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여황제 #4

서동

by 남킹

개암은 시간을 확인했다. 궁궐의 업무를 마감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도 황제가 정현을 찾는다면, 정현에게 연락이 올 시간이었다. 그는 정현을 다시 방문할 것을 약조하고는 돌아갔다. 다시 혼자가 된 정현은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죽여야만 하는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벌레 한 마리조차 죽여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대로 뼈대 있는 학자 집안의 귀한 자식으로 태어나 그저 지금까지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학문과 언어 공부였으며, 귀양촌에서도 곡물 키우는 것 외에는 당최 무엇하나 해 본 적이 없는 그이기에, 이 땅의 최고 권력자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기괴하고 해괴망측한 자신의 운명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던 거였다.

그렇게 불안한 눈으로 서성거리고 있는 정현에게 어김없이 세빈이 호출을 하였다. 그는 이번에도 파란 약을 하나 꿀꺽 삼키고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기적어기적 황제에게로 나아 갔다. 그리고 변함없이 밤새도록 황제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무사히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약은 3알. 정현은 그날도 개암이 나타나 주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였다. 하지만 개암은 그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무심한 개암은 정현을 잊은 듯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약을 소진한 그 날. 정현은 거의 자포자기(自暴自棄) 상태에다가 그동안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보니, 마침내 바닥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정현이 그렇게 한동안 시체처럼 꼼짝없이 잠을 자는 사이, 누군가가 그의 옆에 와서 그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정현은 눈을 뜨고서도 한동안 비몽사몽간을 헤맸다. 개암이었다. 그는 정현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그가 완전히 정신이 깰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 사이 정현은 무거운 몸을 힘겹게 곧추세우며 겨우 일어나 개암에게 예를 갖추었다.

“소인, 귀하신 분의 방문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만 심하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부디 용서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정현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오히려 내가 미안할 따름이네. 몇 날 며칠을 황제의 괴롭힘에 몸과 마음이 무척 상했을 터인데 편히 쉬는 자네를 이렇게 곤혹스럽게 깨웠으니…. 하지만 어쩌겠나.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자네나 나나 목숨 부지하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다음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나.” 개암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개 숙인 정현을 위로했다.

“지당하십니다. 나리. 사실 지난 며칠 동안 나리가 제 처소에 오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정현은 간곡한 심정을 담아 답했다.

“나도 자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네. 하지만 궁궐 곳곳에 염탐꾼을 심어 놓은 황제의 의심을 피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네…. 정현….” 개암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정현을 바라봤다.

“아무튼 이렇게라도 저를 찾아 주시니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현은 다시 감사의 예를 표했다. 예가 끝나자 개암은 몸을 정현에게 붙이고 천천히 정현의 귀에다 대고 아주 작게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자네는 혹시 서동을 아는가?” 개암의 물음에 정현도 개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들어서 알고는 있습니다. 고대 유물 발굴팀 직원으로 약을 빼돌리다 적발되어 옥살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현은 푸념을 늘어놓듯이 말을 뱄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동이 처음 적발되는 바람에 발굴팀과 통역팀 직원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갔고 그 때문에 정현의 아버지도 화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 자네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네. 그 작자에 대해서…. 하지만 그 서동이 불과 한 달 전까지 황제와 잠자리했다는 사실은 자네도 모를 것으로 생각하네….” 정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개암을 쳐다봤다.

“아니, 감옥에 있어야 할 서동이 어떻게?” 정현은 놀라움과 의구심을 동시에 느끼며 개암에게 물었다.

