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된장요리를 해 먹을 때마다 보고픈 얼굴이 있었다. 마음이 추운 날들이면 된장국을 한 술 뜰 때마다 나를 더 포근이 안아주곤 했던 얼굴. 나의 고운 외할머니.
아흔이 다 되신 외할머니는 지금도 홀로 밭을 일구시며 직접 키우신 콩으로 여전히 메주를 쑤고 장을 만드신다. 그렇게 담근 장은 지금도 엄마네 이모네 외삼촌네는 물론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져 지금껏 우리 가족은 한 번도 된장 고추장을 따로 사 먹은 일이 없었다.
장류뿐만이 아니라 직접 재배하신 깨는 손수 다 볶아서 담아주시고 참기름까지 만들어 나눠주시는데 그것들은 외국에 사는 나에게까지 차례가 오곤 했기에 한국에 올 때마다 나는 매번 할머니표 장들과 참기름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곤 했다.
한인마트에 가면 웬만한 것들은 구할 수 있었지만 콩으로 된 식재료들이 GMO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알게 되면서 콩이 베이스인 장류만큼은 기성 상품을 아이에게 먹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외할머니 된장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된장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머니 장을 가져다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는 외국에 나가 살게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요 몇 년간 한국에 와도 이런저런 일들로 여유가 없어 할머님을 찾아뵙지 못했었다. 해서 이번에는 할머니 얼굴 보며 손도 잡아드리고 눈 마주하며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해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보고싶던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 담도 없는 허름한 시골집 문지방이 빼꼼히 열리더니 할머니가 버선발로 나오셨다. 많이 굽어진 허리와 불편하신 무릎 작아진 몸으로. "왔어"
고운 보라색 바지에 하늘하늘한 꽃무늬 블라우스 멋스러운 옥 목걸이를 한 채 백발을 곱게 빗어 넘긴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를 보자마자 나는 가슴이 뜨거워져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머니에게 늘 받기만 하였던 손녀가 할머니에게 맛있는 식사를 사드린다 하니 곱게 차려입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이렇게 고운 할머니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늘 몸빼바지를 허리춤까지 올려 입으신 채로 호미를 들고 밭으로 바쁘게 왔다 갔다 하시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이었기에. 그리고 늘 한결같은 할머니의 다정한 눈빛과 미소. 할머니는 그새 백발이 되어 계셨다. 내가 오랫동안 찾아뵙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할머니의 백발이 나를 더 울컥하게 하였다.
"할머니 너무 오랜만에 찾아뵈었죠. 죄송해요. 보고 싶었어요" 외할머니는 말없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셨다. "아가 많이 컸네. 쬐깐했었는디" 훌쩍 커버린 아이를 보며 할머니는 방실방실 웃으셨다.
"엄마 우리 감 먹을 수 있어?" 감을 좋아하는 아이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할머니 집 마당 감나무에서 감을 따먹은 기억이 좋았던지 다짜고짜 감을 찾았다. "감은 시방은 읎어야"
"할머니, 얘가 할머니 된장으로 끓인 된장국을 좋아해요. 된장으로 무친 것도 잘 먹고요. 할머니. 항상 고마워요" "이잉. 잘 묵은 게 좋지"
어릴 적 우리가 외갓집에 올 때면 할머니는 언제나 푸짐한 '시골밥상'을 한상 가득 차려놓곤 하셨다. 그 할머니 찬들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우리 형제들은 늘 경쟁하듯 밥을 두 그릇씩 먹곤 했었다. 그 밥상이 언제나 그립지만 오늘은 내가 할머님을 대접해드리는 날이다.
할머니가 고기를 잘 드신다는 얘기를 듣고 맛집들을 몇 개 찾아놓았었다. 가까운 읍내에 마침 맛있는 고깃집이 하나 있었다. "할머니 갈비랑 갈비탕 삼겹살 중에 뭐 드시고 싶으세요?" "생겹살"
할머니와 나란히 차 안에 앉아 고깃집으로 향하던 순간. 할머니는 바지춤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찾으셨고 이내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어 아이에게 건네주셨다. "맛난 거 사묵어"
주름이 꼿꼿이 잡힌 바지 밑으로 할머니 구두가 보였다. 커다란 리본이 달린 연노란 샌들. 그것은 데이트할 때나 신는 영락없는 '숙녀화'였다. 읍내 장터에서 사셨을 그 허름한 구두를 곱게 닦아 신고 오신 우리 할머니. 오늘 하루 할머니에게 예쁜 '꽃신'이 되어줄 그 구두가 너무 고와서, 그 구두를 신고 오신 할머님 마음이 느껴져서 또 울컥하였다.
"할머니 많이 드세요" "잉. 괴기가 맛나네"
돌판 위로 맛있는 생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졌고 잘 익은 김치와 마늘이 고기 밑으로 깔려있었다. 맛깔스러운 부추무침과 기름장 그리고 맛난 찬들과 보글보글 된장찌개. 할머니가 이렇게 고기를 잘 드시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고기가 맛있어서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고기를 즐기지 않는 데다 프랑스식으로 조리한 고기 요리가 입맛에 맞질 않아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며 살던 나도, 한국에만 오면 삼겹살이 어찌나 맛있는지. 정말 오랜만에 먹는 삼겹살이 꿀맛이라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이제 되았어" 할머니는 더 이상 드실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젓가락을 놓으셨다. 비록 내가 해드린 밥은 아니었지만 잘 드신 얼굴을 보니 마음이 참 좋았다. 그렇게 할머니를 다시 댁으로 모셔다 드렸다.
"할머니 이제 한 숨 푹 주무시고 쉬셔야죠" "있어바. 된장 좀 주까나?"
할머니는 커다란 플라스틱 주걱을 들고 마당 뒤쪽으로 가시더니 장독에서 된장을 한가득 퍼주셨다. 고추장 단지는 따로 싸놓으셨고 팥이랑 콩도 이미 페트병에 한가득 담아놓으셨다. 이어서 주섬주섬 호박과 가지 고추 몇 개를 밭에서 따주셨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또 올게요" "그랴"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할머니께서는 길목에 폭삭 쭈그려 앉으신 채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허리가 많이 굽으셔서 똑바로 서계시는 게 힘드시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를 혼자 두고 돌아서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그렇게 두세 걸음을 떼고 있을 때 할머니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아고. 이제 가면 은제 또 보까...."
나는 다시 뒤돌아서 할머니에게 갔다. "할머니...." 쪼그려 앉아계신 할머니를 살짝 들어서 꼭 안아드렸다. "할머니, 금방 또 뵈러 올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할머니를 바라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할머니 눈도 어느새 벌겋게 변해있었다. "어여 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할머니의 구두가 생각나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에게 하고 싶던 말을 다 하고 오지도 못했다. 그러니 내년에 꼭 다시 할머니를 뵈러 와 꼭 이 말들을 전해드려야겠다.
"할머니, 할머니 보니까 너무 좋아요" "할머니, 나는 세상에서 할머니 밥이 제일 맛있었어요" "할머니, 나는 지금도 할머니가 해주신 누룽지가 먹고 싶어요" "할머니, 내년에는 제가 할머니 구두 닦아 드릴게요"
"할머니 우리 할머니. 고마워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