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취업 - 중국 디지털 마케팅 직군 취업하기
"중국”이라는 낯선 존재
중국으로 해외취업을 생각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때로는 인생의 큰 결정을 할 때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소한 이유들로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곤 하니까.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결정적인 순간이다.
영화 <컨택트>에서처럼 우리의 시간은 선형적이라기보단 어쩌면 전체의 관점에서 카이로스적으로 볼 때 더 납득이 되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나는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중국에 가기 위해서였다.
중국어 중국학을 전공하고 언론정보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던 대학생 때, 나의 관심은 늘 중국보다는 부전공인 커뮤니케이션, 방송, 영화 쪽이었다. 그런 내게 다행인 것은 전공인 중국어가 중어중문과가 아니라 중국어”중국학”과였기 때문에 학과 커리큘럼이 어문이나 문학과 비례로 중국의 문화, 역사, 사회에 관한 수업이 많았고 그때 내가 무조건적으로 신청해서 들었던 교수님의 박사 전공 과목이 중국 문화와 영화였기에 나의 대학시절 중국에 대한 공부가 재미있었던 것 같다.
수업으로 접한 중국 5세대 영화감독 장예모의 영화들과 그 안에 깃든 중국의 근현대사 이야기.
전공과목들과 함께 교양으로 꾸준하게 배웠던 영화에 관한 수업들도 내겐 소중했다.
더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중국의 해외 취업 중에서 내가 하게 된 [디지털 마케팅] 직군에 대해 나의 취업 사례와 중국 현장에서 느낀 업의 특이성과 다양성에 대해 조금 써보려고 한다.
중국에 어학연수를 오게된 것도 매우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나는 친구들 세 명과 팀을 이루어 중국 서안으로 연수를 왔었다. 그때 우리가 처음 개척해서 다닌 학교는 유학생들에게는 유명하지 않은 학교였고 우리 네 명만이 외국인 유학생이라서 모든 환경, 도시, 생활 전부가 중국 로컬 한 가운데였다. 유학시절의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지만 이것도 나중에 :)
1년간의 중국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한국에 돌아올 때 내게 막연하게 남은 하나의 인상이자 다짐, 미래에 대한 약속은 바로 ‘중국에 다시오자’였었다.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그게 혹 여행이더라도 혹은 살러 오는 것이거나 혹은 출장이거나, 어떤 모습으로든 중국에 꼭 다시 오고싶다. 그리고 여기에서 꼭 일해보고 싶다 라는 꿈을 마음에 품었다.
스물네살 때, 인생의 계획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그림이 없을 그 때, 마음속에 새긴 것은 중국에서 일하고 싶다. 라는 꿈이었다.
이상한 일들은 그럴때 일어나는 것 같다. 마음에 간절함으로 자리잡은 그것이 에너지가 되어 내게 돌아오는 순간 말이다.
‘중국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꿈이 내게 왔다
그때에는 어떤 구체적인 실행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막연한 이미지, 생각, 다짐, 바램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원래 하고싶던 진로가 있어서 아주 열심히 그쪽 분야로 취업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대학교 4학년 때 서울 국제 여성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게 그 또 다른 꿈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업계는 신입을 받아주는 곳이 별로 없었고, 나는 그렇게 대기업에서 벤처기업, 또 다시 중견기업 만 2년동안 세 번이나 회사를 옮기는 소위 말해 면접관들이 좋아하지 않는 이력서의 소유자가 되어갔다.
서울에서의 삶은 바빴고, 즐거웠고, 늘 통장은 잔고가 찰랑찰랑 했다.
그당시 근무했던 곳을 추려보자면 남대문, 남산자락, 강남 대로 사거리, 역삼역, 그리고 보라매공원, 선릉공원 앞..
나는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사는 일상이 재미있었다. 회사 끝나고 동료들이랑 밥 먹고 여름날 메리츠타워 앞에서 그냥 앉아서 편의점 음료수 먹으면서 수다떨 때, 단풍이 무르익은 어느날 점심먹고 선릉공원 산책할 때, 신입시절 매일 출근길에 마주하는 남산가는 마을버스, 충무로에서 동대입구를 지나 남산을 삥 도는 시간동안 겨울이 가고 봄이 왔었다. 그 추운 느낌이 지금도 생각이 날만큼 짧은 2년동안의 서울러로써 일한 시간은 내게 소중했다.
Seouler에서 Beijinger로..
그러던 어느날,
내가 다시 중국에 가야한다라는 운명적인 깨달음이 전광석화처럼 온 순간이 찾아왔다. 서두에 말했듯 개인적이고 내밀한 하나의 소리로써 말이다.
그때부터 열일 제쳐두고 중국으로 해위취업하는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난 회사가 당시 베이징에 헤드쿼터를 둔 대만 타이베이 지사에서 온라인 마케팅 AE를 할 수 있는 2년 이상 경력자를 채용하는 잡 포지션이었다.
마침 타이베이 법인장님이 서울 출장을 나오신 9월의 어느날, 서울 시청앞 코리아나 호텔 로비에서 면접을 위한 미팅을 했었고 그 자리에서 오퍼를 받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게 타이베이는 제 3의 선택지였다. 출장을 한번 다녀온 게 전부인 타이베이는 너무 좋은 도시임에 틀림 없었지만, 중국으로 들어가길 희망하는 내게 법인장님은 타이베이에서 1년이나 2년 일하다가 본사에 있는 동일한 보직으로 발령이 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흔쾌히 감사한 마음에 가겠다고 했지만 당시 나는 12월까지 맡은 일이 있어서 3개월 뒤에 갈 수 있는지 여쭤보았고 다시 연락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원자가 원하는 시간에 회사에 입사한다는게 생각해도 너무 귀여운 발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로부터 3개월 뒤 그 회사로부터 똑같은 직군의 다른 지역의 포지션이 있는데 지원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고 그 지역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싶었던 중국, 그것도 베이징이었다.
