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권(화폐)권력은 평화시에 국가를 잡아먹으려 하고 역경의 시기에는 반역을 꾀한다. 그것은 군주제보다 더 포학하고, 독재보다 더 거만하며, 관료제보다 더 이기적이다.
나는 가까운 미래에 나를 무력하게 하고 내 조국의 위험 앞에 떨게 하는 위기가 닥쳐올 것을 알고 있다.
기업이 왕좌를 차지했다.
타락의 시대가 뒤따를 것이고, 재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공화국이 파괴될 때까지 금권(화폐)권력은 대중에게 손해를 끼치며 그 권세를 확장할 것이다. - 에이브러햄 링컨(미국 대통령, 1809.2.12~1865.4.15)
모든 것은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 여명이 있었다. 침울하게 뻗은 도로. 대지를 가득 메운 먼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평선을 바라본다. 그녀 앞에 무덤 같은 산등성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낡은 그림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이윽고 따뜻한 무언가가 그녀를 감쌌다. 잠시 다른 세상의 느긋한 혼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세찬 바람이 등 뒤에서 불었다. 그녀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연꽃이 무성하게 핀 연못이었다.
그녀는 그중에 가장 빛나는 연꽃 하나를 가슴에 품었다.
그녀는 행복함으로 눈물을 흘렸다.
암스의 아내는 영국을 여행 중이었다.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자구책으로 친정집에 당분간 머물기로 하고 떠난 것이다. 원래 한 달을 예정하였으나 6개월째 계속 머물고 있었다.
하녀인 에스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전형적인 유럽인의 모습이었다.
얇은 입술, 창백한 피부, 갈색 머리, 푸른색이 도는 눈동자. 작은 키만 빼면 말이다.
그녀는 원래 아내의 몸종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없는 사이, 암스의 시녀가 되어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녀를 특징짓는 한 가지는, 살포시 벌린 입술에 머문 상냥한 미소였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게 자주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만든 새 메이드복을 입고 주인의 서재를 청소하고 있었다.
암스는, 그녀 치마에 수 놓은 한 송이 꽃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들어 물었다.
“꿈에서 본 꽃이옵니다. 주인님. 감히 무슨 꽃이라고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라면서 본 기억도 없는 꽃입니다.”
“네가 본 것을 한번 말해보거라.”
“여러 번 꿈을 꾸었고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늘 같은 한 가지는…. 아주 검은 물에 별빛보다 더 밝은, 크고 아름다운 꽃을 안고 나면 깬다는 사실입니다.”
“기묘하구나. 왜냐하면 나 또한….” 그 순간 암스는 말을 멈추었다. 그가 몇 달간 간직한 꿈의 비밀을 하찮은 하녀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다는 사실이 겸연쩍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그녀에게 손짓했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려무나.”
“네?”
“내게 가까이 오너라.”
그녀는 천천히 주인에게 다가갔다.
“너는 입이 무겁냐?”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그것이 무엇이든 무덤까지 가져갈 것입니다.” 그녀는 조숙하고 엄격한 말투로 말하였다.
“월경은 끝났느냐?”
“네, 그러하옵니다만…”
“얼마나 되었느냐?”
“2주 전쯤이옵니다.”
“너의 질에서 맑고 미끈거리는 분비물이 나오느냐?”
“네, 그러하옵니다만…”
“그럼,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직전 내게로 몰래 오너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건?”
“그래, 나는 오늘 너를 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거라. 나는 네가 거주할 집을 따로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죽을 때까지 돌볼 것이다.”
“절대 평지풍파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인님.”
4개월 뒤, 암스는 약속대로 그녀를 내보냈다. 그의 집에서 마차로 한나절이나 가야 하는 곳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났다.
그의 일곱 번째 자식이었다.
그를 물의 꽃, 로터스라고 이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성 파더스는 물려주지 않았다.
파더스 가문은 유럽을 떠돌던 집시였다.
그들의 조상이 어디서 기원하였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수 세기 동안 유럽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돌아다녔다.
그들이 유럽의 중앙,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지역에 정착을 한 시기는 대략 신성 로마 제국 시절이었다. 그곳에서도 그들은 한동안 천민으로 살았다.
그들은 대륙의 지리에 밝은 점을 이용해 소규모의 무역을 하고 있었다.
암스의 조상, 슐레트 또한, 어릴 적부터 중국 혹은 인도까지 이어지는, 거칠고 위험한 육로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나라의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영리하고 성실하여 인근 귀족들이 단골이 되었다.
그는 고객이 원하는 각종 차나 향신료뿐만 아니라 중국 도자기, 여러 가지 금속 공예품 등을 취급하였다.
그는 고객이 주문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구해주었으므로 귀족이나 재력가들의 인심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였다. 즉, 천년 제국 동로마가 멸망한 것이다.
이것은 유럽의 무역상들에게는 적지 않은 타격을 안겨 주었다. 이슬람 제국을 거치지 않고서는 육로로 무역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하지만 슐레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이슬람 친구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그들의 관습과 종교에 익숙하였다.
사실상 그에게는 무역 독점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기회를 충분히 발휘했다.
그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동방의 제품들을 안정적으로 그의 고객들에게 납품하였다. 그는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신뢰였다.
그는 합당한 가격으로 계약을 하였으며, 판매 물건 가격이 아무리 높게 올라도 계약 가격으로만 받았다.
그의 명성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명성에 걸맞게 세습 남작이라는 직분을 돈을 주고 샀다.
주위의 유력 가문들이 그에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어떤 가문은 아예 장부 관리까지 맡겼다. 그렇게 그는 유럽의 성공한 가문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시 가문이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그들을 따라다녔다. 적어도 워털루 전투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하였다.
