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닮아 푸르게 상처 난 바다.
여인은 바다에 사진을 새기고 나는 사진에 바다를 간직한다.
프롤로그
택시는 오전 8시 정각에 도착했다. 나는 2층, 내 방 창가에서 이 광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휴대전화의 벨 소리를 기대했다. 하지만 운전사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멍하니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짐가방을 들고 계단을 통하여 1층으로 내려갔다.
운전사가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여 뭔가를 하였다. 그러자 트렁크가 자동으로 서서히 올라갔다. 그는 아주 귀찮은 듯, 천천히 문을 열고 나와, 나의 짐 일부를 받아 트렁크에 실었다. 그는 적어도 육십은 넘어 보였다. 머리카락은 대부분 빠져 있고 턱수염은 은색으로 덥수룩했다. 퀭한 눈과 무표정한 모습 속에 전형적인 독일인의 무뚝뚝함이 묻어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이런 사람은 공항으로 가는 내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을 타입이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지금 누구하고 말할 기분이 아니다. 더구나 낯선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흐린 하늘이었다. 택시가 5번 아우토반으로 접어들었을 때, 빗방울이 창에 톡톡 부딪히며 빠르게 옆으로 흘러내렸다. 도로는 한산했고, 양옆으로 펼쳐진 완만한 언덕에는 노란 유채꽃이 눈이 부시도록 펼쳐졌다. 매년 보는 익숙한 광경이지만 볼 때마다 감탄이 올라왔다.
독일에 온 그해 겨울, 어렵게 구한 월세방에서, 나는 지겹도록 많은 눈을 맞았다. 자고 나면 온통 하얀 세상. 밤이 이슥해져도 환하게 밝은 풍경. 마치 동화 속 산타 마을 같은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가올 봄에 펼쳐질 금빛 세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내 집 베란다 바로 앞에서 말이다.
적당히 외진 곳에 있는 나의 보금자리는, 처음에는 밀밭 한가운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옥수수밭이 되었다가, 별안간 유채밭으로 둔갑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서른 번도 넘는 봄이 빠르게 스쳐 갔다.
그러는 사이, 애들은 성인이 되어, 각자의 짝을 만나 독립하였으며, 나는 재작년에 은퇴하였다. 내가 은퇴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아내의 병세가 절망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작년 봄, 유채 향기가 절정을 이루던 즈음에, 결국 내 곁을 떠났다.
아내는 마지막에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30년 가까이 같이 살았지만, 그녀는 낯선 이를 대하듯 멀뚱멀뚱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였다. 나는 그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면, 솔직히 그 고통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어린애가 되어, 잠을 자듯 편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뒀다.
1.
나는 아내가 처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독일에 머문 지 3년째였다. 단출하기 이를 데 없는 회사의 영업과장으로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날이었다. 그 당시 회사는 독일어와 불어,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통역할 수 있는 외국인을 오랫동안 구하고 있었다.
나는 금발에 파란 눈, 육중한 몸매의 통역사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전형적인 아시아인이었다. 자그마하고 비쩍 마른 외형에, 막 휴가에서 돌아온 듯, 까맣게 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급히 그녀의 이력서를 다시 훑어봤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뿐만 아니라 나머지 내용에서 한국인 혹은 아시아계라는 단서가 될 만한 어떤 내용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성장하였으며, 독일에서 대학을 나와, 최근까지 영국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당연히 예상한 듯 유창한 독일어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이번에는 영국식 영어로 재차 설명하였다. 자신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프랑스로 입양되었으며, 자란 곳이 독일과 국경을 접한 <알자스-로렌> 지역인데, 이곳은 한때 독일 점령지였기에, 자연스레 독일어에 능통하다는 거였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최근 약 3년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 전역에 여행하듯 두루 살았다고 하였다.
“많이 돌아다녀야 할 텐데 괜찮을까요?” 나의 첫 질문이었다.
“그래서 지원했어요.”
