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여황제 #3

개암

by 남킹

그날 오후, 궁궐은 뜻밖의 소식에 다들 수군대기 시작했다. 정현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 돌아간 것이다. 변덕스럽고 변태스럽기 짝이 없는 황제의 근래 보기 드문 행위였다. 가뜩이나 쿠데타로 잡은 정권인지라, 세빈은 주위 사람을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더욱이 낯선 외부 사람은, 그녀의 욕망 충족이 끝나면 가차 없이 죽여야만 안심을 하였다. 그런 그녀가 정현을 멀쩡한 상태로 돌려보냈다는 것은, 궁궐의 고관대작에서 미관말직까지 상당한 호기심을 느끼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은, 궁궐을 출입하는 사람마다, 다들 서로의 소매를 붙잡고 정현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에 대한 여러 가지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물건의 소유자라는 것부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침실의 기교> 혹은 <춘약>을 전수하였다거나, 전설로만 전해져오는, 고대 서적 <금병매>와 <옥보단>을 통달했다는 등등.

하지만 정작 정현 본인은 여전히 살얼음판에 선 위기의 남자일 뿐이었다. 황제가 하루 정도야 만족하여 봐줄 수 있겠지만, 그 변덕스러운 성질머리로 내일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 그로서는 당연히 좌불안석(坐不安席)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지닌, <비아그람>이라고 불리는 파란 약은 이제 4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이 약의 효능을 할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고대 유물에서 가끔 발굴되는 것인데,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은 소홀히 다루었다. 하지만 고대어에 능한 정현 집안사람들은, 그 효능과 부작용을 해석하여 알고 있었으므로 그 약의 비밀을 가족에게만 몰래 전수하였다. 하지만 정현이 어찌어찌해서 이 약의 도움으로 앞으로 나흘은 더 버틸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이후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고통스러운 시간만 며칠 더 연장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침실에 드러누워 긴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한편, 이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환관이 있었다. 그는 환관의 우두머리인 <상선>의 신분으로 <개암>이라고 불렀다. 개암은 황제의 양아버지인 구뷘의 사람이었다. 개암은 어릴 때 지독하게 가난한 일곱 형제의 막내로, 허구한 날 집집이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여 겨우 목숨을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구뷘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다. 구뷘은 그가 기억력이 비상하고 심지가 굳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가까이에 두고, 다른 사람과 비밀스러운 메시지를 주고받는 하인으로 부렸다. 그리고 개암이 12살이 되던 해, 그를 궁궐의 환관으로 집어넣었다. 이는 그가 스스로 구뷘에게 부탁을 한 거였다. 개암은 야심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권력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그는 깨달았다. 최고 권력자와 가까이 있는 자가 결국 권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개암은 모처럼 만에 기대를 걸 만한 소식을 구뷘에게 몰래 보냈다. 개암은 그동안 구뷘의 명령에 따라, 황제를 독살시키기 위한 기회를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하지만 세빈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녀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음식은 조리과정부터 철저하게 감시하였고 완성된 음식이라도 아랫것들이 여러 번 임상 시험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수저를 들었다. 그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조치일 것이다. 황제 스스로 정적을 독살시켜서 그 자리에 올라앉았으니 어찌 그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개암은 구뷘에게 정현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만약 정현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 계속 그녀 가까이에 머물 수만 있다면, 대의를 펼칠 기회가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전달했다.

그날 밤, 개암은 약재를 담당하는 관에 일러, 정력에 좋다는 녹용, 도마뱀, 사람의 태반, 물개의 성기, 해마와 부추 씨앗을 넣은 정력 탕을 짓게 하여, 손수 탕을 들고 정현을 만나러 갔다. 황제의 명이라고 속이니 다들 아무 의심 없이 길을 터주었다.