암스의 할아버지 다비드는, 그가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영국의 몰락한 귀족의 딸이지만, 미의 여신으로 유명한 마리안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척 많은 곳을 여행하였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그가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다녀온 곳이었다.
그가 맨체스터 지역을 여행하던 중 머문 호텔에서 마리안느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녀를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길로 그녀가 살고 있다는 리버풀로 갔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본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난 후였다.
그녀는 병든 어머니 간호로 인하여 거의 집 밖 출입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 달 뒤, 그녀의 어머니 장례식 때 그는 먼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수수한 검은 장례복을 입은 그녀였지만 미모는 눈부시었다. 그는 그때 그 순간을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였다.
“죽음의 행렬 가운데 황홀감을 느낀 사람은 아마 나 뿐일 거야.”
그는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한 달이 흐른 뒤,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는 두꺼운 분량의 혼인 계획서 같은 것을 작성해서 갔는데, 여기에는 두 사람의 결합 이후의 구체적인 재정 계획이 담겨 있었다. 사실 그 재정 계획이라는 게 일방적인 후원에 가까웠다.
그는 무척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정보와 신뢰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성공의 잣대라는 것을 파악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리안느의 가문이 명맥만 유지하는 귀족으로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앞으로 장인어른이 되면 누리게 될 재정적 혜택과 아내로서 누리게 될 특장점을 명확하고 또렷하게 제시하였다.
그러고도 그는 3년을 더 기다렸다. 그동안 그는 쟁쟁한 경쟁자들을 하나씩 물리쳤다.
그는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바로 옆집에 사는 것처럼 그녀와 주변의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놀라운 정보력은 마침내 그가 서른이 되었을 때 빛을 발하게 되었다.
바로 워털루 전투였다.
전쟁은 언제나 그렇듯이 막대한 돈을 먹었다. 영국 또한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국채를 마구 발행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나폴레옹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폴레옹의 명성과 공포는 전 유럽을 공포로 넣고도 남았다.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기 전, 영국 국채의 가치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어느 누가 봐도 나폴레옹의 승리가 점쳐지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는 정보를 수집함과 동시에 정보의 활용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곳에 정보원을 배치했다. 그리고 연락원을 통해 수시로 진행 상황을 보고 받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영국 국채를 모두 다 매수하였다.
나폴레옹의 패전을 확신한 거였다. 그는 대번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 되었다.
훗날, 그는 자식들에게 한 장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바로 워털루 지역을 묘사한 지도였다.
그는 프랑스 진영 수백 미터 앞을 가로지르는 검은 선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검은 선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지. 그곳 농부들만 알고 있더구먼. 깊은 웅덩이였지. 프랑스가 자랑하는 최강의 기마병이 간과한 부분이지. 그리고 나폴레옹의 오만함이 더해졌지. 그 순간 나는 신의 섭리라고 느꼈지. 나폴레옹의 종말을…”
파더스 가문의 최대 수혜자는 암스였다.
그는 할아버지의 막대한 재산과 지혜, 할머니의 수려한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는 당시 재정적 위기에 봉착한 왕족들과 거래하며 권력까지 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이제 하늘 아래 누구 하나 부러울 필요가 없는 완벽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그는 자신의 가문을 이후, 천 년 이상 빛낼 계획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다.
땅거미가 내릴 때쯤 여섯 아들과 그들의 식솔들이 모두 모였다.
밤이 유리창에 짙어 갔다. 하인들은 서둘러 램프에 불을 밝혔다.
집사는 검은 천으로 싼 대형 그림을 조심스레 벽에 걸었다. 불빛이 벽에 반사되어 일렁거렸다.
암스는 지팡이를 그러쥔 채 천천히 그림 곁으로 걸어가서 천을 벗겼다.
파더스 가문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독수리 그리고 왕관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6개의 검은 방패가 둘러싼 것은 한 송이 흰 꽃이었다. 지켜보는 이들 가운데 웅성거림이 일었다.
“아버님, 저 꽃은 무슨 의미입니까? 생소합니다.” 첫째 아들 레이가 물었다.
“연꽃이다.” 암스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네, 물론 연꽃입니다만…왜 저 꽃이 저희 문양에 새겨졌는지?” 아들은 재차 물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연꽃잎에는 단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대로 굴러떨어진다. 물속의 나쁜 냄새는 사라지고 좋은 향기를 연꽃이 낸다. 연꽃은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을 유지한다. 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다. 연꽃은 색깔이 곱다. 마음과 몸을 맑고 포근하게 한단다.” 아버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버님, 오랫동안 이어온 파더스의 문양에 나약한 꽃이 추가되리라고는 감히 상상을 못 했습니다.” 둘째 아들 좌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머쓱해진 표정을 지었다. 차가운 스모키 실버를 한 긴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그는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연꽃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하다. 절대로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그는 목에서 가래가 올라 온 듯, 그르렁거리며 힘들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제 너희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다. 첫째 레이는 미국으로, 둘째 좌네는 영국으로, 셋째 살론은 이탈리아로, 넷째 칼른은 브라질로, 다섯째 오나는 인도로, 여섯째 해즐너는 중국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명심해라. 너희의 이름에는 항상 파더스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저 꽃의 의미를…”
파더스 형제들은 머리를 어색하게 수그리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다.
암스는 마지막으로 그의 막내 아들에게로 갔다.
“너는 이제 아프리카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너의 뿌리를 건설하거라. 그리고 명심하거라. 너는 지금부터 파더스 가문의 아들이다. 그리고 늘 시선을 미래에 머물기를 희망한단다. 아들아.”
그는 파더스 문장을 그의 일곱 번째 아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를 보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