는 틈만 나면 ‘시스키 뷔스키’를 읊조리며 다녔어요. 어느 날 제가 물었죠. 무슨 뜻이냐고? 그는 마침 지나가는 동료 여자를 불러 세우더니, 그녀의 가슴과 음부를 가르치며 키득키득하더군요. 그러면서 한글로 어떻게 되는가를 물어봤어요. 저는 ‘가슴, 음부’라고 알려주었어요. 그러자 그는 그때부터 가슴, 음부를 중얼거리며 다녔어요. 심지어 우리 사장님 앞에서도 멈추질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잘렸어요. 왜냐하면, 사장님이 한국인 할머니였거든요.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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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격리하는 동안 우리는 매일 30분씩 채팅을 하였다. 마치 강박증 환자처럼, 그녀는 비슷한 시간에 나타나 어김없이 시간을 채우고 사라졌다.
그동안 날이 갑자기 무더워지고 여인들의 옷이 삽시간에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녀가 보내는 사진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나는 최근 사진을 요구하였지만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시간이 없어서요. 죄송해요.”
“그래도 언젠가는 보내 주실 거죠?”
“네 조만간에.”
“아주 섹시한 걸로…. 헤헤헤.
”그건, 좀 더.“
그동안 우린 아주 많이 가까워졌다.
“당신에게 키스해도 될까요?”
“하지만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그냥 말로만 하는 거죠. 괜찮죠?”
“네”
“kiss you.”
“yes”
“all over.”
“What?”
“너의 모든 곳에 키스를…. 헤헤헤” 그리고는 다양한 하트 이모티콘을 날리곤 하였다.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친구 이상의 감정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를 ‘my lady'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두서없이 채팅을 이어갔다. 딱 하루에 30분이라는 것이 점점 조급하게 다가왔다. 재치가 번듯이는 답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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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의 첫 출근. 나는 고속열차를 타고 한 시간을 간 뒤, 마중 나온 회사 차량을 이용해 20분을 더 달려 회사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독일 시골의 풍경이 펼쳐졌다. 짙은 숲이 끝나면 벌판이 나타나고, 그 끝자락에 주택들이 하나둘씩 보이다가 어느새 상가나 사무실, 꽤 높고 잘 보이는 교회가 있는 광장이 나타났다.
우리는, 물푸레나무가 무성한 잎을 자랑하는 어느 사무실 건물 앞에 주차했다. 그리고 사장을 만나 체면치레의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그는 편한 반바지에 낡은 슬리퍼를 찍찍 끌며 모든 직원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사장의 차를 타고 내가 근무하게 될 공장으로 향했다. 나는 그곳에서 관리자로 일할 것이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우리는 지나치게 넓은 공터와 꽤 높은 공장 건물 앞에 도착했다.
“사실, 이 공장 계약할 때만 해도 너무 넓어서 무척 망설였는데…. 지금은 여기 옆에 같은 크기로 하나 더 지으려고 합니다. 하하하….” 그는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제라늄 화분이 일렬로 길게 늘어선 복도를 지나, 마침내 공장의 전경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곳으로 나를 인도했다.
여러 갈래로 길게 늘어선 컨베이어 벨트 혹은 선반 주위로 직원들이 옹기종기 달라붙어 포장 작업을 하고 있었다. 큰 문이 보이는 입구 쪽에는 포장된 물건을 팔레트에 싣고 있고, 그 주위로 지게차가 부산하게 오고 갔다.
“저 직원 대부분이 중국인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현지인을 채용했었죠. 하지만 인건비 감당이 안 돼요. 게다가 우리의 주요 시장이 이제는 중국이잖습니까. 발 빠르게 중국에 진출한 게…. 신의 한 수였죠. 이제 우리의 큰손은 중국 졸부들입니다.” 그는 경박스럽게 코를 킁킁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저 친구들은 근무시간도 길어요.”
“어느 정도인가요?”
“15시간요”
“오전 5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한 시간의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1시부터 2시까지.”
“그러면….”
“네, 그렇죠. 거의 잠만 자고 일만 하는 거지.”
“그리고 한 달에 딱 한 번 놀아. 시간당 임금을 받으니 잘 안 놀려고 그래.”
“뭐 사실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해봤자 우리나라 직원보다는 턱도 아니게 작은 임금이지만….”
“뭐 어쩌겠어요. 정글의 법칙이 그러한 것을….” 그는 연신 코에 손을 갖다 대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중국인이 이탈리아에서 만든 명품을 중국인들이 여기에서 포장하고 운반하여 중국에 판매하는 거지. 그리고 돈은 이탈리아, 독일, 우리가 벌고.“
우리는 천천히 철계단을 이용해 현장으로 내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작업 속도가 무척 빨랐다. 그들은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한가지 조심할 사항은….”
“절대 타이르지 말고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거지. 그냥 명령만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끝없이 기어오르려고 할 거예요.”
“...”
“아직 공산주의 사상에 길들어서 그런 것 같더라고….”
“딱 한 사람, 매니저 말만 들어. 그 외에는 전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몇몇 직원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지나쳤다. 우리는 그들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어떤 여직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돌아가며 여러 직원에게 뭔가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 근무한 친굽니다.” 사장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마디로 여기 실질적인 리더라고 보면 됩니다. 만능 꾼이에요. 4개 국어를 합니다. 저래 봬도. 중국어, 한국어, 영어, 독어. 거의 모든 통역을 합니다. 앞으로 우리 김 부장님을 많이 도와줄 거예요.”
여인이 우리를 알아챈 듯, 목에 감긴 녹색 수건을 풀어 젖히며, 나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작은 얼굴. 둥근 안경. 아담한 체구.
나는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티 없이 맑은 미소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 수척했다. 나는 머쓱한 상태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 사장이 내게 속삭였다.
“한 번씩 저녁 사주고 분윳값 정도만 주시면 아주 정성스레 잘해 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저 친구 돈이 아주 궁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