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부 (마지막회)
그레고리 흘라디는 기자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혹시, 이곳을 통과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붙잡고 질문을 뱉었다.
왜 국경을 넘으려고 하는가?
그레고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거짓 이야기를 꾸며댔다. 폴란드에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어느 날 그녀의 아들이 코린토스로 갔다. 그런데 실종이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찾기 위하여 떠났다. 나는 오랫동안 그녀와 연락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직접 찾아 나섰다고 간단하게 말했다. 그녀는 모처럼 좋은 기삿감을 만난 듯 더욱 구체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그레고리는 어쩔 수 없이 적극적으로 답변을 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이 기자가 그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녀의 취재가 마무리될 때쯤, 그녀는 비로소 그레고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근처 마을에 가 있으면 밤에 연락하겠다는 거였다. 그는 다시 차를 몰고 마을로 갔다. 일단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서 묵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호텔 값이 턱없이 비싼데다 빈방도 없었다. 그는 물어물어 마을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호스텔로 갔다.
방은 낡고 음산하고 침대는 좁았다. 침대는 꿉꿉하고 이부자리는 질척질척했다. 게다가 여섯 명이 한 방에 같이 묵는 곳이었다. 어디선가 빛이 마치 꽁지깃처럼 삐죽이 나왔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짐을 내려놓고 혹시나 해서 지갑과 권총, 휴대전화기를 가지고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실 곳곳에 비닐과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꼭지는 천장 쪽으로 돌아가, 물이 하늘로 솟구쳤다 비처럼 떨어졌다. 온수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비누나 혹은 샴푸 비스름한 것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덜덜 떨면서도 꽤 긴 시간 동안 샤워를 했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와서 비상식량으로 챙겨두었던 딱딱한 빵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그리고 칸살이 붙은 침대에 누웠다. 쉴 새 없는 감정 기복과 불만, 고통 같은, 그를 수식하고 규정짓는 단어들이 무거운 몸에 짓눌려 버둥거렸다.
그는 얼마든지 여기서 벗어나 그냥 돌아갈 수 있었다. 편하고 따뜻한 방과 향긋한 음식을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이곳에서 그의 앞에 펼쳐질 불편과 고통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무엇으로도 어쩔 수 없고, 뒤로 돌아보지 않을 만큼, 강하게 그의 시선이 이리나로 향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녀를 만날 당위성보다, 그가 가야만 하는 정당성을 계속해서 반추하고만 있다. 그는 현실에 널브러져 있는 편안함에, 강한 거부의 채찍을 휘두르고픈 충동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긴 여행이 준 불편한 몸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더기의 사람이, 문만 빼꼼히 연 채 방을 둘러보더니, 이윽고 들어왔다. 모두 여자와 어린이였다. 피난민 같았다. 어린이들은 그레고리를 보더니, 신기한 듯이 곁눈질로 힐끗 힐끗거렸다. 그는 배낭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린이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어머니는 고맙다는 표시로 미소를 보였다. 그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쯤,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서둘러 잠바를 걸치고 약속한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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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람이 쏟아 내는 다양한 소리가 일어나고 가라앉았다. 그레고리는 변주하는 어둠을 가쁜 숨으로 마주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식당은 만원이었다. 당연히 무척 시끄러웠다. 손님 대부분이 외지에서 온 기자같이 보였다. 식당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가 저 끝에서 손짓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볼 인사를 하고 각자 의자에 착석했다. 몰랑한 볼의 감촉이 여전히 서렸다. 그녀 앞에는 이미 맥주병이 놓여 있었다. 그도 같은 맥주를 주문했다. 그녀는 어중간한 길이의 치마를 걸치고 입술 경계를 모호하게 덧칠한 입술로 술을 홀짝거렸다. 그녀는 우선 그에게 명함 하나를 건넸다. 그것은 콜택시 명함이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지도를 한 장 주었다. 그곳에는 빨간 표시로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선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현재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산길을 걸어서 이곳까지 가면 됩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택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요금은 꽤 비쌀 것입니다. 하지만 흥정을 하면 됩니다. 어차피 그들도 빈 택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목적지에 대해서 중간중간 계속해서 확인하세요. 이상한 곳에 내려 주고 달아날 수 있으니까요.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친구!
