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by 남킹

기차는 도착하고 날은 여전히 선선하다. 낯선 도시에 첫발을 디딘다. 하늘은 낮고 기분은 높다. 상쾌한 바람이 콧등을 누비고 가벼운 발걸음의 행인이 오간다. 도시의 짙은 향이 훅 들어온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이방인이라면 의당 그러하듯이, 낯섦을 포옹하기 시작한다. 새로움이 주는 향긋한 신비로움 혹은 고상함. 시간에 비례하여 욕망의 폭과 깊이에 빠지고 있다. 나는 예약한 호텔을 표시한 내비게이션을 다시 확인한다.

그녀를 처음 만날 것이다.

붉고 선명한 입술과 푸른 눈동자. 가슴이 봉긋 두드러진 반투명 명주실 티셔츠와 하늘하늘한 자주색 랩스커트가 펄럭인다. 그녀는 스프리스 나무에 기대고 있다. 혹은 버버리 체크 코트로 무장한 단정한 모습으로 보라색 엉겅퀴꽃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플랫폼을 서서히 지나 광장의 탁 트인 하늘로 걸어간다. 모든 생경함은 설렘을 준다. 가보지 못한 곳. 익히 알지 못하는 이곳. 나는,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까만 공간을, 나의 도착으로, 마침내 그려낸 한 폭의 풍경화를 대한다는 착각을 종종 하곤 한다. 사실이 무엇이든 그저 좋다.

도시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모습을 반향한다.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여기 또한 무질서, 단정함, 직선과 곡선, 스멀거리는 연기와 무심한 행인, 시선을 사로잡는 광고판, 매끈한 길과 투박한 도로, 정적이지만 꿈틀대는 규칙, 모든 바람의 혼란과 지저분함의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마치 하늘과 나무, 건물과 인간의 소재들이 버무려져 내는 거대한 그림판과 같다.

그녀가 가까이 살고 있다. 설렘과 흥분, 기우와 기대가 복잡하게 얽힌다. 숨은 단속적으로 짧고 얕게 흐른다. 살아있음을 아끼게 한다.

보라색 꽃 사진들이 눈에 띄네요.

네, 전 보라색을 좋아해요. 옅은 보라, 짙은 보라, 우울한 보라.

뭐로 살아가요?

네?

그러니까…. 뭐, 직업 같은 거 말입니다.

아, 네. 직업요? 무직이에요. 취직이란 강탈당하고 지루해 죽는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에요. 그래서 안 하려고요. 하는 족족, 마치 깊은 모서리에 찍힌 것처럼 긁힌 자국만 남아요.

그럼 어떻게 살아요?

그냥. 그럭저럭 살아요. 부모님 도움도 좀 받고요. 사진도 좀 팔고요. 아르바이트도 한 번씩 하죠. 돈이 아주 궁하면요.

그럼 사진작가인가요?

그냥, 누군가 제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대체로 나이 든 사람이지만…

당신이 저를 고른 건 제 나이 때문인가요?

아뇨, 딱 그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나이 든 사람이 편해요. 그리고 당신 미소가 좋았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저하고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데 괜찮겠어요? 저는 진지하게 사귈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만.

상관없어요. 제 마음이 가는 데로 저는 가거든요. 그냥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얘기할 거예요.

저에 대해서 좀 아세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데 당신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단지, 당신 표정에 끌릴 뿐이에요.

하지만 중년의 모습이잖아요.

예전의 바보 같은 관계 실패 속에서 몇 가지 배운 게 있다면, 껍데기에 현혹되지 말라는 겁니다. 죄송해요. 속어를 사용해서. 저는 그냥 그래요.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시선으로 끌어내는 관계일 따름이죠.

가볍다는 뜻인가요?

원래 인간이 가볍잖아요.

하지만 남자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두려우면서도 그 빛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과 같이…. 특히, 자기 여자에 관해서는 말입니다. 깊이 빠져드는 그 무엇인가가….

어쩌면 그래서 당신에게 끌릴 수도 있을 거예요. 마치 증명사진 같은 딱딱한 소개 사진 속에 맹목적으로 누군가에게 빠지고 헌신하는 모습을 느꼈거든요. 레토릭이 아닌 진심 말이에요.

당신이 사는 곳은 어떤 곳인가요?

