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빅토르 흘라디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그레고리 형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이 조그마한 섬에, 일촉즉발의 위험한 순간에 말이다.
형! 정말 형이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빅토르는 무장을 풀고 한 발짝 한 발짝 그레고리에게 다가갔다.
무척 오래간만이구나! 빅토르. 형이다! 너를 찾았어!
그레고리의 소리는 어둠 속에 빛이 났다. 그레고리도 조심스레 대피소 입구로 다가갔다. 혹시나 용병 잔당들이 숨어 있지나 않을까 싶어 그는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파도 소리가 메아리쳤다.
형이 맞지? 날 알아보는 거지?
그의 동생의 모습은 그를 극도의 감동으로 채웠다. 그레고리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꼭 껴안았다.
형이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어.
눈빛에는 서로를 알아보는 기쁨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빅토르는 조용히 말없이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모습은 피할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그의 투명한 푸른 눈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레고리도 빅토르를 마치 스캔하듯 찬찬히 훑었다. 그레고리는 그의 얼굴에 낯선 그림자와 시련의 흔적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어릴 적 보아왔던 그 불꽃이 녹아 있었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연결은 고요한 밤의 공명처럼 은밀하게 전달되었다. 그레고리의 심장은 압도되는 감정에 진동하며, 시련의 시대를 뚫고 이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힘을 내고 있었다. 서로의 손을 더듬으며 그들은 옛날의 기억과 사랑, 형제로서의 연결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빅토르는 나타샤를 떠올렸다.
형, 나타샤가 여기에 와 있어.
나타샤? 내 딸이?
그래, 형 딸 말이야.
아니, 어떻게 나타샤가? 여전히 청소년일 텐데?
웬걸? 이미 박사학위까지 받았어. 여기 연구원으로 왔어. 나타샤는 컴퓨터 천재야! 형은 자부심을 느껴도 좋아!
빅토르는 그레고리의 손을 잡고 서둘러 대피소로 들어갔다. 빅토르의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그레고리의 마음은 어지러움과 혼란으로 뒤흔들리며 불안한 기대가 솟구쳤다. 그레고리는 15년 전, 아이의 엷은 미소와 희망을 끊어 버린 후, 애써 딸 나타샤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었다. 깊은 어둠이 그레고리의 마음을 채웠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손길이 바로 여기,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공간에 서렸다.
나타샤를 여기서 보다니! 나를 알아는 볼까?
그레고리의 숨이 점점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저려 들었다. 마침내 빅토르는 한쪽 구석에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소피아와 나타샤를 발견했다.
나타샤! 나타샤!
빅토르는 마치 어린이처럼 두 손을 휘저으며 그녀를 불렀다. 나타샤와 소피아가 동시에 빅토르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친 데 없어? 자기야!
소피아가 잽싸게 달려와 빅토르에게 안겼다. 그 뒤에 선 나타샤는 부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포옹을 지켜봤다.
소피아, 잠시만. 잠시만. 나타샤에게 굉장한 소식이 있어. 미안해.
빅토르는 소피아를 억지로 떼어 내고는 나타샤와 뒤따라온 그레고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타샤. 아버지야. 그레고리 흘라디. 너의 생부.
아버지?
나타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레고리를 바라봤다. 그레고리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감정을 추스르고는 천천히 나타샤를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동요하였다. 오늘 하루, 그는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선 듯하였다. 거기에는 오래전 헤어진 어린아이의 성장한 모습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나타샤였다. 그레고리의 눈에 뵈진 나타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타샤?
그레고리는 겨우 말문을 텄다. 나타샤의 눈이 불꽃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스며들었다. 자라면서 숱하게 본 아버지의 사진. 바로 그 모습이었다.
아빠? 정말 아빠야?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껴안았다. 그들의 포옹은 삭막한 공간을 가득 채워주고, 오랫동안 잃어버린 순간들을 재조합하였다. 그녀의 눈 속에는 헤어진 아버지를 알아보는 기쁨과 깊은 그리움 그리고 원망이 담겨 있었다. 따뜻한 조명이 그레고리와 나타샤를 감싸며, 시간이 정지된 듯한 순간이 흘러갔다. 이 재회의 순간은 새로운 시작이자 잃어버린 유대의 발견이었다. 그레고리는 눈물을 감추기 힘들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사라져버린 그의 시간 동안 그리운 딸의 소중한 존재가 그의 삶에 다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이 순간, 그레고리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다짐했다. 이제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을.