우리는 그녀의 기대에 호응하듯 유럽 전역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이용한 절단 혹은 연마 제품을 유럽의 기업체에 팔러 다닌 것이다. 한 달에 이십일 정도는 길에서 보냈다. 가까운 곳은 차로, 먼 곳은 비행기로 다녔다. 먼 곳에 갈 때가 더 많았다. 어느새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집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곳이 되었다.
처음 두 달 동안은 호텔 방을 따로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차로 2시간을 달려 나타난 한적한 외곽의 시골길에 우리는 차를 멈췄다. 울창한 숲에 비교해 아주 작은 팻말이 이곳이 공원 입구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우리는 막 계약을 끝낸 상태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정표를 따라 걸었다. 하늘을 덮을 듯, 높은 자작나무 사이로 좁은 길이 끝도 없이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녀림의 호수가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마주 보고 미소를 보냈다. 행복감이 몰려왔다.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내 곁의 여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호수길을 따라 온갖 모양의 버섯, 작고 달콤한 산딸기,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베리들이 행인을 유혹하였다. 그녀는 익숙한 듯, 산딸기와 베리를 따서 한 움큼 내게 내밀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가 까매지는 것을 지켜봤다.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더는 욕망의 랩소디를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향한 나의 주체 할 수 없는 끌림을 묘파하고 말았다. 아내의 손을 처음 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날 이후, 우리는 호텔 방을 하나만 사용했다.
2.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는 채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울컥거리며 눈물을 쏟았지만, 예상대로 운전사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그 흔한 인사말 <당케>라는 말 한마디 없이 헤어졌다. 덕분에 나는 팁을 아꼈다. 그리고 차 바닥에 흘린 콧물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여행용 가방을 끌었다. 이마와 얼굴, 어깨에 쏟아지는 빗물이 차가웠지만 따스하다고 느꼈다. 고개를 들어 빗물에 흐린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시멘트 빛 하늘 사이로, 항공기들이 짙은 연무를 달고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어쩌면 이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연이 끝나가고 있었다. 한줄기 회오리바람이 사정없이 뺨을 갈기고 달아났다. 나는 폐부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마치 담아두기라도 하듯.
익숙한 곳이지만 오랜만에 공항에 왔다. 하지만 달라진 곳이 별반 없으므로 여전히 안락하고 느긋했다. 30년간 몸에 착 달라붙은 습관대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번갈아 타고 전망대로 올라가, 맥도날드에서 값싼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한 층 내려와 서점 앞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고, 다시 내려와 출국 절차를 밟았다.
수속을 마친 나는, 독일에서의 마지막 문자를 딸들에게 보내고, 홍콩 경유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 나이 스물에 홀로 섬을 떠난 나는, 서른에 한국을 떠났고, 육십이 넘어 다시 혼자 고향 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며칠 만에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행 버스에 올라탄 게 마치 엊그제처럼 선명하다. 무수하게 많은 초록색 나뭇잎들이 차창을 스쳤고 시리도록 하얀빛이 도로에 가득하였다.
돌아보면, 사랑, 청춘, 미래, 기대, 희망 같은, 딱히 정의하지 않아도 설레는 단어들 속에 싸여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죽음, 불안함, 늙음, 그리움, 후회, 빈뇨증과 강박신경증을 안고 돌아왔다. 내 앞에 드리워진 어슴푸레한 땅거미를 보는 것이다.
비행기는 천천히 움직이며 활주로 출발선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설핏 밝은 햇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독일 날씨는 떠나는 날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삽시간에 세상이 회색으로 덧칠해졌다. 바람과 거친 빗방울이 거세게 창을 두드린 공항 대기실에서의 불안한 기분을 생각하면, 지금은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 몽환답기까지 하였다.
점멸등이 길쭉하게 세로로 반짝이며 흐린 시야에 잠시 들어왔다 이내 사라졌다. 공항 터미널 빌딩은 어른거리는 흔적으로만 남아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지독한 굉음이 시작되었다. 기체는 빨라지고 동시에 흔들렸다. 그리고 나의 어깨도 등받이에 찰싹 달라붙었다. 몸은 기울어지고 긴장감이 솟구쳤다. 이제 적응할 때도 되었건만, 언제나 비행은 두려움으로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구름 위에 올라섰다. 그곳은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조금 전의 혼란스러움을 생각하면 계면쩍기까지 하였다.