뭐, 그저 비슷해요. 다른 도시랑.

그래도 뭐, 특징이 있을 거 같은데요.

있죠. 특징은 많죠. 아주 큰 광장이 2개가 있고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누비고 다니죠. 정복을 기리는 기념탑이 곳곳에 있고, 반대로 독립을 상징하는 큰 건축물이 도시의 4면에 배치되어 있죠. 즉, 정복하고 정복당함의 대상이 될 정도로 요긴하거나 아름다운, 혹은 탐스러운 곳이라고 봐야겠죠. 바로 제가 사는 이곳 말이에요.

당신을 만나 봐야 할 요건이 또 하나 추가되었네요. 하하하.

노랗고 성긴 그물들이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들 사이로 까만 탑들이 보였다. 비둘기가 무리 지어 후드득 날고 그 사이로 아기가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뛰어간다. 평화롭다. 마음은 언제나 생각을 조정한다. 조작된 생각은 꾸밈이 주는 행복에 가끔 취해버린다. 따스한 초저녁이다. 나는 내 인생의 겨울에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그리워하는, 일종의 반전 드라마가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별이 이어지고 낙담다운 징조가 늘 뚜렷하게 따라왔다. 낮게 드리운 무거운 구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세월의 무게만큼 쌓였고, 차츰 뚜렷한 절망으로 변해가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냥 방전된 배터리로 간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리기 전에 혹시나 해서 끼워 플래시를 켜 보니 눈부시게 환한 감정이 밝아왔다. 놀랍고 좋았다. 버리지 않고 모아두길 잘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과 스마트 폰, 앱의 탄생이 내 삶의 은인이다. 타자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외롭기 그지없는 존재. 자신의 코나투스 보존에 이처럼 살뜰하게 좋은 수단이 있었을까?

투명한 녹색 눈을 반짝이는 프로필 사진을 줄곧 쳐다봤다. 몇 장은 극단적인 명암 대비 효과를 적절하게 집어넣었다. 서른 살에 걸맞은 아름다움을 걸치고, 미소에는 삶의 기쁨이 배어 있다. 이목구비가 선명하다. 그리고 무척 가늘었다. 홀쭉한 목선을 따라 보라색 혈관이 도드라진다. 가슴은 착 달라붙었고 사타구니는 주먹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넓었다. 둥근 티타늄 안경. 금색 머리는 말총으로 묶여있다.

광장 포석에서 옅은 치마를 날리며 입술을 닫은 채, 웃고 있는 모습. 잘 된 작품에는 경련을 일으킬 것 같은 치밀한 환상이 흘러넘친다. 나는 그 속을 즐거이 유영한다. 첫 2주 동안 우리는 매일 대화를 나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향한 알 수 없는 감정선이 높고 깊어졌다.

가까이에 사는 것 같은데…. 차로 한 2시간 정도…

네, 그래서요?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뭐, 사랑하거나 좋아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죠. 당연히 만나야겠죠.

그럼 저 좋아해요?

네.

그럼 만나도 되겠네요.

그렇다고 봐야겠죠.

만나서 같이 잘 수 있어요?

자는 게 목적인가요?

사랑이 목적입니다.

사랑을 빙자한 욕망 추구는 아니고요?

아름다움 혹은 사랑이 선사하는 육체적 끌림에 단지 충실할 뿐입니다. 추잡한 남자의 뻔한 욕망이라고만 깎아내리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노력하지만 그저 퉁명하게 질문할 수밖에 없군요. 변태인가요?

당신이 그렇게 규정한다면 그렇다고 봐야겠죠. 단어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저 당신은 섹스를 위해 피상적인 만남을 가지려는군요.

제가 누굴 탓하겠습니까? 사랑을 지나치게 고상하게 만든 옛사람들의 잘못인데. 장담하건대, 한 100년쯤 지나면 거리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섹스하는 세상이 될 겁니다. 지금 길거리에서 키스하듯이.

하하하.

하하하. 수긍의 답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세상 사람이 이 만남 앱에서 목적하는 바를 세세하고도 명확하게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거의 모든 인간이 속물스럽기 짝이 없는 변태일 겁니다. 저는 그냥 성의 굴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다지 절절하게 분노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무척 따사로운 표현이군요. 뭔가 좀 애잔하기도 하고요. 성의 굴절. 에둘러서 표현한 당신의 욕정. 쌉싸래한 맛이 느껴지는군요. 무용의 유용성 같은 것인가요?