“자네가 정현인가?” 개암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냥하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소인 뉘라고 불러야 할지?” 정현은 뜻밖의 손님에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은 사적인 자리이므로 그냥 개암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네. 게다가 비록 몰락한 집안이라지만, 엄연히 나라의 중책을 조상 대대로 이어온 뼈대 있는 가문 사람인데 어찌 내가 경솔하게 아랫것 대하듯이 할 수 있겠는가.” 개암은 정현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며 자기 사람으로 만들 요령을 생각했다.

“그렇게 인정해주신다니 저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옵니다. 하지만 나라의 국법을 어긴 죄인의 집안이므로, 그저 하루하루 속죄하는 심정으로 모진 목숨 연명할 뿐이옵니다.” 정현은 다시 한번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개암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키고는 딱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나도 이미 자네에 대하여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보았네. 그게 어찌 자네 아버지의 죄가 될 것이며 가문의 허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그 상자에 담긴 알록달록한 약이 마약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아랫것들의 잘못이지 않겠나. 게다가 그게 설령 마약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자네 집안이 어디 그냥 보통 집안인가? 대대로 충신과 열녀를 배출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무슨 일이든 맡은 바 임무에 지극정성을 쏟으니,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심지어 변방의 작은 벼슬아치들도 존경을 마다하지 않으니, 이 어찌 자네가 감내하여야 하는 이 현실이, 작은 죄에 대한 벌로 합당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깊은 궁궐에서 하찮은 직책을 맡은 나 같은 사람에게조차도 자네의 신세가 그저 안타깝고 한스럽게 느껴질 뿐이라네.” 개암은 정현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지긋이 그를 쳐다봤다. 정현은 개암의 위로에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저 소인은 소경이 되신 제 어머니를 끝까지 모시지 못한 불효에 가슴이 미어질 뿐이옵니다.” 정현은 개암에게 쓰러질 듯이 안기며, 파리보다 못한 자신의 처지와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부둥켜안았다.

이윽고 정현의 울음이 잦아들 무렵, 드디어 개암은 그의 방문 목적을 넌지시 비추기 시작했다.

“내 이제, 내가 자네를 이렇게 불쑥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자 하네. 이건 어찌 보면 자네의 효심과도 연관되어, 자네가 살아서 어머니에게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네.” 개암은 정현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찬찬히 말을 했다.

“소인, 제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디 어르신께서, 제가 살아서 돌아갈 방법을 꼭 알려주시기를 머리 쪼아 빕니다.” 정현은 간곡한 표정으로 개암을 우러러봤다.

“우선, 자네가 꼭 약조할 것이 있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될 걸세.” 개암은 비장한 표정으로 정현을 노려봤다.

“네, 그러겠습니다. 어르신 말씀을 제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정현은 두 손을 꽉 잡고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개암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정현의 귀에다가 입을 바짝 갖다 대고는 낮게 속삭였다.

“나는 상황제의 명으로 세빈을 독살하려고 한다네.” 정현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헛것을 들었나 싶어 재차 물었다.

“상황제시라면?” 정현의 물음에 개암은 더욱 낮게 속삭였다.

“그래, 구뷘 나리님이시다.” 정현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지금 개암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워낙 중차대한 일이므로 그가 확신이 들 때까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으리. 제가 지금의 황제를 독살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정현은 부들부들 떨면서 개암에게 속삭였다.

“그렇다네. 자네만이 유일하게 황제 가까이 갈 수 있으며, 그 길만이 자네가 이 지옥에서 풀려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네.” 개암은 정현의 어깨를 꽉 잡으며 독려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으리. 황제 앞에서, 저는 알몸이 되어 몸 구석구석을 시종들이 다 살피고 난 뒤에야 겨우 만남을 허락받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독약을 지닐 수가 있겠습니까?” 정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개암을 살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황제는 영악할 뿐만 아니라 겁이 아주 많아 절대로 너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을 걸세.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내 손에 유명을 달리하였을 거야. 나는 오늘 밤 당장 자네에게 독약을 처방하진 않을걸세.”

“그렇다면? 나으리….” 정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가 틀림없이 올걸세….” 개암은 굳은 표정으로 정현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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