“서동이 감옥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그동안 황제가 전국의 총각 씨를 말리지 않았겠나…? 그러니…. 기쁨조 모집원이 결국 감옥에 갇힌 자들도 조사하고 다녔지…. 그런데 그 서동의 허우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의 수려한 외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모집원이 그를 그냥 두었겠나…. 결국 감옥에서 빼내어 황제에게 갖다 바친걸세….” 정현이 서동의 얘기를 듣자,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고대로 받았을 서동이 가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서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으리….” 정현의 질문에 개암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지만 정현이 지금 받는 고통을 더할 뿐인 현실이, 개암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얼추 예상한 대로라네….” 개암은 정현을 슬프게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럼 결국 죽임을?” 정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그렇게 되었지.” 개암은 정현의 어깨를 살포시 두드리며 위로를 대신했다.

“그런데, 나으리. 왜 저에게 서동의 얘기를?” 겨우 마음을 추스른 정현이 다시 물었다.

“거의 우리의 거사가 성공할 뻔했다는 게야. 서동이 며칠만 더 버텼으면….” 개암의 말에 정현은 다시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서동이 황제와 하룻밤만 잔 게 아니었군요?” 정현은 개암의 말을 대번에 파악했다.

“그래, 서동은 황제와 무려 한 달간을 같이 지냈다네….” 그 말에 정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달이라고 하셨습니까? 나으리….” 정현은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농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서둘러 개암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정확하게는 삼십 일이었네. 세빈이 서동에게 완전히 빠졌다고 우리는 그때 확신했지…. 그래서 독약을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는 여유도 부렸지…. 하지만…. 황제의 변덕이 또다시 그녀를 살린 셈이야….” 개암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정현을 바라봤다. 정현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서동의 죽음이 결국 자신을 옭아매는 사슬이 되었으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다고 정현은 느꼈다. 하지만 정현이 그냥 넋 놓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개암에게 물었다.

“나으리, 그런데 서동은 어떻게 한 달을 버틸 수 있었는가요?” 지금 정현에게는 이보다 더 귀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하루라도 더 살아서 버텨야만 이 지옥을 벗어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질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 내가 자네에게 서동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그 점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지금의 황제, 세빈은 미천한 출신의 사생아가 아니겠는가! 그런 천한 그녀가 순전히 노래 하나로, 자상하신 우리 구뷘 나리의 수양딸로 입적이 되면서 오늘날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녀가 배움이 짧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글자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문맹이라는 사실은, 문무 대신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라네. 다만 그에 대하여 세빈이 워낙 민감하게 반응하고 입단속을 요구하는 바람에, 딱한 백성들만 모르는 비밀이 되고 말았다네….” 개암은 더욱 낮은 소리로 정현에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세빈은 어떻게 국정을?” 정현이 호기심을 보이며 개암의 입에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나랏일을 기록하는 예문관이 그 일을 담당한다네. 그러니까 황제에게 올라오는 모든 문서는 예문관 소속 관리가 황제 앞에서 낭독하고 그에 대한 황제의 답변을 기록하여 여러 대신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라네….”

“그럼, 세빈은 하루에 올라오는 그 문서들을 한 번만 듣고는 판단을 내린다는 말씀이신가요? 나으리.” 정현은 귀를 바짝 세우고선 개암의 답을 기다렸다.

“그렇지. 그러니 세빈의 기억력이 비상할 수밖에는. 무엇이든 한번 들으면 꼭 기억하려는 집중력 훈련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는 거지…. 그녀의 장기인 노래 또한 그녀의 특기를 살리는 데 한몫했지…. 그녀는 한번 들은 노래는 절대로 잊지 않고 정확하게 따라 불렀으니 실로 놀라운 능력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그녀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일곱 동생을 수족 부리듯 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그 놀라운 기억력 때문인 거지….”

“하지만, 나으리. 세빈의 그 능력과 서동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요? 더욱 궁금하기만 합니다. 소인은….” 정현은 머리를 갸우뚱하면 개암에게 물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지금부터라네…. 세빈은 자신의 기억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지…. 그러므로 무슨 이야기든지 듣고자 하는 욕망 또한 엄청나다네…. 즉, 황제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네…. 그게 서동을 한 달 동안 살린 거지….” 개암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정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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