중국 베이징
내가 지원한 회사는 설립된지 10년정도 된 한국계 디지털 마케팅 & 컨설팅 회사였다. 한국 전자 대기업의 인하우스 마케팅 에이전시였기 때문에 주된 고객은 전자 대기업이었고, 그 밖에 중국 로컬 광고주와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디지털 마케팅의 전반을 책임지는 일을 하는 회사였다.
12월에 베이징에 근무하는 포지션 연락을 받고 1월에 면접을 위해 베이징행 비행기에 올랐다. 1월의 베이징의 추위는 매서웠다. 어둑하고 탁한 공기, 베이징의 첫인상은 춥고 어두운 낯선 도시.
그때 면접을 위해 입은 정장에 신은 살색 스타킹으로 살을 에는 바람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면접이 아침 9시였기 때문에 하루전에 도착해 호텔에서 당시 중국에 연수를 와 있는 친구와 함께 묵으며 다음날 면접 때 말할 중국어 자기소개와 경력소개를 정말 달달 외웠던 기억이 난다.
면접은 아침 9시에 시작해 꼬박 하루동안 여러차례 나누어 진행됐고 경력직인만큼 당일 안에 작업해 프리젠테이션까지 해야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PPT를 만드는데 어느정도 익숙했던 나는 그 때 사용자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한 장표에 크게 [사 용 자]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고, 그 장표에 가운데 “용”자 부분에 더 강조하고싶은 내용으로 말풍선 박스를 추가해 PT를 했더니 나중에는 [사 자] 라는 두 글자만 남았는데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 때 면접을 보신 디렉터가 그 “사자”라는 메세지를 좋게 봐 주셔서 통과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통과를 했고 1박 2일의 북경행은 즐거운 면접여행이었다. 면접날 매니저님이 점심으로는 회사 옆 중국호텔에서 광동식 전복덮밥을 사주셨는데 그 맛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니 특정한 기억에는 예민한 촉수가 작용하나보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중국에 외국인이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working VISA가 필요한데 Z라는 이니셜로 불리우는 그 비자를 받기 위한 자격조건이 2년 이상 경력이 있어야 한다. 당시 나는 딱 만 2년의 경력이 있었고, 중국어를 할 줄 알았고, 그리고 그때 다녔던 여러 회사들 중 두번째 회사가 바로 인터넷 관련 회사였다.
이제 이 곳이 내가 살 곳, 내가 일할 곳
그로부터 몇달 뒤, 모든 해외 취업 수속이 끝나고 이제는 여기에서 살기 위해 일하기 위해 북경에 도착한 날은 봄의 어느 날, 첫 2주간은 정착을 위해 지원해주는 호텔에서 머물며 베이징 국제 무역 센터 부근에 위치한 회사 근처에 집을 구했다. 낯설었지만 면접 때만큼 그느낌이 싫지 않았다. 마음을 열고 정을 붙이다보니 이 곳도 살만한 곳이고 의외로 서울보다 재밌고 신나는 일이 많구나를 서서히 알아갔다.
회사에서 처음 맡은 일은 홍콩의 전자쪽 클라이언트였고 여름에는 처음으로 홍콩으로 출장도 갔었다. 지금은 홍콩이 너무 익숙하지만 그때 처음 간 홍콩 출장은 정말 신세계였다.
중국의 디지털 생태계의 변화
중국은 한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인터넷 서비스들이 모두 막혀있거나 로컬 서비스가 그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가령 구글은 바이두가, 페이스북은 웨이보나 위챗이, 유투브는 요우쿠나 아이치이가.
바이두, 시나 웨이보, 텐센트의 위챗, 알리바바의 요우쿠, 그리고 아이치이.
방금 말한 다섯개의 서비스는 검색엔진 바이두를 제외하고 모두 내가 중국에서 디지털 마케팅을 시작한 그 후에 생겨난 서비스들이다.
그렇다고 그 기간이 그렇게 오래전 일도 아니고 웹 2.0이 한창이던 때에 중국에 왔지만 당시 중국의 디지털 생태계는 같은 시기 한국이나 해외의 그것보다 훨씬 발전이 더뎠던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네티즌 숫자가 현재는 7억명을 넘어섰지만 그때는 3억.. 이런 숫자로 기억할만큼 그동안 중국의 인터넷은 전세계 어느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단순히 웹사이트라는 이제는 전통적인 기업의 커뮤니케이션 창구에서 시작해 지금의 소셜 미디어, 바이럴 마케팅, 콘텐츠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까지 진화한 지난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다는 것이 새삼스럽지만 놀랍고 신기하다.
그리고 그 어떤 감정보다 가장 큰 것은 감사하다는 마음이다.
어쨌든 나의 중국 취업은 전자제품을 마케팅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후의 때로는 롤러코스터 같고 때로는 회전목마 같은,
하지만 한 순간도 멈춘 적 없는 중국에서의 경험에 대해 앞으로 계속 써볼 것이다.
쓰다보니 취업 과정 이야기에 치우쳐서 디지털 마케팅 직군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 한나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