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멍구 Aug 18. 2015

답장이 느린 남자

영국에서의 원거리 연애 이야기


  최근 헤어진 남자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그와 나는 같은 동아리의 선후배 사이로 만났고, 헤어졌다. 다행인 건지 그 사람은 얼마 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예술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고, 때문에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귀었던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친구들로부터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그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사람은 재입학을 하면서 자취를 시작했는데, 한 번은 며칠 동안 그의 엄마가 그와 연락이 되지 않아 '아들이 연락이 안된다'며 학교 과사무실로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는 학교에서 창피를 당했고, 그와 엄마 사이에서는 한바탕 싸움이 났었다고 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친구에게로 전달된 이야기에 의하면, '촬영 과제로 정신없어 며칠이 눈 깜짝할 새 흘러갔고', '엄마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시간은 고작 3일', '어린 나이도 아닌데 엄마가 전화를 하는 바람에 크게 창피를 겪었다'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그에게서 직접 들었던 친구는 진짜 당황스럽고 창피했겠다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더란다. 하지만 나는 이 얘기를 듣고 다른 이유로 경악했다. 그네 엄마의 속 터지는 심정을 너무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다 큰 아들 학교로 전화까지 했겠나.


  나중에 그의 말을 듣기로는 걱정하실까봐 중간에 카톡 1을 지워드렸단다. 걱정하실까봐 카톡 '확인은 해주었다'는 소리.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이 남자는 연락이라는 개념을 대단히 오해하고 있다 싶었다.




엄마니까 그렇다 치자.

  그치만 최근 나도 이 남자의 연락 시스템 때문에 두 번이나  폭주했던 바가 있었다.


  그와 나는 이미 오래전에 연락을 관둔 사이였지만 최근에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었다. 우리의 헤어짐이 깔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며 몇 달을, 그의 심경을 추측하며 몇 달을,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끄집어내고 반성하느라 또 몇 달을 보냈다. 왜 헤어진 건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추측뿐인 생각들을 끌어안고 사는 내가 한심스러워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와 나는 그 주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만나기 전 날, 그는 정말 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은 못 볼 것 같다며 일요일날도 볼 수 있겠냐는 긴 카톡을 보내왔다. 나는 있던 약속을 미루고 그 약속을 잡았던 거라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답장을 했다. 일요일 저녁 6시쯤 보는 것도 괜찮느냐고. 그런데 그에게서는 답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늦은 밤까지도 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대체 뭐하자는 거냐 싶어 '답장 좀'이라는 짧은 카톡을 보냈지만 여전히 답은 오지 않았다. 물론 이미 헤어진 사이에 만나는 게 불편했을 수도 있다. 그치만 분명 만나자고 한 건 그였고, 만약 만나기 싫었다면 만나지 않는 게 좋겠냐고 말하면 될 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답장을 아예 않아 버리는 건 너무 비겁했다. 연락 않고 피해버리는 건 이 사람에겐 익숙한 처사다 싶었지만 끝까지 이런 식인 건 너무 괘씸했다. 나는 분한 마음에 욕카톡을 쓰기 시작했다. 카톡은 글자 수 제한이 없는 게 좋았다. 나는 내 분을 담아 핸드폰 화면의 한쪽을 꽉 채울 분량의 욕카톡을 완성했다.




   '야이 개 자식아'로 시작해 '너 같은 못된 놈도 없는 것 같다'로 끝나는 카톡이었다. 카톡을 정성스레 완성하고, 전송 전에 마지막 퇴고를 위해 글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너무 쉽게 '이걸 전송하는 건 오버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이었다. 나는 욕 문자를 보내는 건 관두고, 애꿎은 친구에게 그의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잠시 후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죄송해요ㅠㅠ 핸드폰이 안돼서 계속 못 보고 있었어요ㅠㅠ 이제야 촬영 끝나고 집에 도착했어요. 내일 삼촌이 위독하셔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6시 전에는 끝날 것 같아요. 끝나고 뵐 수 있을까요??>


   민망해졌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럼 다녀와서 답장을 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와 만나기로 했던 일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내내 긴장했다. 커피 때문인지는 몰라도 종일 심장도 뛰고 손도 떨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은 미화될 대로 미화되어 있었고, 그 사람이 아니고는 다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여러 번 했던 참이었다. 그러려니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내가 잘못한 일들만 떠올라 미안했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마음 고생했던 건 그저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의 행동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싶었다.