3.
나는 내 삶의 에필로그를 고향 섬에서 그려내기로 무수히 작정했다. 비릿한 바람결에 언덕을 하나만 넘어도 짙푸른 바다가 눈부시게 펼쳐진 곳. 그 바다에 점같이 박혀있는 크고 작은 배들. 바람과 갈매기. 굳이 설렐 것 없이 늘 눈만 들면, 내 앞에 놓인 투명한 하늘. 그 하늘이 맞닿은 같은 색의 바다.
나는 수평선 위아래로 엷게 펼쳐진 구름을 본다. 그리고 바닷냄새. 그 냄새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잊히기는커녕, 더욱 두텁고 딱딱하게 내 그리움의 생채기에 더하였다.
그리고 바다가 온전히 푸름과 붉음으로만 대비되는 동터오는 여명. 그 새벽의 스산한 바람이 손바닥만 한 창을 토닥토닥 두드리면, 나는 잠결에, 어른거리는 꿈 자락을 뒤로한 채, 불어 터진 오줌보를 부여잡고, 비실거리며 꿀렁거리는 비닐 장판에 놓인 요강을 찾았다.
그때쯤이면, 아버지는 이미 집을 비웠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무 타는 냄새로, 또 하루를 시작하였다. 타닥타닥 타는 소리. 그르렁 가마솥 뚜껑 여닫는 소리. 모락모락 피어오른 구수한 밥 냄새. 나는 누운 채, 가려운 엉덩이를 손으로 긁적이며 입맛을 다신다.
학교가 파하면 마을 안길을 걸어 남루한 옷의 친구들과 포구에 닿아, 바닷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생선 비린내에 취하고, 일렁이는 물결에, 흔들거리는 돛단배에 어지러움을 더해도, 검은 돌 들춰내어 황급히 달아나는 엄지손톱만 한 게나 보말을 잡아 빈 도시락에 한가득 채우고선, 애당초 슬픔이란 존재 하지도 않는 듯이 까불고 장난치며 보내면, 어느새 바람은 세지고, 따갑기만 하던 햇살도 비실대면, 그제야 생각난 듯 서로의 집으로 흩어졌다.
나의 유년 시절이 오롯이 아로새겨져 있는 곳으로, 긴 우회 끝에 결국, 나는 돌아가고 있다. 팽팽했던 청년은 이제 목덜미에 주름살이 깊게 팬 중년으로 변했다. 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는 볼록 나왔다. 눈은 흐리고 굵은 돋보기안경이 걸쳐졌다. 이마에는 따가운 햇볕이 그려놓은 세월의 흔적이 선명하다. 청년의 얼굴은 사진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변한 건 내 고향도 마찬가지다. 나의 동네는 더는 내 기억을 확인시켜 줄 만큼 변하지 않은 곳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느꺼운 기분에 앞서 이질감이 맴돌았다. 나는 고향 땅을 밟지 않고도 구글 맵을 통하여 내 유년 시절의 마을을 이미 샅샅이 뒤졌다.
내가 살던 집은 회색과 갈색으로 치장한 세련된 호텔로 바뀌었다. 사실 이곳이 내 집터라는 것을, 위성 사진과 주변 사진을 수십 번 확인한 끝에 겨우 알아챘다. 내 집을 둘러 병풍처럼 늘어선 솔숲은 절반은 깎여 잔디가 되었고, 나머지는 호텔을 수식하는 조명을 치렁치렁 단 모습으로 장식되었다.
호텔 입구 테라스에 목재 원형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파라솔이 일렬로 쭉 늘어선 광경이나, 단아한 색을 입힌 발코니의 사진은, 내가 수십 년간 떠돌던 이국땅의 풍경과 똑 닮아 있었다. 주변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대체 바다와 산을 제외하고 바뀌지 않은 모습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도 돌아가고 싶었다. 낯선 곳에 낯선 얼굴의 내가, 맞닥뜨릴 기대와 우려를 뛰어넘는,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 한쪽을 회한의 그리움으로 항상 무겁게 눌러주던, 처음으로 마음이 가던 여인. 바다를 배경으로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4.