저는 단지 사랑으로 부푼 가슴속에 잠들고 싶을 뿐입니다. 바로 당신 품속에….

‘하지만 아직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나는 곧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과 사람과 샛별과 가로수 불빛을 다정하게 쳐다본다. 시간은 지나치게 상대적이다. 기다림은, 시간을 아주 가늘고 진득한 고무줄처럼 길게 길게 잡아 늘이고 있다.

그 전에 나는, 내 여인의 도시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훑어볼 생각이다. 그녀가 남긴 발자국을 상상하고, 그녀가 걸터앉은 카페 의자를 추리하고, 그녀가 피우다 흘린 담뱃재를 품은 바람을 맞을 생각이다. 나의 눈과 코와 귀, 피부는 일련의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으로 예민해진다.

날래고 눈치 빠르고 꾀바른 새들이 무리를 지어 가로수와 가로수를 이어간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인조 그대로의 냄새가 느린 발자국 사이에 어우러진다. 그리움이 나의 걸음을 규정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쉽게도 내가 들여다본 시간은 거의 정지한 듯하다. 하지만 어둑어둑해진 도시는 이미 내 곁에서 온기를 가져간다.

우리는 가끔 서로의 사진을 교환하기도 했다. 나는 그중에 가장 멋진 그녀의 사진을 인화하여 스와로브스키 둥근 액자에 담아 두었다.

제냐는 야외 카페에 앉아있다. 갈색의 둥근 테이블. 투명한 하늘. 박하 잎 아이스 복숭아 벨리니 칵테일이 담긴 유리컵, 포크와 나이프. 그것을 감싼 쥐색 종이 냅킨. 두툼한 녹색 잎과 붉은 꽃을 단 투박한 선인장 화분. 여자는 배에 두 손을 모은 채 은은한 미소를 보낸다. 미소진 볼에 주름이 보인다.

당신의 예전 사랑은 어땠나요?

비참했죠. 경박한 바람둥이를 만났거든요. 여자와 하는 이상한 줄다리기에 빠진 인간이었어요. 아마도 여자가 그에게 넘어오는 순간, 그는 자기 삶에 대한 당위성을 얻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절교를 한 건가요?

사실 절교도 필요치 않았어요. 그냥 눈에 띄지 않으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꽤 많은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도 느끼겠죠. 우리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구나 하고. 아무튼 헤어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느낄 때쯤 해서 저는 무척 바쁜 일들을 심하게 처리하면서 다녔어요.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결국 헤어졌군요?

모르겠어요. 오래전 일이라…. 그렇게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있었는데…. 그런데, 갈등이 사라지니 그것마저 그리워지더군요. 물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바람이 곁을 지킨다. 속삭이듯 연하고, 수줍은 듯 주춤거리며 다가오다 문득, 부드럽게 어루만지다, 멀어진 듯하더니 다시 돌아온다.

강을 품은 바람 냄새가 나곤 해요. 인적이 드문 골목에 서면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좋은 냄새 말이에요. 당신에게 주고픈 향기 말이에요.

너무 차갑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늘 당신은 그게 걱정이죠. 알아요. 선한 마음은 그냥 아무 말 없음에도 묻어나곤 하죠. 하물며 우리가 본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이렇게 따스함을 느끼잖아요.

분홍빛, 노랑, 하얀색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이 휘다 반듯하고, 좁았다 넓어지기도 한다.

그냥 골목골목을 휘젓고 다니죠. 익숙한 곳이지만 늘 새롭게 나타나죠. 미처 보지 못한 것일 수도 혹은 그냥 내 기억에 사라진 것들도 있겠죠. 어쩌면 조물주가 장난삼아 하나 정도는 살짝 순식간에 집어넣은 것일 수도 있고요.

신의 존재를 믿는가요?

아뇨, 믿지 않아요. 그냥 우연히 태어났고 그렇게 사라질 거로 생각해요. 사실 제가 생각하는 이것도 머릿속 어딘가의 화학작용에 기인한 결과일 뿐이죠.

그거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닌가요?