그레고리는 맥주를 한 병 비우고 그들과 헤어졌다. 따뜻한 기운이 멱을 따라 몸 전체로 퍼져갔다. 자정이 되었다. 거리는 고요하고 바람만 세찼다. 춥지만 움츠리지는 않았다. 그는 낯선 길을 걸으며 편안함을 느꼈다. 그를 둘러싼 고통과 쾌락의 갈증이 마치 생소한 옷처럼 꺼끌꺼끌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상상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환상을 보지도 않으며 혼란에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앞에 놓인 내일이 궁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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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는 지나치게 굳은 표정으로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하늘은 대체로 맑았다. 다양한 구름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도시의 매캐한 매연 냄새가 났다. 산길은 생각보다 무척 가파르고 험했다. 길을 좁고 수풀은 심하게 높았다. 그는 나무줄기에 묶인 붉은 리본을 하나씩 확인해가며 천천히 올라갔다. 걸음을 뗄 때마다 쉰내가 푹푹 올라왔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땀에 전 바지는 거북스럽게 허벅지에 달라붙었다. 그는 그제야 기자가 그에게 알려준 몇 가지 주의사항을 상기했다.
물을 충분히 가지고 가세요. 그리고 천천히 가세요. 신중하세요. 절대 서두르면 안 됩니다. 무척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가 있어요. 리본이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면, 마지막으로 본 리본까지 돌아오세요. 그리고 다시 올라가세요. 이 길은, 당연하게도 불법 체류자들이 만든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싫어하는 누군가는, 방해하거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니 조심할 수밖에요.
그는 정신을 잡아당기며 평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거진 나무들이 차양처럼 빼곡히 길을 덮고 있던 무수한 숲. 낡아 빠진 해먹 텐트가 나무에 묶인 채 건들거리고 있었다. 빽빽이 들어찬 침엽수림 사이로 쉭쉭 거리며 세찬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돌부리에 넘어지고 차이기를 반복하며 그는 황량한 곳을 힘들고 외롭게 걸어갔다. 이윽고 낮은 구릉과 돌무더기가 나타났다. 그는 거의 기다시피 하며 안간힘을 다하여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여 나아갔다. 암묵적인 걱정이 팽배했다.
그는 거의 반나절을 헤맨 끝에 결국 산 정상에 도달했다. 산꼭대기라고는 하지만 높은 침엽수림 때문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뿐이었다.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바람은 쇳소리를 내며 나무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색 리본을 발견했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길이었다. 그는 다시 크게 한숨을 쉬고 리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리막길은 한결 수월했다. 길의 폭도 차츰 넓어지고 경사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였다.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주치는 사람이 군인일 수도 있고, 설령 민간인이라고 하더라고, 산책 삼아 이런 곳까지 애써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최대한 신중하게 하지만 발걸음은 힘을 다 쏟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두 시간 정도를 걸어 겨우 자그마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마을의 중앙, 광장으로 갔다. 유럽 광장 대부분에는 마을에서 가장 큰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운데 불쑥 솟은 교회는 멀리서도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광장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많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이방인을 처음 보는지, 다들 그에게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거리의 바닥은 아스팔트 하나 없이 모두 돌바닥이었다. 그리고 무척 낡은 차들이 바닥 소리를 심하게 내며 지나갔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계속해서 택시를 찾았는데 아무리 봐도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광장 옆 공터에 세워진 2대의 차 옆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휴대전화기는 먹통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택시?
그레고리의 질문에 콧수염을 한 나이 드신 분이 차량 보닛을 탕탕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무척 낡은 차였는데 아무리 봐도 택시 표시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재차 확인차 다시 물었다.
택시?
그러자 그는 차의 뒷문을 열면서 그에게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타기로 하고 가격을 물었다.
코린토스까지 얼마면 됩니까?
