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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Jun 01. 2019

나를 들여다보는 고통,
아이를 기른다는 것

서툴고 예민한 엄마의 극한 육아 성장통 


 둘러보면 모두가, 육아마저 매끈하게 잘 해내는 강인하고 지혜로운 엄마들만 같았다. 오로지 나만이, 이렇게 서툴 수가 없고 모지리 같을 수가 없었다.
 
 그리 힘든 줄 모르고 애들 키웠다는 엄마들의 말. 아이 하나도 버거워 끙끙대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 초라해 보였다. 나는 그저 예민하기만 한 여린 사람일 뿐인 걸까. 내 안의 상처들을 갈무리하지 못한 대가로 여전히 버벅대고만 있는 걸까. 
 
 삶에 서툴어 미처 준비되지 못한 엄마였던 내게 육아는 어떤 가혹했던 경험들도 거뜬히 뛰어넘는 고통들을 선사했다. 끊임없이 나를 들여다보게 하고 나의 바닥을 기어이 보고 말게 하는, 그렇기에 내 가장 추악한 민낯을 생생하게 마주하게 하는 육아란 내게, 끝없는 삶의 질문을 던지던 살아있는 학교 그 자체였다.


 그러다 어렴풋이 알게 된 한 가지가 있었다. 성장기에 큰 마음의 상처 없이 무난하게 자랐거나 덜 예민한 사람들이 엄마가 되면 아이를 기를 때에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고 기른다는 것과, 성장기에 제법 큰 상처가 있거나 감성의 결이 예민한 사람들이 엄마가 되면 아이를 기를 때에도 더 크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그래서 사는 게 늘 서툴렀고, 현실이라는 이름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이 버거웠다. 하물며 한 생명을 온전히 보살피고 길러내야 하는 육아는 오죽했을까.


최고의 행복과 최고의 고통을 다 가진 이름. 엄마


 타향살이 독박육아의 끝없는 헤매임의 시간들. 괴로운 마음 부여잡고 아이와 마주 앉아 함께 울기도 많이 울었던 그 시간들과 내 모습들을 지우고 싶기도 했고, 아이가 기억을 못 했으면, 바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내 감추고 싶던 순간들마저 다 나를 이루는 고유하고 소중한 나의 시간들이고 경험들이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그 시간들을 통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외국 땅'에서 '외국 남편'과 살며 '외국 시댁' 속에서 아이를 기르는 것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한국에서의 육아였다면 만나지 않았을 예상치 못한 난관들을 만나야 했고 헤쳐가야 했으며, 때론 '투쟁'에 가까운 시간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때마다 나도 성장판이 늘어나는 듯 뼈아픈 성장통을 느껴야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서의 육아'를 이야기할 때, 교육을 바라보는 이 곳의 시선과 관점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시스템은 무엇이 다르고 왜 좋은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괴물'이 되어버린 한국 교육 시스템에 절망한 사람들의 상대적인 갈증과 발견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아이를 기르면서 힘들었던 점 역시, 이 곳이 다른 곳이 아닌 '유럽'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기르며 힘들 때마다, 유럽이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었을까? 에 대한 의문이 항상 있었다. 내가 들려줄 이야기들은 바로 그것들이다. 유럽 땅에서 아이를 기르는 엄마의 '투쟁에 가까운 성장통' 


 남들처럼 자랑할만한 부지런한 노력맘도, 지혜롭고 빠릇빠릇한 척척맘도 못되었던 내게 최고의 행복이었던 만큼 커다란 고통이었던 육아.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아이와의 언쟁이 늘어가는 요즘이기에 현재 진행 중인 그 서툰 이야기들을 꺼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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