아뇨, 오히려 반대로 편안해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가장 거추장스러웠던 남들의 시선도 이젠 다정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규칙, 규정, 관습, 걱정, 불안, 미련 같은 용어들이 제게 남지 않아요. 그 대신 늘 사랑을 꿈꾸죠.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고요.

그리움이 가슴을 옥죈다. 걸음 마다에 갈증이 붙어있다. 한패의 남녀가 쾌활한 웃음을 흘린다. 정감을 담은 눈길이 마주치고 미소가 뒤를 따른다. 행복을 품은 인사가 다가온다.

할로. 할로. 할로.

좁은 골목이 끝나고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물소리가 들리고 다양한 소음이 퍼진다. 요란한 분수대가 나타났다. 제냐의 모습이 영상 속에 펼쳐진다.

햇빛과 반사되는 물안개 속에 그녀는 환한 미소로 삶을 즐긴다. 따사로운 여름 햇살. 그녀는 튀어 오르는 물방울 속에서 짓궂은 표정으로, 마치 영화의 주인공처럼 쾌활하다.

도시에 오면 꼭 이 분수에 들러 주세요.

꽤 독특하군요.

재밌고 신나요. 혼란스럽고 산만하잖아요. 어릴 적 제 방처럼요. 어쩌면 질서정연함은 우주의 근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것은 대혼란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물론 제 머릿속은 아직도 혼돈으로 가득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놀랍도록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요. 제가 이렇게 되리라곤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어요?

그녀는 가슴을 출렁거리며 한껏 요염한 뒤태를 보인다.

이 영상 저를 위해 찍은 거는 아니겠죠?

하하하. 물론 아니에요. 당신을 알기 꽤 오래전에 촬영했거든요. 제 동생의 손과 풋풋한 미소를 보세요? 지금은 아주 징그럽게 커졌어요. 냄새도 나고요. 하하하. 정말이지 징글징글하게 말도 안 듣고요.

화려하고 복잡한 로코코 양식 위에 걸터앉아 무진장하게 넓고 잘 정돈된 정원을 배경으로 소녀는 무척 밝게 웃고 있다. 그러다 어느새 시장 짚단 속에, 푸석한 먼지에 파묻혀, 낡고 오래된 것들에 둘러싸여, 흐린 미소를 보내기도 한다.

그동안 당신은 몇 번이나 사랑에 빠졌나요?

솔직한 대답을 원하나요?

네. 어차피 당신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비난하거나 욕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런 사이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문제죠. 미래 어느 시점에 말입니다. 운명처럼.

하하하. 뭐 그렇게 되더라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도 사랑에 관하여, 세상의 하찮기 짝이 없는 도덕과 관습, 규율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많아요. 무척 많아요. 셀 수도 없이 많아요. 어떤 때는 길을 가다가 지나치는 여인에게 홀딱 빠질 때도 있어요. 물론 찰나와 다름없지만.

음…. 제가 질문을 잘못 드린 것 같군요.

아뇨, 제가 죄송합니다. 현문우답. 헤헤헤.

그럼, 첫사랑은 언제였나요?

사실, 첫사랑이 명백하지 않습니다. 남녀의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몇몇 여인들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첫 경험은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건 잊을 수가 없죠.

좋았나요?

그저 총각 딱지를 떼게 한 바람 같은 것이었어요. 하지만 페가수스를 탄 듯 황홀했죠. 틀림없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니까. 정갈하고 환한 천국이라 생각했어요. 다만 칙칙하고 어두운 골방 같은 창고여서 좀 그다지 낭만답지는 않았어요.

여러 번 한 거예요?

처음이니까. 당연하게도. 모두 다 그래요.

첫날은 원래 많이 하는 건가요?

시작은 원래 그래요. 새로움은 신비롭고….

그래서?

음…. 의기충천하게 되지요. 재치도 번득이고.

재치?

응. 어릴 때 무척 낮은 존재감으로 살았거든요. 세상의 모든 연인을 시기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재치와 무슨 상관이에요? 정말 두서없이 말을 하는 것 같군요. 크크크.

음…. 맞아요. 딱히 재치가 적합한 단어는 아닌 것 같군요. 뭐랄까??? 뭔가 적합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러고는 또 뭐가 생각나세요?

아팠어요.

몸이? 마음이?