비행기는 이른 아침에 홍콩에 도착했다. 둥근 창으로 무거운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산 정상을 모두 덮은 채 게으르게 움직였다. 언제든 우르릉하며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산 아래는 흰색의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솟아 있었다. 높은 산과 아파트. 서울과 많이 닮았다. 완만한 산과 낮은 집들로 대부분 채워진, 유럽을 떠났다는 느낌이 이제 확연히 다가왔다.
트랩에 내려서자 매캐한 경유 냄새가 습하고 무더운 공기에 묻어왔다. 홍콩은 처음이었다. 유럽대륙 구석구석, 아메리카, 심지어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도 방문하였지만 정작 내 나라 근처 지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환승을 위해 잠시 3시간 정도 머무는 것이니, 엄밀히 방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홍콩, 아니 중국은 늘 한번은 방문하고 싶었다. 중국 음식을 유난히 좋아했던 것도 한몫했을 터이다. 유년 시절, 생일날 같은 특별한 날에나 맛볼 수 있었던 짜장면. 그 오묘한 맛의 검은 음식. 잠자리에 들 때면, 짜장면을 매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자가 되고 싶다는 간절함을 되뇌곤 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짜장면은 간짜장으로, 다시 삼선짜장으로, 결국에는 탕수육으로 바뀌었지만, 중화요리에 대한 식탐만큼은 식을 줄 몰랐다.
그 탓일까? 어느 날 극심한 복통으로 찾은 병원에서 쓸개염을 진단받고 결국 절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기름진 음식에 대한 탐욕은 변하지 않았다. 독일에 처음 도착한 날, 그날 저녁도 한국식당에서 짜장면을 먹었으니 말이다. 10유로나 하는 턱없이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정작 중국으로 이끄는 힘은 중국 화폐 20위안에 그려진 <구이린> 때문이었다. 결혼 2년 후, 우리는 뒤늦게 두바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주말을 끼어 겨우 5일 정도 여유가 있었던 우리는, 아직 가보지 않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여행 사흘째 되던 날, 사막 투어에 지친 나는 본능적으로 기름진 음식을 찾았다.
우리는 아랍 전통 복장을 한 호텔리어의 안내에 따라 격자무늬가 선명한 대리석 바닥을 따라 걸었다. 따각따각 명랑한 소리가 발밑에서 울렸다. 창 너머에는 무성한 열대 덤불이 보였다. 이 도시는 마치 사치 속에 푹 빠진 듯하였다. 천장은 온통 반짝이는 유리였다. 그 광채 속에 얼빠진 모습으로 헤 웃고 있는 내가 담겼다.
호텔과 연결된 중국 식당은 크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중국 박물관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화려함과 사치, 향락이 나의 밖에, 주위에, 앞에 머물렀다. 수려한 문양이 새겨진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로 멋을 낸 안내원이 창가에 있는 식탁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주문 후 아내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미소를 보냈다. 초록색 입욕제를 푼 목욕물에서 나던 향기가 흘렀다.
반짝이는 연녹색 식기와 그 속을 채운 탐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졌다. 공간을 지배하는 음식 냄새는 꿈처럼 몽롱했다. 틀림없이 조금 전 기억은 황량한 사막이었다. 밀가루만큼 부드러운 모래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바람에 부서져 끈적거리는 피부에 달라붙어 불편을 호소하고 있었다. 새로움에 대한 탄성은 금세 유쾌하지 않은 생소함에 자리를 내줬다. 차로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온통 모래만 있는 곳. 마치 아무 데도 아닌 것이 끝없이 펼쳐져, 무와 유, 가능성과 의아함, 비밀과 모순이 혼재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식탁의 오른쪽 벽면을 넓게 차지한, 수묵화 같은 사진에 정신이 쏠렸다.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모습이었다.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 절벽과 기괴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들. 전면에 굽이굽이 흐르는 듯 멈춘 듯한 강에는, 낮게 뜨인 운무로 인해 한없이 신비로웠다. 그리고 길고 좁은 쪽배에 창이 넓은 밀짚모자를 쓴 채 외로이 노를 젓는 어부. 온전히 자연 속에 묻힌 듯한 모습에 절로 감탄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나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사진 옆에 새겨진 한자였다. 鷄林 계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지명이었다.