   물론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나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라는 전제가 필요했고. 그 전제를 인정하기까지는 충분한 시간과 상처가 필요했지만.





  그런데 그 사람은 만나기로 한 저녁 여섯 시가 한 참 넘어가도록 연락이 없었다. 병원에 다녀온다고 하니 어찌어찌 늦을 수 있다고 치더라도, 늦으면 늦는다 못 만나면 못 만난다고 연락은 줘야 할 게 아닌가. 나는 우리가 이야기한 시간, 6시에 딱 맞추어 모임이 끝났는데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으니 그 자리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 건지, 그냥 집에 돌아가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전화를 해보았더니 "고객님의 사정으로 수신이 불가하다"는 음성 메시지로 넘어갔다. 나는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이러는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연락해서 하소연을 했다. "카톡도 없고 전화도 안 받아!" 친구는 남자가 어리면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내가 예전에 잠깐 만났던 연하 있지? 걔도 마지막에 만나자고 하더니 결국 끝까지 연락 없었잖아. 만나려고 생각은 해도 막상 그 시간 다가오면 불편하고 그러니까 피하고 싶어지나 봐. 나이가 좀 있으면 그래도 책임감에라도 만날 텐데 어린애들은 그냥 피하고 마는 거지." "아니 그래도 이런 식으로!?" 나는 우리의 마지막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 그 애가 너무 미워져서 다시 욕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장난하니?'로 시작하는 욕 문자. 물론 보내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쓰고 다시 읽어보니 너무 패배자 같았으므로.   




   그리고 그 애에겐 그러고 나서도 한 시간 후에 답장이 왔다. 죄송하다고. 지금 병원인데 곧 헤어지게 될 것 같다고. 어디냐고.


  내 욕 문자는 다시 머쓱해졌다.  




구 여친이니까 그렇다 치자.

  그치만 본래부터 이 사람은 나를 미친 사람으로 만드는 데 묘한 재주가 있었다.




  나는 영국에서 그 사람은 한국에서 원거리 연애를 하고 있을 적에, 나는 그 사람과 연락이 닿지 않는 시간마다 아주 한심한 인간이 되곤 했다. 그 사람이 연락을 않고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다 보면 왜 연락하지 않는 건지가 궁금해졌고, 다음으로는 내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게 됐는지가 궁금했고, 다음으로는 나를 더 이상은 좋아하지 않는 건지 궁금해져서 슬펐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확인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나의 모든 것이 별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와 있어도 재밌지 않고. 뭘 하려고 크게 마음먹었다가도 기운이 빠지고. 무얼 쓸려고 마음 먹었다가도 귀찮아졌다.




   내가 성가셔진 그의 마음을 수 없이 상상하고, 그렇다면 앞으로의 내 행동은 어떻게 비쳐질지 상상해보려 수 없이 그 사람과 몸을 바꾸어봤다. 앞으로 나의 삶은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고민했고, 좋아하는 마음에 있어서 나는 한 없이 무력하다는 걸 강하게 깨닫곤 한 없이 우울해졌다.


  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며 우울한 산책을 하고, 내 모든 감정을 이입한 영화 감상을 한 편 하고 나면 답장이 오곤 했다. 이렇게나 연락을 안 해주다니 너무 했다고. 이건 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로 밖에 설명이 안된다고 이전까지 쌓아둔 내 감정을 놓지 않고 있다보면, 그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이야기하곤 했다.  

  "사람들 만나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딱 우리의 이야기인 것 같더라고요."