15년이란 세월은 긴 여정이었고, 그는 자신의 과거와 떨어진 채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림자처럼 자꾸만 쫓아오는 아픈 기억들이 있었다. 그 기억들은 이리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와 함께한 행복한 순간은 찰나였고 이후의 헤어짐과 아픔은 마치 험한 파도로 물든 상처 같았다.
*************
그레고리와 빅토르는 동시에 눈을 떴다. 굳게 닫힌 대피소 철문이 화염에 휩싸이며 부서졌다. 그 속으로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러시아 용병들이 다시 침공했다. 그레고리와 빅토르는 침착하게 방어벽 뒤에 몸을 숨긴 채 적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날은 이미 밝았다. 몇 대의 드론이 좁은 대피소 문으로 들어오려다 그레고리가 쏜 총에 맞고 속절없이 부서졌다. 그레고리는 그의 첩보 기관에서 손에 꼽는 명사수로 유명했다. 그가 노리고 쏜 총알에 어김없이 적들이 쓰러졌다. 한동안 소강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적들의 공격이 딱 멈추었다. 빅토르는 망원경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그들이 빠른 속도로 후퇴하는 것을 목격했다.
형! 적들이 후퇴하고 있어!
그의 말을 들은 일부 동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얼굴이 무거웠다. 그는 빅토르를 보며 외쳤다.
여기서 나가야 해! 함포 사격이 곧 시작될 거야! 그래서 저들이 급히 사라진 거야! 최대한 빨리 가야 해!
그레고리의 외침과 함께 대피소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레고리는 그들을 향해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빨리빨리 나오세요. 건물로 가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숲이나 해안가로 가세요! 서둘러야 합니다. 빨리빨리!
대피소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을 때쯤, 그레고리와 빅토르는 소피아와 나타샤를 만나 같이 뛰기 시작했다.
형! 어디로 가는 거야?
해안으로! 내가 타고 온 보트가 있어! 이 섬을 빠져나가야 해!
4명의 일행은 일렬로 좁은 길을 따라 바다로 향했다. 그레고리가 맨 앞에 빅토르가 맨 뒤에서 뛰었다. 곧이어 쉭 하는 날카로운 공기음과 함께 굉음이 땅을 뒤흔들었다. 나타샤와 소피아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레고리는 뒤로 돌아보며 나타샤의 손을 굳게 잡았다. 빅토르는 소피아를 일으켜 세운 뒤 그녀의 손을 잡고 외쳤다.
소피아! 서둘러야 해! 빨리!
소피아는 패닉 상태에 빠진 듯 울부짖으며 빅토르에게 매달렸다. 하늘과 땅에 우두둑 터지는 울림과 진동이 계속되었다. 강력한 포탄이 끝없이 하늘을 가르며 목표를 향해 비수 같은 비명을 내뿜었다. 그레고리가 급하게 뒤돌아보니 대피소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섬 곳곳에서 높이 솟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광기 어린 포격이었다. 건물과 집들은 갑자기 불타오르며 불길이 하늘에 걸리는 절망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더 빨리! 더 빨리 뛰어야 해!
그레고리는 크게 외쳤지만, 진동으로 인간의 소리는 의미 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그들의 전방에 있던 빌딩 단지가 휩쓸린 폭발음과 함께 깨진 조각들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편린들은, 마치 악마의 목소리처럼 검은 연기를 달고 그들 주위로 떨어졌다. 함포 사격의 끝없는 포화는 끔찍한 파괴의 연기를 섬 전체에 퍼뜨리며, 모든 것이 어둠과 혼돈에 뒤덮이게 했다. 사람들은 자기 생존 본능을 따라 제지할 수 없는 몸부림치며 도망치고, 목숨의 불안이 하늘에 비치는 대공포 사격과 함께 그들의 마음을 절망 속으로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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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 도착한 그레고리 일행은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다시 벌떡 일어나 자신이 타고 온 보트를 찾기 시작했다. 빅토르가 그를 뒤따랐다. 다행히 그들이 찾는 보트는 손상되지 않은 채, 해안 절벽이 시작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그레고리와 빅토르는 함께 끙끙거리며 보트를 물가로 다시 옮겼다. 그리고 연료 게이지를 살폈다. 연료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연료를 어디서 구하지? 빅토르.
