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산드라의 예언

by 남킹

부석거리는 소리에 눈을 감은 채 잠을 깬다. 담배 연기가 난다. 남자는 항상 이른 시간에 잠들고 이른 시간에 깬다. 그리고 깨어 있는 동안에 그에겐 항상 담배가 물려 있다. 담배, 콜라, 김밥과 라면. 그를 수식하고 규정짓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외양을 비춰주는 거울을 아주 자연스럽게 거부한다.


막무가내다. 도대체 채워진 관념이 있나 싶을 정도로 비어있다. 숫제 모텔 방 전체를 그의 초상화로 채워 넣고 싶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아침 햇볕에 가녀린 새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본다. 하얀 시트에 반쯤 몸을 드러낸 나의 모습이, 미명 속에 차츰 또렷한 윤곽을 드러낸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아주 천천히 돌아눕는다.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아파진다.


남자와 보낸 질퍽한 본능의 밤이 지나면, 언제나 일요일 아침은, 켜켜이 쌓인 피로와 통증이 칡넝쿨처럼 내 몸을 휘감아 온다. 그나마 오후로 치닫는 시간만큼 비례하여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만은, 아직은 가벼운 까닭에 이럭저럭 누운 채 버티곤 한다.


남자가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이제 오전이 다 가도록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가면 내 마음 한편이 턱 하고 빈 것처럼 아련하고, 텅 빈 방의 공허함이, 내 삶의 참을 수 없는 무게에 덧붙여 다가오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냥 이렇게 있는 수밖에는.


나는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켜, 옷을 걸치고 빠끔히 벌린 창문을 슬며시 좀 더 젖혀본다. 창문 틈에 낀 채 가늘게 떨고 있던 하얀 홀씨들이, 탈출하듯 황급히 빠져나와 허공으로 쏜살같이 사라진다.


햇살은 눈 부시고 구름은 탐스럽게 조용히 바다 쪽으로 흘러간다. 저 멀리 구불거리는 해안선을 따라 크고 작은 배들이 깨알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마치 계조가 자연스러운 사진을 걸어 둔 듯하다.


해안선 끝을 따라 인간이 만든 도시가 보인다. 다른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구불구불하고 불규칙적이며 덩어리 지고 혼란스러우며 딱딱하지만 끓고 있는 모습이다. 산 쪽으로는 하얀 아파트가 끝도 없이 심어졌다.


창문을 조금 더 열자, 훅하고 쏟아지는 바람과 함께, 제멋대로 깎인 검붉은 야트막한 언덕과 그 아래로, 낡은 지붕들이 조가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초라한 마을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곳을 이어주는 도로의 사거리, 즉, 내가 있는 바로 맞은편에 둥근 차양을 쓴 주유소와 편의점이 나란히 사이좋게 자리를 잡고 있다.


편의점 여직원의 모습이 얼핏 설핏 보인다. 그리고 그의 모습도 바쁘게 움직이는 여자 사이로 흘깃흘깃 보이는 것 같다. 남자가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둘 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예전과 똑같이 김밥과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담배를 문 채, 이 동네를 오전 내내 배회할 것이다. 그의 담배 습관은 몇 차례나 가슴이 확 뒤집히는 다툼으로 이어졌지만, 이젠 거의 휴전 상태다.


계절을 넘기며 이어진 만남을 통해서 확실하게 배운 한 가지는, 그의 일상과 행동, 생각과 말은 아주 심하게 습관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도대체 선택의 갈등 혹은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달지 않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남자는 선택의 의무가 빠진 그 공간을 느긋함으로 채워 넣은 듯이 행동한다. 반면 나는 조급하다. 그리고 남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이 일정하고 나는 불안으로 변덕스럽다.


그는 시간을 바라만 보고 나는 되짚어만 본다. 그는 무심하고, 나는 가늘고 다양한 감정의 결에 얽혀있다.


그는 천천히 걷고 나는 빨리 걷는다. 그의 어조는 열의가 다 빠져 있고, 나의 말투는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그는 직업이 없고 나는 성인이 된 이후 줄곧 일하고 있다. 그의 일상은 정확하게 나의 반대급부에 자리하면서도 견고하고 또한 유연하다.


내 귓전에는 카산드라의 불길한 예언이 항상 메아리쳐 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풍요의 델타만이 수식되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남자가 좋다. 하지만 그로 인해 즐겁고 그로 인해 풍요로우며 그로 인해 행복하게 될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는 뜻은 아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의 일요일 오전은, 창가에 서서 하늘과 구름, 바다와 남자를 보는 것으로 채우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흘러가는 순간순간을 아로새기는 일을 기대하고, 또한 내밀한 즐거움으로 변환하기도 한다.


세상의 시간이 아귀다툼처럼 서로를 타박하고, 상처 내고, 그것에 대한 자괴심으로 변죽을 울리다가, 어느 순간 뚝하고 멈춰버린 아침. 발아한 새싹 향기가 진동하는 공간. 그 아름다운 피난의 순간이 훅하고 밀려드는 바람 속에 오롯이 담겨 있는 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어슬렁거리는 뒷모습을 그저 이렇게 초연한 시선으로 바라다볼 뿐이다.


솔직하고 무심하며 늘 외로움의 징후를 안은 듯한 형태로, 내 마음을 건드림 없이, 내 시선을 고정할 강렬함도 없이, 행위는 수동적이고 시선은 마주침 없이 멍한 어딘가를 바라보지만,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품에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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