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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May 26. 2024

'뉴노멀'을 맞이할 의료계

모든 것이 무너질 땐 결국 자신의 신념대로 갈 수밖에

#1

"2024년도 벌써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


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려고 보니 어쩐지 작년에도 똑같은 구절에 숫자만 바뀌어서 말했던 것 같다. 시간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무심하게 흐르는가 보다.


주식을 하다 보면 세상이 망할 것만 같은 하락도 지나고 보면 대세 상승 과정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일 뿐이었던 경험을 하곤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지나고 나서 보니 "그때 샀었어야 (팔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결론도 역시 "지나고 나서 보니" 나오는 것이고 오늘도 난 큰돈 버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고생만 하고 있다.


이런 얘기로 운을 띄우는 이유는 인생이라든지 세상 돌아가는 일도 주식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 대유행 때 대학병원에서 근무해서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그때 특별히 더 힘들었다 하소연하는 건 아니다. 그땐 전 세계 모두가 힘든 시기였으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종말이 올 것만 같았던 사회 분위기, 그리고 당시의 개고생조차 불과 몇 년 만에 잊히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2022년이 더 힘들었다. 일단 2022년 새해 축포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터뜨리더니 내 주식은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졌다. 코로나 시기 자산 폭등으로 '상대적 벼락 거지'가 될까 봐 하필 뒤늦게 주식에 합류한 나는 그야말로 매일 지옥의 새로운 층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의사면 무슨 월 천 버는 걸 개껌 정도로 쉽게 생각하는데, 내게는 소문만 무성한 환상의 급여였다. 인턴 1년, 전공의 4년, 공보의 3년, 전임의 N년을 월 ○○○을 받으며 개 같이 굴렀는데, 그렇게 안 먹고 안 써서 모은 피 같은 돈을 일면식도 없는 푸틴 놈이랑 파월 놈이 허망하게 불태웠다. 물론 설레는 마음으로 주식 매수 주문을 넣은 내 손가락을 탓해야겠지만.


이런 상황에 마침 옮긴 직장은 대학병원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대학병원은 급여는 박했지만, '큰 병원'에 속해 있다는 묘한 안정감이 장점이다. 병원에 큰 손해를 끼치는 환자도 치료하면서 어차피 내 돈 드는 거 아니니까 '오늘도 한 생명을 살렸군. 나란 의사, 참의사'라고 자부심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로컬 의원은 내가 받는 급여만큼의 값어치를 만들어줘야 하는 곳이다. 그렇지 못하면 당연히 잘리는 거고. 그 와중에 직원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 사회생활도 요구하는데, 내향적인 내겐 매우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요약하자면 강을 건너 도착한 곳은 전쟁터였고, 이게 아닌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배(보잘것없지만 그래도 10년 넘게 모은 내 자산)는 불타고 있는 것이 나의 2022년이었다. '의사가 되면 뭐 어떻게든 살긴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더는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앞으로 살날이 너무나 막막하게 길다는 게 두려워서 울었다. 학생 때 집에 압류 딱지가 붙었을 때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그랬는데, 지금 와선 러시아랑 우크라이나랑 아직도 전쟁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도 옅어지고 주식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있다. 그러니 뭐랄까 어떤 사건에 일희일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지는 것이다.


2024년은 좀 쉬어가고 싶었지만, 역시 그럴 리 없지. 이번엔 정부가 의사를 죽일 놈이라고 뚜드려 패고 있다.


#2

하고 싶은 얘기는 많으나, 이미 다른 분들이 잘 얘기하고 있다. 난 유나으리라는 의사 유튜버의 말에 공감하면서 챙겨보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거의 이분이 다 하고 있으며 나보다 말씀도 더 잘하신다.



한편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게 왜 사악한 건지는 빌런간호사님이 기막히게 잘 설명하였다.



#3

산부인과 의사 입장에서 현재 상황을 보면


1. 의사 수를 늘린다고 전국의 산모가 늘어나지 않는다.


2. 현재 부족하다고 난리 치는 분만 의사 수는 '수요-공급'에 따라 산모 수에 맞게 평형 상태를 이룬 것이다.


3. 아쉬운 점은 지역 분배인데, 그렇다고 1년에 분만 1건 할까 말까 하는 지역에 분만을 위해 분만 의사를 상시 배치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고 그렇게 일하려는 의사도 없다. 


4. 심지어 산부인과 의사 수는 산모의 수요보다 더 많아서 산부인과 의사도 먹고 살기 위해 분만을 안 하고 미용한다. 이것도 일종의 자연 평형인 셈.