빅토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레고리에게 한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연구소장의 집이 이 근처에 있어요. 그리고 그의 집에는 여러 대의 배가 있어요.
그래, 그럼 우선 그곳으로 가자.
그런데 파도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작은 고무보트에 4명이 탑승하니 배가 거친 신음을 내며 속도를 당최 내지를 못했다. 작고 불안한 보트.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불안과 위협이 하늘에 있었다.
젠장, 이러다 드론에게 발각되면 끝장인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바다의 품에 맡길 수밖에는. 일렁이는 파도에 어선이 크게 흔들리자 소피아는 벌써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나타샤가 그녀를 감싸며 등을 도닥거렸다. 하늘은 무자비하게 흐림과 강한 바람을 뱉었다. 나타샤도 괴로운 듯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고무보트는 파도와 부딪히는 물결을 용감하게 거스르며 꾸역꾸역 전진했다. 그렇게 한참을 갔다. 마침내 빅토르가 외쳤다.
형! 저기 저기를 봐. 저곳이야! 저기가 연구소장 집이야.
태양의 흐릿한 빛이 광활한 해안선을 비추었다. 경치 좋은 바닷가에 희고 큰 저택이 우뚝 솟아 있었다. 하얀 석조로 올려진 이 건물은 바다와 하나가 되어 잠시나마 우아한 동화를 펼치고 있었다. 그것은 바다의 순수함을 노래하듯 고요한 곳에 자리하며, 그 앞에는 하얀색 요트와 작은 보트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듯이 정박해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드론의 그림자가 하늘에 어지럽게 그려졌다.
젠장,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레고리가 장비함에서 구명조끼 2벌과 밧줄을 꺼내며 외쳤다.
소피아와 나타샤는 구명조끼를 입어! 그리고 두 사람 일조로 줄을 묶어! 서둘러! 내가 신호를 보내면 바다로 뛰어들어! 알겠지. 드론이 공격하기 전에 바다에 뛰어들어야 해!
바람이 동반한 파도는 보트를 집어삼킬 듯 흔들었다. 거센 바람은 드론에게도 악재였다. 손쉽게 보트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하였다. 네 명의 탑승객 마음은 긴장에 물든 숨결로 불어, 두려움과 결의의 감정을 마구 쏟아 냈다. 하늘은 우둔한 어둠에 휩싸여 있고, 공격용 드론은 어느 순간이나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위협적인 그림자로 공중에서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손을 잡고,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심장의 고동과 함께 한 몸처럼 바다를 헤쳐 나갔다.
보트가 거의 해변에 다다랐을 때쯤, 드론 한 대가 심하게 흔들거리며 보트로 접근했다. 그리고 총을 연속으로 발사했다. 총알은 가까스로 보트 옆으로 일직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그때 그레고리가 외쳤다.
바다로 뛰어들어!
빅토르와 소피아가 먼저 뛰어들었다. 뒤이어 그레고리와 나타샤가 뛰어들었다. 해변까지는 불과 300m도 남지 않은 상황. 그들은 죽음 힘을 다해 헤엄쳤다. 뒤이어 보트는 화염에 휩싸이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드론은 몇 차례 더 총알을 퍼붓더니 서서히 물러났다.
그레고리와 나타샤가 먼저 해안에 도착했다. 그들은 손가락질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빅토르 일행을 찾았다. 다행히 가까이에 빅토르가 보였다. 그는 나타샤와 연결한 밧줄을 풀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파도와 바람에 맞서 힘들게 헤엄치며 빅토르에게 접근해 보니 줄에 묶인 소피아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 그레고리는 급히 그녀의 코와 목을 살폈다.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레고리는 빅토르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물에서 거친 호흡을 하던 빅토르는 그 뜻을 알았다. 그레고리는 빅토르에게 다가가 말했다.