“오 멋진 곳이네요. 우리 다음에 저기 한번 가요.” 아내가 나의 시선이 멈춘 곳을 훔쳐보며 말했다.
“그러게, 어릴 때 멋있는 곳이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아 그, 옆집에 중국 식당 한다는 사람?”
“응, 계림 출신이라고 맨날 자랑하곤 했거든.”
“자랑할 만했네요.” 아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5.
2시간을 기다린 끝에 홍콩발 제주도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나의 자리는 일반석 맨 앞줄 복도 쪽이다. 언제부터인가 고정석처럼 앞줄 복도 쪽만 예약하였다. 창가 쪽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이유는 전립선이 비대해지면서 생긴 잦은 빈뇨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화장실 가까이, 그러면서 옆 승객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자리가 점점 필요해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를 굳이 들자면, <관찰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다. 나는 흐르는 인파에 끼어들어 낯선 혼잡을 즐기듯 바라보거나, 카페나 식당 혹은 테라스에 앉아,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몇 시간이고 행인들을 쳐다보곤 하였다. 항공기 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승무원들과 그들이 상대하는 승객들의 행동을 유심히 쳐다보고 오가는 말들은 경청하곤 했다. 언제부터 이런 버릇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내 가족이 하나둘 곁을 떠나면서, 관찰의 버릇은 점점 더 늘어났고 집요해졌으며, 이제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이렇게 보낸다는 것이다.
나는 내 시야 속으로 들어온 그들을 보며, 그들의 인생을 상상한다. 그들의 웃음을 지켜보며 사랑을 추측하고, 무심한 표정에서 삶의 고통을 살펴보고, 오가는 말들에서 사람들의 관계를 짐작하곤 하였다. 그리고 추측한 그들의 인생을, 나의 기억 속에 채워 넣으며 희로애락을 담은 이야기를 지어내곤 하였다. 나는 내 삶의 마지막 날에, 내가 상상한 인생 속에 둘러싸인 채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기내는 빈자리 하나 없이 승객들로 가득하였고, 공간은 장터에 온 듯한 소음으로 채워졌다.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처럼 보였다. 그들은 대부분 수수하고 가벼운 옷차림에, 기대나 흥분 혹은 즐거움을 머금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연인이나 가족, 친구처럼, 친숙한 사이에서 오가는 가벼운 톤의 대화들이 나를 미소 짓게 하였다.
내 옆에는 중년의 남자와 그의 어린 자식 둘이 나란히 앉았다. 어린이들은 기내가 익숙한 듯, 이어폰을 끼고 전면에 붙은 태블릿 PC를 손으로 꾹꾹 눌러 그들이 원하는 애니메이션에 금방 빠져 버렸다. 내 옆의 남자는 신발을 벗고, 미리 준비한 실내화를 신더니,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인데도,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았다.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비행기를 타고, 기대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공중에 떠 있었지만, 여전히 이륙과 착륙을 준비하는 시간에는 긴장을 멈출 수가 없다. 특히 이륙 때는 나도 모르게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마치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좌석 손잡이를 손으로 꽉 움켜쥐곤 하였다. 아내는 언제나 그런 나의 모습을 신기해하고 따뜻한 위로를 보내곤 하였다. 결혼 전, 그러니까 그녀의 입사 후 첫 해외 출장으로, 영국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였다. 이륙 전, 딱딱하게 굳어가는 나의 표정을 처음 확인한 그녀는, 작고 깡마른 손을 나의 어깨에 살포시 얹고는, 마치 어린 아들을 쳐다보는 어머니 같은 눈길을 보내 주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의 작은 품속에 푹 파묻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그녀의 작은 손짓 하나만으로, 내 속을 채우던 불안이 사라지며 미처 경험하지 못한 안도감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고향을 떠난 후, 내가 얼마나 사랑을 갈구하는지를. 마치 한파 속에 부드럽고 두툼한 외투를 건네받은 듯하였다. 나는 영업전문가로서, 치열한 세상에서 처절하게 뛰면서 살았다. 나는 스스로 냉소적이며 속물적인 인간으로 나를 포장하고, 그런 기만적 확신 속에, 세상을 무의미하게 바라보곤 하였다.
