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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멍구 Jan 31. 2020

수집, 그 피할 수 없는 에디터의 습관

누군가에겐 성가신 것, 그러나 에디터에겐 필요한 자질

전주로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우리팀에 새로 온 H대리님은 운전기사겸 업무 답사로 우리의 취재 출장을 따라왔다. 91년생의 5년차 주임인 나는 애매한 시니어였기에 조수석에 앉아 출장길을 달렸다. 3시간 30분이라는 긴 여정에 대화주제는 창업과 전략에 대해, 킬링디어 영화의 첫 장면에 관해, 우리가 아는 유일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관해, 아프리카의 강도들에 대해. 이리저리 튀었다.


이야기하다보니 이 대리님, 어쩐지 나랑 같은 종족인 것 같단 느낌이 스쳤다. '뭐지? 이 느낌 어디서 시작된거지?' 촉의 근원을 찾기 위해, H대리님이 늘어놓은 정보를 빌어 뇌로 킁킁 냄새를 맡는 동안 H대리님은 말했다.



"저는 보고서 쓸 때도 정리하면서 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죄다 끌어모으고 결론까지 나왔을 때, 나중에 한꺼번에 정리하는 스타일이에요."


그 근원을 찾았다 싶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 방식 에디터의 습관이랑 닮았네요. 

에디터의 일이야 말로 주제마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펼쳐보고, 정리하는 일이잖아요." 




나는 5년차 주임임과 동시에 5년차 에디터이기도 했다. H대리님에게 느꼈던 동족이란 느낌은 내가 일하는 5년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수집의 습관'에서 비롯한 촉이었다.


H대리님은 또 <그린북>의 주인공 집이야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집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집은 이집트 왕자에 나왔을 법한 예술품과, 사람 키만한 상아, 영국 왕실에 있었을 것 같은 의자가 조화를 이룬 집이었다. 마치 '이세상 제일 화려하다' 영어로 번역하면 'the most gorgeous', 인테리어로 번역하면  집일  같은 느낌이랄까


영화 <그린북> 주인공의 집 


나의 집에도 영화 <그린북>의 주인공 집같은 공간이 있었다. 그 찬장 안에는 필요는 없지만 흥미는 있는 물건, 선물을 할 때 좋은 포장재가 되줄지도 모르는 종이, 지금은 어울리지 않지만 딱 맞는 공간이 나타나 필요할지도 모를 장식품 등. 본질적으로 '지금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필요할지 모를 그런 물건'들이 모여있었다. 동시에 그 찬장은 남편이 가장 열기 싫어하는 곳이기도, 남편이 '윤아의 욕망창고'라고 이름지어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공간을 '에디터의 공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모아두어 적재적소에 꺼내두기 위한 공간이니 말이다. 


수집의 습관은 에디터의 일에 있어선, 글에 맛을 더하는 요리법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1. 어떤 책에서 읽어 흥미로운 구절을 수집해둔다.

현재의 사업 트렌드는 ‘준비-조준-발사’ 순서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발사-조준’ 순서로 행동해야 한다.

인상 깊은 인사이트라고 생각하니 일단 수집해둔다. 인생은 모르는 것이니 언젠가 내가 사업을 하게될진 모르잖나. (그럴리 없다)


2. 인터뷰 취재 중 수집한 말과 연결되는 부분을 발견한다.

그런데 내가 취재한 팀의 프로젝트가 언젠가 책의 구절과 비슷한 움직임을 띈다. 인터뷰 마무리에 수집한 말을 녹이기로 한다. 아래는 내가 쓴 팀인터뷰 기사의 마지막 단락이다. 

현재 W9론칭 멤버는 지금도 고객에게 하나하나 묻고, 당장 앞의 계획을 짜며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다. 처음부터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막막하다고 생각했던 과제들도 적절한 때에 늘 답을 찾았다.
현재의 사업 트렌드는 ‘준비-조준-발사’ 순서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발사-조준’ 순서로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월마트와 에어비앤비 등 혁신하는 창업자들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바로 론칭하고, 실행하고 조준했다.
W9 론칭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는 점주 설명회와 팝업스토어로 한 발, 두 발을 발사한 상태. 이젠 고객의 반응을 따라 조준할 차례다. W9팀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이야기하며 웃었지만, 지금처럼 고객을 이해하고 고객에 맞추는 한 발 한 발이라면 W9 브랜드의 충성고객도 차차 쌓이리라 기대한다.


3. '역시 수집해두길 잘했어'라며 몹시 뿌듯해한다.




말하자면 나에겐 마구 수집하고 모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방이 

내 집에도, 인터넷 공간에도, 일하는 프로세스에도 있었다. 


'수집'에 관한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음 글에 계속>

<수집가 에디터의 즐거운 습관 -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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