빅토르! 이제 놔 줘야 해! 무슨 뜻인지 알지? 슬프지만 어쩔 수 없어! 산 사람은 살아야 해!
빅토르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고리는 소피아에게 연결되었던 줄을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구명조끼를 벗겼다. 그녀는 일렁이는 파도를 타며 서서히 바다로 멀어져 갔다. 그렇게 빅토르와 그레고리는 한동안 물속에서 그녀를 지켜봤다. 하늘에는 여전히 드론의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제는 구명조끼의 한쪽을 잡고 해안으로 마지막 힘을 다해 헤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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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일행은 날이 저물 때까지 연구소장의 집에 머물렀다. 집은 비어 있었다. 빅토르는 소장의 집을 샅샅이 뒤져 보트 시동 키를 찾았다. 그리고 지도를 펼쳐놓고 그들이 피신해야 할 곳을 찾았다.
우리는 불가리아로 가야 해! 그곳에 우리 첩보 기관이 운영하는 안전 가옥이 있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해!
그레고리는 지도에서 불가리아의 한 해변 도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뜸하지만 여전히 포격 소리와 드론 소리가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빅토르는 서서히 저무는 창밖의 세상을 멍하니 쳐다보며 마음의 끝자락까지 어둠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피아와의 헤어짐, 마지막 숨결을 함께한 아픈 순간들이 그의 망상 속에 번뜩이며 두려움과 슬픔으로 채워져 갔다. 빅토르는 소피아의 모습을 회상하며, 그녀가 떠나간 그 바다에서 자신도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은 여기에 멈춘 듯했다. 그 순간, 소피아의 영혼이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름답게 빛나던 그녀의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아픔이 투영되어 있었다. 빅토르는 자기 손을 뻗어 소피아의 그림자를 만지작거리며, 그녀와 함께한 행복한 순간들이 그의 기억 속에서 흩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랑스러운 향기, 그리고 그녀의 미소와 함께 흐르던 달콤한 대화는 이제는 깊은 바다에 묻혀 버렸다. 그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그립고 아프게 되는 이 순간에야 비로소 그는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그를 얼어붙은 듯한 고통으로 괴롭히는 동시에, 사랑이라는 불가사의한 감정의 무게를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했다. 빅토르는 그녀와 함께한 순간들이 자신의 인생에 남긴 깊은 흔적을 영원토록 기억하려고 다짐했다.
자, 이제 우리 떠나야 해.
그레고리는 빅토르와 나타샤를 번갈아 쳐다보며 속삭였다. 이미 세상은 어두웠다. 그들은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파도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바람은 줄었고 섬을 갈가리 찢던 폭음도 사라졌다. 그저 선착장에 묶인 배들의 꺼덕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빅토르는 연구소장의 배를 금방 찾았다. 스피드광이었던 소장은 종종 빅토르 부부를 배에 초청하여 무척 빠르게 보트를 몰았는데 함께 탄 빅토르에게는 솔직히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소피아가 무척 좋아했다.
그레고리는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그리고 보트의 조명을 모두 끈 채, 천천히 보트를 몰았다. 어둠 속에서 보트는 조용히 미끄러지듯이, 고요한 파도 위를 헤엄쳐 나아갔다.
형은 언제 보트 운전을 배운 거야?
이것도 스파이 교육의 일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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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침묵의 완벽한 심연을 감싸 안으며, 마치 허공에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있는 듯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숨결마저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바라보며 깊은 연대감을 나누었다.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마법의 인연이 느껴졌다. 하늘에 달이 높이 떠 있는 어둠 속 바다 위에서, 물결이 부드럽게 빛나는 별들을 따라 조용히 보트를 몰던 그레고리는 마침내 해안가의 불빛을 발견했다. 빛은 조용하고도 강렬하게, 어딘가 숨겨진 보물 같이 떠오르며 그의 심장을 설레게 했다.
빅토르, 나타샤! 저기를 봐!
그들이 동시에 쳐다본 곳. 저 멀리, 해안가의 불빛이 점점 커져 왔다. 그 빛은 어둠에 포개진 가는 길을 밝혀주며, 이제는 그들이 가야 할 목적지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타샤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려, 그녀의 얼굴은 별빛과 함께 맑고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빅토르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빅토르. 나는 이리나를 찾을 생각이야. 그녀를 나타샤가 있는 곳으로 무사히 데려올 생각이야.