그리고 그는 50유로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택시 기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냅다 받더니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는 얼떨떨했다. 그는 자신이 바가지를 쓴 건지 아닌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무튼 빠르게 해결이 된 것 같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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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시간을 달려 코린토스에 도착했다. 그동안 땀에 젖은 피부가 건조해지면서 곳곳에 이상 신호를 전달했다. 마치 가시로 만든 화관을 쓴 것처럼 그의 몸 곳곳이 따끔거렸다. 그는 차장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전쟁 중이라 그런지 사람들과 차들은 거의 띄지 않았다. 곳곳에 파괴된 건물 잔해만 가득했다. 그레고리는 택시 기사에서 이리나의 집 주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코린토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시내를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휴대폰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일단 숙소를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차창 밖으로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꽤 높은 언덕 꼭대기에 높이 솟은 호텔을 발견하고 택시 운전사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호텔은 꽤 고급스러웠다. 입구의 넓은 홀 중앙에는 그랜저 피아노가 있고 우측에는 커피숍과 레스토랑 좌측에는 프런트 데스크가 있었다. 깔끔한 정장을 한 여성 데스크 직원이 세 명 나란히 서서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무척 지치고 피곤하였으므로, 아무 방이나 달라고 하였다. 방은 무척 넓고 썰렁했다. 하지만 침대는 작았다. 그는 무척 허기졌으므로 우선 급하게 샤워를 마치고 재빨리 일 층 데스크로 내려갔다. 그리고 식당을 물었다. 식당은 다행히 호텔에서 채 5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배를 채운 뒤 호텔로 돌아와 곧바로 잠에 떨어졌다.
이른 아침. 동이 트기 무섭게 그는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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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흘라디는 차를 도로 갓길에 멈추었다. 바다에서 몰려온 안개가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정적이 감도는 어둠. 바람 소리만 선명하였다. 헤드라이트도 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뭔 뜻인지 알겠지?
뒷좌석에 앉은 니콜라이가 말했다. 옆에 앉은 올리거가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적들이 사흘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는 군데군데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행인은 모두 맥이 빠진 상태였다. 비슷한 유형의 단색 옷들이 머물렀다. 걸음은 느리고 차는 끝없이 투덜거리며 지나갔다. 다들 불행해 보이므로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리를 죽여가며 차에서 은밀히 내렸다.
세르게이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붉고 탁한 시시포스를 생경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고통과 혼란이 쭉 뻗쳐 올랐다. 니콜라이는 잠시 멈추어 사방을 둘러보더니 왼쪽 골목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곳에는 어슬렁거리는 걸인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어떤 이는 눈의 초점을 잃은 채, 눅눅한 하늘을 줄곧 응시했다. 설핏 의식이 나간 듯하였다. 하지만 푸르죽죽해진 입술은 쉼 없이 움찔거렸다. 목에는, 막 곪기 시작한 종기 같은 멍울이 몇 개 보였다. 선명히 드러난 빗장뼈 아래로 절망이 흘렀다. 음료 캔들이 찌그러진 채 흩뿌려져 있었다. 니콜라이 뒤로 세르게이와 올리거가 따라 걸었다.
그때 어떤 여인이 비실거리며 일행을 막았다. 그녀는 지팡이를 그러쥔 채, 천천히 세르게이에게 다가왔다. 올리거가 혼곤한 저항으로 그녀를 밀쳐냈다. 그리고 니콜라이는 권총을 그녀에게 조준했다. 여자는 초췌해진 모습으로 물러섰다. 얼굴에는 선혈이 묻었다. 그때 빌딩 숲 사이로 스치며 매서운 속도가 붙은 돌풍이 거리를 휩쓸며 불쌍한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실핏줄이 선연한 안구에 파리하게 지쳐 주저앉았다. 눈앞에 황망함이 가득하였다. 세르게이 몸에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일행 옆에 앉은 채로 속을 모두 게워냈다. 수챗구멍에서 나는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그녀는 나자빠졌다. 몸의 초점이 한곳으로 쏠렸다. 지나가는 공기가 답답할 정도로 무거웠다. 일행은 긴장 속에 뻣뻣하게 걸음을 뗐다. 널브러진 잔해가 침묵 속에 누워있다.
건너편 식당에는 소음이 일었다. 남자의 거친 손찌검이 이어졌다. 맞는 여자는 공포에 차서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슴이 북받치는 듯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역정을 억지로 삼켜버리는 듯, 컥컥거렸다. 또 다른 여자는 으르렁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하였다. 유심한 나날을 사느라고 각축하고 고달픈 인생. 그들의 얼굴에 절망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거친 호흡이 낮은 하늘에 흩뿌려지듯 날아갔다. 일행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시시포스의 삶은 이제 들쭉날쭉하다. 파멸의 고리가 늘렸다. 니콜라이가 뭐라고 중얼중얼했다. 조숙하고 엄격한 말투였다. 마치 그를 감싸는 불편을 늘어놓는 듯하였다. 세르게이는 머쓱해진 표정을 지었다. 시커먼 하늘 사이로 흐릿한 달빛이 흘러갔다. 공포가 모두를 통제하고 혼란과 반목, 약탈과 은둔, 반성과 냉혈이 도시를 지배했다. 하루는 침울하고 내일은 서글픔으로 가득하다.
