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의 거북이

by 남킹

앵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날은 밝았고 미자는 자고 있다. 9월의 햇살은, 옅은 겨자색의 나풀거리는 반투명 커튼을 투과하여 상쾌함을 전해 준다. 덩달아 들어온 수수한 성품의 바람은, 창을 타고 넘어 내 귓전에서 속삭이듯 사라졌다.


나는 담배를 물며, 불을 붙이고, 출렁거리는 침대에서, 달랑거리는 그녀의 젖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들숨과 날숨에 맞추어 짙은 색의 젖꼭지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 나는 검지로 살짝 눌러본다. 말캉한 감촉의 즐거운 기억이, 내 속 어딘가에 곱게 개켜져 있다가 올라온다.


담배 연기로 나른하게 풀려 있는 감정 속으로, 불현듯 파리가 앵하고 다시 날아오른다. 탁자 위, 올이 나간 스타킹과 널브러진 김밥의 잔해 위에 그들의 성찬식이 분주히 진행된다. 마치 스크럼을 짜듯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이윽고 방안이 연기로 가득하다.


여자가 뒤척이며, 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돌아눕는다. 나는 모처럼 만에 엄습하는 이 즐거움을 되도록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하여, 살포시 여자의 곁을 빠져나와, 성긴 줄무늬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문을 열고, 붉은 카펫이 깔린 좁은 통로로 들어섰다.


어두침침한 복도 양 끝에 난 손바닥만 한 자연 창을 제외하고, 익숙하지만 어둡고도 모호한 통로는, 천장에 규칙적으로 알알이 박혀있는 백열전구에서 삐져나오는 흐릿한 붉은빛으로, 음흉스럽기까지 하다. 그건 마치 원초적 욕망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죄스러운 인간들의 솔직한 쾌락에 대한 기대치를 잘 감추어 두는 듯하기도 하다.


음습한 이끼 향과 먼지 냄새가 풍기는, 복도 끝의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는 다시 지상의 세계로 돌아왔다. 느릅나무가 규칙적으로 배치된 거리는 한산하였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편의점으로 향하였다.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쁘게 선반을 정리하던 여직원은, 나를 보더니 아는 듯이,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지난 몇 달 동안, 일요일 아침이면 이곳에 들러, 담배와 몇 가지 간편식을 사곤 했다. 모텔의 여자는, 오전에는 거의 깨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곳을 배회하며 몇 시간을 보내야 한다.


라면을 먹고 돌아다니며, 담배를 피우며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지나가는 차, 간판, 구름, 가로수 그리고 여자들을 바라다본다. 주변의 삶이 각자의 속도로 왔다가 사라진다. 나는 낮은 계단을 시작하여 약간 오르막 진 산굽이 길을 천천히 올라간다.


나는 엉성한 나무 사이로 난 구부정한 돌길을 지나 밝은 마름모꼴 광장으로 나왔다. 중앙 광장에는 흔한 조형물이 버려진 듯 방치되어 있다. 한적하고 조용한 곳. 하지만 조금만 귀 기울여도 다양한 소리가 난다. 바람에 실리는 먼지, 사람들의 대화, 발걸음, 눈에 띄지 않는 자그마한 새들, 멀리서 울리는 자동차 경적.


이들은 모두 속삭이듯, 하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합쳐보면, 이곳은 도시에서, 사람이 그다지 살지 않는 변방이라는 것을 누구나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떡갈나무 그늘에서 한동안 넋을 놓고 바다를 쳐다본다.


양호주머니에 동전과 지폐가 느껴진다. 거의 줄 담배에 가까운 나는 가끔 나의 엥겔지수를 안타깝게 추론하곤 하는데, 지출 대부분은 사실 담뱃값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가 내게 담배 한 갑을 던져 준다면 본능적으로 아주 고맙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나는 한 번씩 쓸데없는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파칭코 게임을 하며 주머니를 모두 비우던가, 지갑을 탈탈 털어, 로또를 구매해 가방에 쑤셔 넣고는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 세탁으로 너덜너덜해진 종이 뭉치를 주머니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자를 만난 건 행운임이 틀림없다. 그녀에게 돈을 타 쓰는 게 너무 편하다.


나는 목적이 없으므로 서두를 필요가 없다.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무거운 짐도 원하지 않는다. 안일하고 허영심을 충족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세상의 옆으로 비켜나 있다. 가장 사소한 것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말이다. 타인의 생각이 창조한, 세상이 바라보는 인격을 나는 본능적으로 피하며 살아왔다.


느긋한 나의 중심은, 아주 찬찬히 지상의 피조물과 인간의 산물들을 두루두루 살피며 지나간다. 그러다 담배가 피고 싶으면 피우고, 배고프면 김밥이나 라면을 먹고, 목마르면 콜라를 마신다. 자는 여자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여자와 보낸 지난밤은 지난주 토요일과 비슷했고, 지난주 밤은 지지난 주 토요일과 거의 흡사했다.


여자와 만난 후 처음 몇 달은, 매주 토요일이 되면, 이 여관 저 모텔을 옮겨 다니며 잤지만, 그 후에는 오로지 이곳에서만 주말을 보낸다. 왜 여기만 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비슷한 네온사인, 비슷한 입구, 비슷한 카펫, 비슷한 방과 침대에, 심지어 비슷한 여관 주인의 말투에 이미 선택의 고민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람들이 분주히 드나들기에 너무 높은 산 중턱 자락에 있지만, 주변은 낮고 외롭고 한적하고 고즈넉하기까지 한 이곳이 마치 분신처럼 내밀하게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이제 익숙하기까지 한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마치 갈라파고스의 거북이 마냥, 넘쳐나는 시간만큼 딱딱해진 등껍질을 천천히 질질 끌고 있을 뿐이다. 그저 아쉬움이라면, 지난밤의 아련하고도 아늑한 편안함을 반추할 뿐이다.


거짓과 상상 혹은 죄와 벌 (12).jpg
신의 땅 물의 꽃 (1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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