그래. 형. 형만 믿겠어. 꼭 이리나를 데려오기 바래.
*************
그레고리는 현금을 모두 인출하고 차를 점검했다. 노트북에 구글 맵을 펼쳐놓고, 그가 가야 할 길을 유심히 살폈다. 국경까지 900km. 그는 국경에 가까운 도시로 목적지를 우선 잡았다. 권총을 챙겼다. 그리고 나타샤와 빅토르에게 작별의 깊은 포옹을 했다.
새벽. 하늘의 푸른 기운이 무겁게만 느껴지던 날, 그는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차량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쭉 흑해를 둘러 그어지는 굵은 선. 초행길이지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고 가속 페달을 꾹 밟았다. 차는 미끄러지듯 조용히 주택가를 지나 국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로 진입하였다. 도심의 혼잡과 번화함이 물러나고 시골 풍경이 다가왔다. 양 갈래로 나뉜 작은 농장들과 푸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골집들은 마을 안팎에 흩어져 있으며, 주민은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도로 옆에 흩어진 꽃들은 차분하고 평화로웠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는 달렸다.
늦은 오후. 그는 비로소 고속도로를 벗어나 갓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는 푸른 소나무와 잎사귀가 우거진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도로는 곡선을 그리며 높아졌다 낮아졌으며, 태양 빛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폭이 좁은 강과 호수를 지났다. 일렁이는 물은 햇빛에 반짝이며, 주변의 나무들과 하늘의 색깔이 물에 그대로 드러났다. 강둑을 따라 그의 차는, 흐르는 물결과 함께 한동안 여행을 이어갔다. 이윽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은 다시 평야로 변해가며 들판과 목장이 나타났다. 그곳을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덮었다. 바람은 부드럽게 불어와 그에게 평화로운 기분을 선사했다. 그는 자연의 향연에 안주하듯 이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어쩌면 다시 못 볼 수도 있을 거야.
들판이 끝나는 곳에 철조망이 보였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뻗어 나온 철조망은 끝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목적지에 다가섬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차들이 많아지고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리고 검문소가 보였다. 우측에는 피난민을 위한 쉼터가 자리하고 그 옆에는 간이 텐트가 나란히 있었다. 그는 좌측으로 차를 몰아 차들이 몰려 있는 공터에 주차했다. 피난민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대부분 여성과 아이였다. 그들의 두 손에는 모두 다 비닐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여전히 추운 까닭인지, 패딩 같은 두꺼운 옷과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들 곁을 지나 검문소로 갔다.
검문소 옆 면회실에는 이제 막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듯한 표정의 리포터가, 그레고리를 보더니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뭔가 하나라도 취잿거리를 애써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그의 국적과 여기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인사만 했다. 그녀는 졸졸 따라오며 같은 질문을 했다. 그레고리는 단지 개인적인 용무라고만 말하고 면회실로 들어갔다. 그레고리는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갔다. 그는 군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꼿꼿한 자세로 그레고리를 표정 없이 맞이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다른 나라의 가짜 여권을 보이며 물었다. 나의 아내와 지금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그녀를 찾으러 이곳을 통과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매몰찼다.
안돼!
그레고리는 안되는 이유를 듣고자 좀 더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당최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부루퉁한 모습이었다.
왜 안 되나요?
그레고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서류! 서류 없으면 안 돼!
그는 그레고리를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홱 쏠리는 서슬에 그레고리의 심장이 날카롭게 뛰기 시작했다.
무슨 서류인가?
그레고리는 다그치듯이 다시 물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섰다.
정부에서 발급하는 서류!
그는 거친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한심한 듯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어느 정부를 말하는가?
그레고리는 이제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좀 더 정확히, 상실감조차 무뎌진 것 같은 비참함이었다.
당신 정부!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그를 밀치고선 뒤에 선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레고리는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그저 잡스러운 생각만 들었다. 밖은 흐리고 피난민들은 힘없이 움직였다. 기자들은 옹기종기 모여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천천히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이곳을 그냥 통과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가 막 면회실을 나서자 그 기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레고리에게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다시 그에게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