형제는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갇힌 공간을 부유(浮遊)하는 조명 속의 먼지가 길을 터주었다. 실내는 술 취한 사람으로 꽉 찼다. 화사한 분홍빛과 덤덤한 회색, 서늘함과 따스함, 늙음과 젊음, 무표정과 반항이 혼재하고 창백한 피부와 투명한 눈빛, 맑은 미소와 무덤덤함이 흘러내렸다. 니콜라이가 음식과 술을 시켰다. 형제는 염치 불고하고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그들은 거의 이틀을 물만 먹었다.
올리거는 광채가 일정하게 피어나는 투명한 보드카가 담긴 크리스털 잔을 내려놓은 듯하더니 다시 들어 올려 쭉 마셨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웃음이 많아지고 손동작이 느려졌다. 올리거의 취한 모습은 흥미로웠다. 무엇인가에 닿고 싶어 하는 본능을 억제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세르게이의 볼과 이마, 턱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발그레한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우리 막내! 귀여운 우리 동생! 너는 꼭 살아야 한다! 알겠지!
형제들은 오랜만에 무의미하거나 반복적인 장난을 이어갔다. 이따금 감정의 큰 변화에 휘둘리는 듯하기도 하였다. 니콜라이가 더욱 그러했다. 그는 처자식이 생각나는지 자꾸 탁자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삶이 뒤틀리는 과정에서 꿈틀거리며 유영하는 그들은, 그러함 속에 갇혀 더 나빠질 수 없는 폐허의 도시 한가운데를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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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 사이렌이 울렸다. 도시 전체가 온통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개들이 그렁그렁하며 날뛰었다. 얼마 뒤, 쿵쾅 쿵쾅하는 소리를 동반한 흔들림이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서 느낄 수 있었다. 형제는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부서진 잔해로 범벅된 대로를 피해 달렸다. 낭패감을 동반한 절망이 솟구쳤다. 머릿속이 분분하기 이를 데 없다. 무거운 하늘과 낮은 산들이 맞닿은 곳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때, 그들 앞에 폭탄이 떨어졌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쏟아졌다. 세르게이의 눈앞은 지독한 먼지로 뒤덮인 듯 까끌까끌하며 흐렸다.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모든 게 정지한 듯 꾸물거리며 둥둥 뜨기 시작했다. 세르게이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작처럼 힘을 주었다. 올리거가 펄썩 주저앉았다. 그의 바지가 찢어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피가 번졌다. 니콜라이가 허리끈을 풀어 올리거의 다리를 쪼였다. 올리거는 찐득한 고통을 잡아맨 끈 사이로 느꼈다. 다시 회오리바람이 성긴 천으로 된 옷을 뚫고 그의 피부를 따갑게 긁어대기 시작했다. 메스꺼움이 욱하고 올라왔다. 거리에는 존재의 가치를 곱씹을 수 있는 여유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벼랑 끝의 영혼들이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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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탄 차가 출발하자마자 포탄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르게이는 광기에 휩싸여 거칠게 차를 몰았다. 공포와 절망이 눈앞을 휙휙 스쳐 갔다. 섬광이 사방에서 동시에 솟아올랐다. 강력한 폭발음이 밤공기를 찢었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굴하지 않고 차의 속도를 높여갔다. 연기와 불길이 도시의 풍경을 그렸다. 그때 니콜라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장! 적들이 돌아왔어! 항구에 탱크가 가득해! 수백 대는 될 거 같아!
젠장! 더러운 새끼들! 결국 육해공 대규모 공습이었네! 병사들이 사라진 이유가! 시시포스 시민을 다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저 새끼들이!
니콜라이가 휴대폰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외쳤다.
세르게이! 우리 집에 나 좀 내려줘!
올리거가 다리의 고통을 참으며 말을 내뱉었다.
안돼! 우린 방공호로 가야 해! 너희 집에는 왜 가려는 거야?
니콜라이가 정색하며 물었다.
형! 내게 생각이 있어. 제발 부탁이야 나 좀 집에 내려줘!
10분 정도 달려 올리거의 집에 도착한 세르게이는 형을 부축하여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형을 침대에 눕혔다. 형의 이마에 작별 입맞춤을 하고 나서려는데 올리거가 그를 붙잡았다.
세르게이! 너는 꼭 살아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러니 제발 시 외곽으로 달아나! 알았지!