나는 주고받는 계산속의 나에게 길들었고, 현대인이라면 이미 흔한 냉랭함을 넘어 경쟁자의 고통을 은근히 기대하는 일종의 사디즘적인 단계로 진행하고 있음을, 가끔 놀라듯, 자신을 바라보곤 하였다. 홀로 자신의 양심을 후벼 파는 그런 단계 말이다. 어쩌면 자신을 냉혈한으로 만드는 절망적인 냉담함 속에 묻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녀의 손에서 전해진 따스함에, 그 다정함의 창을 통해 그 너머의 사랑을 보았다.
6.
바로 앞 출구 옆에, 여승무원 한 명이 벽에서 간이 의자를 빼더니 앉았다. 안전띠를 한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시선을 승객 쪽으로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웃음으로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 노란 경고등이 꺼졌다. 엔진 소리에 잠시 한눈을 팔았다. 작은 타원형 창으로 반짝이는 햇살이 건너와 실내를 밝히며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각자의 자리에 앉았던 승무원들은 안전띠를 풀고 익숙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기내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중저음의 엔진 소리 속에 아이 울음과 승무원의 대화 소리가 묻어났다. 간이 키친 영역을 표시하는 커튼이 들락거리는 승무원 사이에 춤을 춘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희 항공을 애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인 승무원 송안나입니다.” 갑자기 여승무원 한 명이 내게 성큼 다가오더니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조금 전 내게 미소를 띠던 그녀였다. 홍콩 항공기에 한국인 승무원이 있을 줄은. 그런데 사실 더 놀란 거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나의 의문은 금방 풀어졌다.
“고객님이 탑승하신 분 중 유일한 한국인이십니다.” 나는 적잖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내는 빈자리가 없이 꽉 들어찼다. ‘그럼, 여기 탄 승객들이 모두 중국인이란 말인가?’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린다는 소문을 이제 현실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기내식 메뉴를 보여주었다. 나는 딤섬을 포함한 메뉴를 선택했다. 돌아서는 모습을 시작으로, 나의 시선은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에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졌다. ‘동포라서 그런가?’ 하지만 외양에서 다가오는 느낌은 다른 승무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소와 행동, 표정과 걸음에서, 이성으로 분석할 수 없는, 묘한 끌림 같은 것을 감지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시선은 온통 그녀에게 쏠리고 말았다.
그녀가 기내식을 건넸다. 나는 그 순간, 묘하게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에 익숙함을 느꼈다. 소녀는 짜장면 두 그릇을 익숙하게 식탁에 놓았다.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어머니와 함께 처음 방문한 날. 나의 자취방을 알아보던 중, 학교 근처 중식당에 들렀다. 주방에선 떠들썩한 중국말이 들려왔다. 늦은 오후라,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나는 짜장면 곱빼기를 걸신들린 듯이 먹어 치웠다. 포만감이 즐겁게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 벽에 붙은 종이를 발견했다. <방 있음>. 나는 고등학교까지 6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중국 식당 옆 다세대 주택 지하 방. 소녀는 나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다. 아쉽게도 같은 반은 되지 못했지만, 6년을 알고 지냈다.
그녀는 로맨틱 요소가 강한 문학 서적들을 늘 끌어안고 다녔다. 그녀의 몸에는 항상 들척지근하고 달콤한 양파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암청색의 예쁘장한 블라우스를 즐겨 입었다. 그녀 위로 오빠가 세 명 있었다. 가족 모두 식당 일을 도왔다. 아니 종사했다. 그녀는 오빠들의 짓궂은 장난 속에, 방과 후면 언제나 식당 홀을 지키며, 줄곧 의미심장하면서 생경한 쾌활함 속에 사는 듯 보였다.