5. 그러나 정부는 분만 의사 숫자가 적은 게 불만이다. 분만 인프라가 붕괴할 위험도 있으니 합리적인 고민이다.


6. 산부인과 의사는 분만 수가를 올려서 병원이 분만을 받는 게 '돈이 될 수' 있도록 하면 병원이 알아서 돈 벌어다 줄 분만 의사를 더 많이 모집할 거고 그걸 보고 산부인과에 지원하는 의사도 늘어날 거라고 말한다.


7. 하지만 정부는 돈 드는 방식이 싫다. 국민에게 돈 달라고 하기 부담스러우니까.


8. 정부는 의대 정원을 늘리자고 한다. 의대 학비는 개인 투자니까 정부는 돈 안 들고 생색내기 좋고. 의사를 늘리면 알아서 떨거지들이 낙수과로 가겠지?


9. 산모는 그대로. 분만 수가도 그대로. 병원이 굳이 지금도 의사 혼자서 잘하는 일을 둘이나 고용할 이유가 없다. 여기에 의사만 늘어나면 고용 불안정성만 증가한다.


10. 환자가 내는 돈은 똑같지만, 의사 급여만 나락으로 가니 병원만 좋다. 그냥 의사가 돈 버는 게 싫다는 사람도 좋겠지만...


11. 그걸 보고 젊은 의사들은 낙수과를 더 기피한다. 안 그래도 처우가 박한데, 고용 안정성마저 무너지니 쉽사리 할 수 없다.


12. 미용 의사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그쪽 의사도 어려워지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한의사까지 투여하고 있는데, 문제는 미용은 임신과 달리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시장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물론 예전 같지는 못해도 미용은 인간의 근본 욕망이 총집합된 엄청나게 큰 시장이고 새로운 기술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확장성이 있다. 한땐 '사람들이 미용해서 연애 많이 하면 출산도 많이 하겠지?'라는 헛된 희망도 잠깐 품긴 했지만, 연애한다고 결혼하는 거 아니고, 출산은 더욱 어려운 문제여서 분만 의사는 여전히 찬밥 신세이다. 아무튼 미용 의사는 여전히 분만 의사보다 좋은 직업이 될 것이고 한의사만 레이저 쏘고 노났다. 수험생 여러분 의대 증원 여부에 노심초사하지 마세요. 이젠 편하게 한의대 가면 됩니다. 어딜 가든 어차피 레이저 쏘는 건 똑같아요. 이젠 동의보감조차 언급하지 않더구먼.


13. 엄청난 계기로 산모가 폭등(=수요 증가)하거나, 분만 수가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다시 2부터 반복. 아니 의사 수를 이만큼이나 올렸는데, 여전히 부족하다잖니! 또 늘리자! 의사는 기득권 계층이잖아! 이제는 (?) 좀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지~ 뭐? 또 반대한다고? 얼마나 더 맞아야 정신 차릴래?


#4

그래서 유나으리님은 똑똑한 젊은 의사들이 필수과(낙수과)를 아예 포기하기 때문에 의료 붕괴가 필연적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예측대로만 흘러갈 수 있을지는 또 모를 일이다.


의사가 보기엔 지금 A라는 방식으로 B하게 하면 'A+B=C'가 되는 게 당연하고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 왜 C라는 최악의 결과로 가려고 하는지 속이 뒤집어질 것이다. 그게 젊은 의사들이 반발하는 이유이고.


그러나, 그건 '1+1=2'라고 생각하는 지극히 이과적 마인드일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인간의 시기, 질투, 욕망은 비합리적인 결정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A+B가 결국 C가 될 거라는 걸 정부는 알아도 D가 될 거라고 선동하며, 국민도 D가 되길 바란다. 결국 진짜 C가 되어버리더라도 그게 뭔 상관인가? 정부에겐 "의새들이 그렇게 C가 될 거라고 했지만, 결국 D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포장할 힘이 있다. 국민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D가 되었다니까 되었나보다 생각하며 그렇게 '뉴노멀'이 되는 것이다.


#5

의대 정원은 확정되었고 대법원 상고는 큰 기대를 안 한다.


정부는 "또" 이겼고 '뉴노멀'을 만든다. 그러고도 정부는 의사에게 계속 져왔다고 약한 척하며 의사를 여전히 기득권 의새로 취급할 것이다. 지난 승리도 패배도 의외로 쉽게 잊히곤 하니깐.


그래서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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