형! 걱정하지 마! 우리 모두 안전할 거야! 그럼 편히 쉬어!
세르게이는 올리거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럴 거야. 우리 모두….
세르게이는 천천히 집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여전히 수많은 포탄이 수를 놓았다. 세르게이가 다시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자 니콜라이가 말했다.
세르게이 잘 들어! 나를 방공호에 내려 주고 너는 곧장 이곳을 벗어나도록 해! 알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형!
너는 무조건 시 외곽으로 가란 말이야! 알겠어! 이건 형의 명령이야!
세르게이가 운전하는 차가 방공호로 가까이 갈수록 땅이 흔들렸다. 도시 건물 사이로 굉음을 내며 전차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기계들은 무자비한 지배자로서 성큼성큼 다가오며, 어둠 속에 그들의 공포를 퍼트렸다. 도시는 살육이 지배하는 향연의 장으로 변했다. 전차들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고 희망을 부수었다. 그것들이 지나간 길은 인간의 마지막 희망들을 훼손하는 행진이었다. 건물들은 파괴되어 영혼들이 피할 수 없는 위태로움에 휩싸였고, 인간들은 죽음의 무게에 무릎을 꿇었다. 불길에 휩싸여가는 건물들과 인간들의 비명이 세르게이의 귀를 찔렀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능숙하게 운전했다. 그는 불가능한 길을 뚫고 나아가는 강인한 운전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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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흘라디는 마침내 이리나의 집을 찾았다. 지도 한 장 들고 도시 곳곳을 걸으며 거의 세 시간을 헤맨 끝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나타샤가 보내준 동네 주변과 집 사진을 번갈아 보며 이곳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사진 속 깔끔하고 아름다운 주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붕은 부서지고 베이지색 벽은 불에 탄 듯 검게 그을렸다. 그레고리는 주변을 훑어봤다. 낮이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레고리는 숨을 한 번 들이키고는 벨을 눌렀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눌렀다. 새소리도 숨죽인 동네에 벨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잠시 기다리다 이윽고 대문을 살짝 밀었다. 딸깍거리며 문이 열렸다. 그는 천천히 엘리베이터로 갔다. 하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계단으로 걸어서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손으로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누구신데?
이리나는 그레고리를 힘겹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다. 어지럽게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그녀의 반짝였던 눈은 절망 같은 시선을 가득 담은 채 초점을 잃고 흐리게 변해 있었다.
나요. 그레고리.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의 입꼬리는 부정형으로 비뚤어지고 새어 나오는 숨결은 절규로 변했다.
왜 이제 온 거야? 그레고리. 이 개새끼야!
그녀는 원망을 가득 담은 채 그레고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레고리는 모든 힘이 삽시간에 날아간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바닥에 찧었다.
미안해! 이리나! 정말 미안해! 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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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거 흘라디는 석유통을 들고 지하로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파편이 박힌 그의 다리에서 피가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그는 고통을 참으며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디뎠다. 위로부터 들려오는 굉음은 마치 천둥처럼 울렸다. 땅이 끊임없이 떨렸다. 대규모 전차들이 그들의 강렬한 엔진소리로 올리거의 가슴을 휘젓고, 그에게 임박한 위기를 고조시켰다. 벽틈 사이로 먼지가 연기처럼 내렸다. 전쟁의 무서움과 혼돈의 심연이 그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의 눈은 단단히 막힌 족쇄를 꿰뚫고, 자유를 향한 갈망과 절대적인 생존 본능에 매여 있다.
마침내 그는 무기 저장고 문을 열었다. 공간은 심각한 침묵이 서렸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서 있는 올리거는 곁눈질하며, 넓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무기들을 바라봤다. 그의 숨결은 긴장과 불안으로 뒤틀려 있지만, 마음속에는 당당함과 용기의 씨앗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곧 있을 피의 향연을 상상했다. 그곳에 서 있는 올리거에게는 무기들이 품고 있는 힘이 느껴졌다. 그것들은 그 표면에서 차갑고 무정한 광채를 발산하며, 그 영역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듯한 기세를 내보였다.
그는 이것이 생명의 역사와도 같다고 느꼈다. 그 속에는 상실과 분노, 복수와 살육이 깃들여 있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산산조각으로 부수며 그 자리에 흉포한 존재감을 남길 것이다. 이 어둠의 성소에는 인간의 야만성과 본성이 얽혔다.