그녀는 가족 중 가장 말랐다. 그녀는 살이 좀 투실투실하면서도 세련된 끌림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집에서 받은 용돈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내려놓은 짜장면과 미소. 갈수록 그녀에게 끌렸다.
성산이 보이는 바닷가. 고향에서의 마지막 봄. 백일장. 나는 비로소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감상적인 상태로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놓인 원고지가 바람에 까닥거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세상은 온통 하늘과 바다, 바람과 햇빛뿐이었다.
“저기 사진 한 장…. 어때?” 그녀가 돌아섰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7.
“저 혹시 노트와 펜을 얻을 수 있을까요?” 나의 취미 중 하나다.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노트와 펜은 디자인이 좋다. 게다가 무료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보낼 때는 꼭 편지를 동봉한다. 물론 항공사에서 받은 노트를 이용한다. 대부분 짧은 글이지만 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제주도로 돌아가시는 길인가요?” 그녀는 내게 노트와 편지 봉투, 펜을 건네주며 물었다. 비행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네, 그렇죠.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40년 만에요.”
“와우!” 그녀의 놀란 듯한 표정이 재미있다.
“그럼 그동안은?”
“육지에 한 10년, 독일에서 한 30년 정도 살았죠.”
“그럼 제주도가 고향이시네요?”
“네, 그렇죠.” 그러자 그녀는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고향 분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 그럼?”
“네, 저는 일곱 살까지 제주도에 살았어요.” 그녀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승객 한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빠른 중국 말이 오고 갔다. 그녀는 잠시 자리를 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돌아왔다.
“위성 사진으로 미리 좀 봤는데, 동네가 너무 많이 바뀌었어요.”
“네, 많이 바뀌었죠. 저는 어릴 때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하였다.
“은퇴 후, 고향에서 살기로 작정하고 가는 건데…. 모르겠어요. 고향에 간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드네요. 마치 외국 같은….”
“그럼 친척이나 친구분들은 좀 계시고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모두 서울에 살고…. 이북 출신이라…. 한번 찾아봐야죠. 뭐 딱히 소일거리도 없는데.”
“친구분들은 좀 계시지 않을까요?”
“사실, 좀 궁금한 사람이….” 나는 지갑을 펼쳐, 그녀에게 오래된 사진을 내밀었다. 온통 푸른 하늘과 바다. 그 속에 담긴 눈부시게 맑은 미소의 소녀. 나는 사진을 보고 있는 안나를 바라본다. 호기심이 다분한 표정. 그녀의 미소 속에, 찰나와도 같이, 많은 감정이 흐른다. 당혹스럽게 많은 이야기가.
“옆집 친군데…. 고등학교까지 줄곧 같은 학교에 다녔어요.” 그녀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고개만 까닥거린다. 표정이 이상하게 무거워진다.
“구이린 출신이라고 엄청나게 자랑했어요. 물론 구이린은 잘 아실 테고….” 여전히 그녀는 사진에 박혀있다. 마치 사진 속의 세상으로 떠난 듯, 움직임이 사라졌다.
딩. 딩. 딩. 착륙 경고등이 커졌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안전띠를 하자 기내 방송이 들렸다. 비행기는 다양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좌측 우측 한 번씩 기우뚱거리더니 이내 평형을 잡았다. 바다가 삽시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긴장이 몰려왔다. 아내가 그립다. 바다를 닮은 그녀의 눈동자가 그립다. 그녀의 작은 손이 내 손등에 닿는 포근함이 더욱 그립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안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떨구고 있었다. 한 손에는 여전히 나의 사진이 들려있다. 구름이 빠른 속도로 창을 비껴갔다. 지상으로 가까울수록 세상은 점점 빨라졌다. 이윽고 활주로에 다다른 듯, 녹색과 회색 활주로가 잽싸게 지나간다. 쿵 쿵 하고 몇 번의 소리와 함께 기체가 흔들리다 부르르 떨며 굉음을 내질렀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이슬이 맺혔다. 나는 그 순간, 따스함을 느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