  나는 그제야 나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나의 이전 감정들을 날려버렸다. 그렇게 사람들과 북적거렸다면 나라도 연락 않고 있었겠다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글 쓰는 것도,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도 재밌어졌다. 그러고 나면 이전에 내가 왜 그리 심각했었는지 나 자신을 비웃고 놀리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내가 교회에 가있는 동안에 네 시간이 넘도록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 때쯤 무얼 할 시간인지 가늠해보면 분명 카톡을 확인할 시간쯤은 있었을 텐데 말이다. 왜 답장이 오지 않는 걸까, 계속 생각하다가 나는 또 다시 모든 게 재미없어졌다. 그동안 사람들의 얘기들은 하나도 머릿속에 안 들어왔고, 영국도 한국도 싫어졌다. 친구에게는 나 차이려나봐 하곤 징징댔다. 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 분 일 초가 너무 괴로워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 사람은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겠단 생각까지 했다. 나는 너의 답장이 늦는 것 만으로도 내 일상이 말려버리는데, 나는 이 사람에게 무얼 하고 있는 지도 궁금하지 않을 만큼 작은 존재라는 것이 초라했다.

  나는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하지만 나 자신도 사랑해주어야 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내가 조금 덜 좋아하는 사람, 나를 조금 더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이 날 나는 정말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리고 이 때 힘들어하던 나의 시간들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이 날의 작은 에피소드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실은 주인공의 정신분열로 밝혀진 반전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으니까.







  나는 교회 끝나고 집에 돌아갈 즈음에야 그 사람이 답장을 안 한 게 아니라 내 핸드폰의 데이터가 끊겨서 확인이 안됐던 거란 걸 알았다. 영국의 핸드폰 요금은 한 달마다 돈을 내고 요금 상품을 사는 방식으로 되어있어서 종종 충전 날짜를 놓치면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었다. 나는 핸드폰을 충전을 하곤 그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나처럼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마음으로 놓아주던 사람은 내가 만든 엉뚱한 사람이었던 거다.


  내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답장을 보냈던 때는 한국 시간으로 새벽 네 시였다. 그 애는 새벽 네 시에도 잠을 깨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선배랑 만나서 얘기를 했는데, 저한테 당신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어요."


  나는 내 미숙한 사랑 때문에 완-전히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나는 여러 번 같은 감정이 반복 됐다. 원거리 연애가 아니었다면. 우리 둘의 시차가 없어 네가 바쁠 때 나도 바쁘고, 네가 한가할 시간에 나도 한가했더라면 내 불안감이 조금은 덜했을까.








 사랑은, 부족한 여자와 부족한 남자가 만나 하는 거라는 말을 통감했다. 답장이 느린 남자와 사랑에 너무 많은 삶의 비중을 주어버린 여자. 결국 나의 불안과 다그침이 반복되어 나는 그의 인생에서 퇴장했고, 우리의 특별했던 이야기들은 가장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내 인생에서는 그 사람이 언제쯤 퇴장할런지 모르겠지만.






   다시 앞으로 돌아가, 우리가 서로를 구 여친과 구남친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던 날, 내가 욕 문자를 두 번이나 쓰고 지웠던 바로 그 날. 그 날, 우리는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각자의 잘못을 고백했다. 나는 외로운 외국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매몰차게 떠나 버린 그 사람이 원망스러웠지만,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미안하다 하니 나도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하다고. 너도 나만큼 힘들었을 텐데 네 마음은 생각 못하고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이 말은 하고 돌아왔다. 너 그래도 너무 했다고. 너가 가장 무서운 게 뭐냐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할 때, 내가 너에게 실망하거나 너를 싫어하게 되기 전에, 네가 떠나 버리면 남은 내가 너무 힘들까 봐 무섭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그 말이 복선이라도 되는 양 내가 이렇게 힘들어져 버렸다고.







   다시 혼자가 된 나는, 혼자서도 생기 넘치게 사는 법을 연습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자는 게 요즘 내 생각의 화두다. 관심이 하나로 모이면 자연히 불안함과 서운함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운하다고 부담주고 다그치면 남자는 도망가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나의 서운한 마음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다. 중요한 건 내 인생에 있어서 행복의 주도권을 상대 남자에게 쥐어주지 않는 일이다.


  나는 동아리에선 임원단을 하기로 했고, 밤마다 달리기도 시작했다. 좋아하는 글도 열심히 쓰고 있고, 문화 생활도 많이 늘렸다.



  그래도 외롭고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아직 연애할 때가 아닌가 보다'고 느낀다.




나의 외로움을 기억하는 런던의 옥스퍼트 스트릿


작가의 이전글 영화가 된 시, 문인수 시인의 '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