올리거는 죽음의 날개를 펼치고 싶었다. 적을 압도하고 휩쓸며,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을 비웃으며, 살아있는 존재의 피부에 파고들어서 영혼까지 빼앗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삶의 취소 선이다.
올리거는 석유를 골고루 뿌렸다. 그리고 라이터 불을 그 속으로 던졌다. 불은 삽시간에 번졌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은 멈추었다. 올리거는 고요한 순간을 맞이했다. 연쇄적으로 터지는 폭발음, 돌아가는 시간, 그리고 끊임없이 떨리는 땅은 모두 사라지고, 그는 하나로 뭉친 소리와 마음의 안식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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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는 이리나를 만난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의 아들 안톤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 그는 이리나가 건네 아들의 사진을 연거푸 보며 그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새겨넣으려고 애썼다. 이리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당신 아들이 정부군에 끌려갔어요. 이제 겨우 열여섯이에요. 어린애란 말이에요. 전 그 애가 올 때까지 여기를 떠날 수 없어요.
막상 밖을 나왔지만 그레고리는 암담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낯선 도시. 파괴된 거리. 암울한 하늘. 그는 일단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교회와 광장, 그리고 카페가 있는 곳으로 그는 천천히 걸었다.
주택가를 벗어나자 제법 큰 길이 나왔다.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그들은 모두 행색이 초라했다. 다들 검은 비닐을 하나씩 들고 뭔가를 찾는 듯 무너진 잔해를 뒤지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돌로 된 도로 옆 트램 철길을 따라 걸었다. 발걸음이 그 어느 때 보다 무거웠다. 그의 텅 빈 가슴을 채우는 것은 후회와 고통, 절망과 안타까움이었다.
이윽고 그의 눈에 교회의 첨탑이 보였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길도 넓어졌다. 마침내 광장이 나타났다. 꺼진 분수대가 중앙을 차지하고 동서남북 방향으로 웅장한 탑이 각각 서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카페가 보였다. 그레고리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했다. 화약 냄새를 품은 바람이 불었다. 그는 이리나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을 떠올리며 괴로웠다.
젠장,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어.
이윽고 그레고리 앞에 커피잔이 놓였다. 그는 주머니에 있는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쓰린 기억이 목구멍을 훑고 지나갔다. 탁자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맞은편 건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온통 이리나 걱정뿐이었다.
아들을 못 찾더라도 이리나를 데리고 가야 해!
그레고리가 다시 커피잔을 들려고 하는 찰나 공습경보가 울렸다. 노상 카페에 자리했던 사람들이 익숙한 듯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레고리도 그들을 따라가려고 일어섰다. 그때 하늘을 가르는 쇳소리가 나더니 맞은편 건물이 쿵 하며 화염에 휩싸였다. 수많은 파편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그레고리는 고개를 든 채 벽에 바싹 붙어 이 광경을 지켜봤다. 잠시 후 폭격을 받은 건물 베란다에 어떤 여자가 울부짖으며 나왔다. 그 여인은 베란다를 서성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녀는 광장을 내려다보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갈 수 없었다. 연이어 폭발음이 울렸다.
그레고리는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가까이 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얼굴.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를 쳐다보며 그녀는 베란다에서 뛰어 내렸다. 그녀가 그를 덮쳤다. 그는 철퍼덕거리며 부서졌다. 그의 팔과 다리가 기괴한 모습으로 부러졌다. 머리는 깨져 골수가 흘러나왔다. 배는 터져 창자가 쏟아졌다. 얼굴 반쪽은 심하게 찢어졌고 눈알은 으깨어졌다. 그녀는 그레고리를 응시하며 눈물을 쏟았다.
미안해요! 아저씨! 정말 미안해요! 아저씨!
그녀는 몰려든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라졌다. 그레고리는 멀어지는 이리나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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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접어든 세르게이는 번쩍이는 광채에 차를 멈추었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시시포스를 돌아봤다. 도시는 거대한 불기둥에 휩싸였다. 그리고 몽환적인 구름은 검은 하늘을 대낮처럼 밝히며 하늘로 끝없이 올라갔다. 강렬한 빛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하늘은 즉각적으로 붉은색과 오렌지색으로 변모하였다. 화려한 석양처럼 아름답게도 보였다. 땅의 파동이 느껴졌다. 화염 구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고막을 찢는 굉음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끝없는 지옥의 입구가 열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세르게이는 무력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고, 두려움과 절망의 물결에 휩싸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