둘 다요. 여자가 힘들고 지치고 아픈 듯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가는 모습을 그냥 지켜봤어요. 경박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누워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뭐 나도 많이 지쳤으니까. 모든 황홀함 뒤에는 쓸쓸함이 느껴지고는 하잖아요. 동시에 삶의 척박함을 그 기준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오한이 들기 시작했고요. 사흘을 꼼짝없이 누워 있었어요.

또 기억나는 거는요?

또 다른 관계를 이루기 위한 숱한 시간 낭비가 있었죠. 하지만 기억은 중독으로 이어지죠. 오로지 향기와 피부의 마찰을 통해서만 영감을 받았거든요. 내 삶 대부분의 불행은 권태로움에서 비롯되었어요. 그래서 여자를 심하게 쫓아다녔어요. 만남이 아찔한 경이가 되던 시절이었죠.

전, 그런 관계에 관해 무지막지하게 많은 것들이 알려졌으므로 인해 좀 시큰둥한 편이에요.

사랑이란,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었던 것, 하면 안 되는 것까지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 들어 본 적 있어요?

하하하. 혹시 주위에서 당신을 속물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만약 제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그대로 글로 나타내는 기계가 있다면 전 틀림없이 파렴치한 성애 주의자로 낙인이 찍혔을 겁니다. 아마.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인간은 다 저와 같을 거라고. 단지 얼마나 잘 숨기고 아닌척하느냐 하는 차이뿐이죠.

와, 당신의 솔직함에 경의를.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음…. 모든 사랑의 순간은 단 한 번뿐이라는 거죠. 다시 돌아오지 않죠. 그러한 사실을 완전히 깨우쳐야만 진정한 사랑이 성립된다고 봅니다. 괜히 좋아하는 척, 황홀한 척할 필욘 없죠. 그건 그냥 교묘히 피해 가려는 수작일 뿐이잖아요. 진지하게 그냥 맞닥뜨려야 해요. 두려워할 게 전혀 없죠. 어차피 우린 지푸라기처럼 약한 존재니까. 세상의 이목? 아무것도 지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봐요. 그냥 저지르고 보는 거죠. 그러면 된다고 봅니다. 그것뿐입니다.

음…. 본능적으로는 당신의 제법 공격적인 생각에 반기를 들고 싶은데….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용기에는 손뼉을 쳐주고 싶네요. 아무튼, 첫 만남부터 우린 아주 오랜 연인처럼 속마음을 속삭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313호 카드키를 받았다. 홀은 대리석으로 매끈하고 음악은 <프랑수아즈 아르디>로 상큼하다. 장식이 지나치게 큰 창에 무겁게 담겨있다. 시스티나 천장화 사진들이 손바닥 크기로 옆 벽면을 나란히 채우고 있다. 안팎 두 겹으로 매달려 올라간 비단 커튼이 가볍게 살랑거린다.

계단을 이용해 3층 복도로 올라갔다. 큰 걸개 사진이 눈에 띈다. 오래된 중세 수도원과 검은 땅에 자란 풍족한 포도밭이 언덕 전체를 끝도 없이 덮고 있다. 흥분 속에 발걸음이 휘청거린다. 두려움과 설렘이 시시각각으로 교차한다. 왼편 309호에서 맞은편 310호, 다시 맞은편 311호.

우리의 방으로 향하는, 발끝이 내딛는 곳마다 공간이 살짝살짝 흔들린다. 자신이 예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내밀한 세계에 푹 빠진 느낌이다.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의 방이었다. 침대 바로 위에는 <앙투안 바토>의 작품이 걸려있다.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Blauer Fluss Hotel Room 313

당신이 말한 호텔에 방을 잡았습니다. 와인도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올 때까지 영원히 기다릴 겁니다.’

답장은 곧 왔다.

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당신이 궁금해서라도 서둘러 가야겠네요. 고마워요.

샤워를 마친 나는, 화장실 옆 작은 창에 의자를 가져와 걸터앉아 검은 도시를 바라봤다. 적막과 한적함으로 둘러친 커튼이 바람을 안고 속삭인다. 옅은 어둠 사이로 가로등이 박혀 있다. 그리고 창을 반쯤 열었다. 어둑한 침실 끝에 반사된 거울 빛이 들어왔다. 밝지도 눈부시지도 않은 내 속에 그녀가 꿈틀댄다. 그냥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죽을 거. 그냥 성욕에 몸서리치다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노란 전조등과 속도가 만든 도로의 선들이 수백 가지의 흐린 소음과 얽힌다. 차들은 뒤엉키고, 잠시 멈칫거리더니, 이내 빠르게 흐르다가, 다시 평온한 흐름으로 바뀌었다. 도시의 친근함에 빠져든다. 하지만 여전히 시간은 지독하리만큼 느리게 흐른다. 아직 4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애간장을 끓게 만드는 첫 만남의 신비. 나는 유튜브에서 <Archive>의 노래 <Again> Long version을 튼다. 그리고 새틴 웨딩드레스에 휘감긴 그녀를 상상한다.

이윽고 휴대전화 액정이 밝아진다. 그리고 익숙한 알림 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친구, 제냐가 가까이에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화면에 그려진 지도 속에 반짝이는 하트 이모티콘. 800m도 채 되지 않는 곳에 내 여자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나타난 그녀가 반갑기 그지없다. 나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고 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옷을 다시 입는다.

나는 두 귀 있는 데까지 모자를 곽 눌러 고쳐 쓰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무심한 고즈넉함이 공간을 메웠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보름달은 벌써 흐릿한 구름 뒤로 사라졌다.

밤이 유리창을 모두 덮었다. 그렇게 누렇고 뿌연 도시가 자신을 감췄다. 바람은 한기를 머금었다. 걸을 때마다 바지가 사각거렸다.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거리의 소음이 커졌다. 해묵은 이미지가 보이는 구석구석을 채웠다. 그리고 제법 가까운 거리에 횃불이 하나둘씩 보였다. 그리고 하늘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지는 회색 연기가 무거운 춤을 췄다.

그런 날이 있었던 거야. 우리가 모두 그런 것처럼, 사랑이 새겨진 유전자가 어딘가에 박혀 있잖아. 지독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행위 말이야.

구불거리는 거리를 다시 지나친다. 점점 그녀와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화려한 조명이 감싸고 있는 매혹적인 건물 앞에 다가선다. 마치 로만 바스(Roman Bath)를 연상케 한다. 커다란 아치 지붕과 테라스가 보인다. 외벽을 장식한 아름다운 대칭과 정교한 조각. 입구에는 로마 황제와 총독으로 보이는 하얀 동상이 서 있다. 만남 앱이 표시한 그녀와의 거리는 불과 20m.

그녀는 여기에 있는 게 틀림없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떤가요?

저의 어린 시절?

사람들의 굄을 늘 받기를 원했죠. 하지만 아시겠죠? 그렇지 않았기에 그러함에 갈증을 느끼는 상황을…그래서 그런지...어릴적부터 그다지 먼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있어요. 목표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요. 그저 항상성을 유지하고 평형을 조절하는 거죠. 붓다가 그랬다고 그러더군요.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깨달음은 혼자 스스로 하는 거라고.

깨달음을 갈구하는군요?

아뇨. 정반대죠. 행복을 원합니다. 아주 행복하거나 황홀한 순간을 추구합니다. 사실 그 상태에서는 깨달음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어쩌면 깨달음은 끝없는 절망의 심연에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뭔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일찌감치 포기했어요.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꿈, 미래 어느 것 하나 그다지 소원하지 않아요. 그냥 내 몸이 가는 데만 향할 생각이에요. 어쩌면 심하게 자유를 갈구한다고 봐야겠죠.

나는 건물 입구에 적힌 안내문을 바라봤다.

입장료 : 4시 이전에는 50유로, 이후에는 70유로

영업시간 : 일요일~화요일은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수요일부터 토요일은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나는 계산대에 가서 돈을 냈다. 여자는 생긋 웃으며 내 손목에 팔찌 띠를 채워준다. 그리고 키를 건넨다. 277번.

카운트를 지나 좁고 밝은 통로를 벗어나자 홀이 나타났다.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 여인들은 모두 알몸이었다. 나의 시선과 두뇌는 재빠르게 그들 하나하나를 스캔하고 평가한다. 지나치게 심장이 빨라진다. 신묘한 감미로움이 내 속을 채우고 넘쳐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 제냐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알람이 울렸다.

‘마침내 만나셨군요. 축하합니다. 행복한 시간이 되세요. 당신의 큐피드 보너스 점수 5만 점이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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