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0
ChatGPT 지브리 이미지 생성의 냉혹한 결과물 덕분에 노화, 나아가 죽음에 대한 여러 잡생각이 들어 나열해 본다.
#1
동료 과장님은 나보다 최소 10살 이상 많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자식 농사를 시작하여 지금은 다 대학을 보냈다. 부모로서 어느 정도 할 만큼은 다 했달까?
그래서 요즘 마음이 뭔가 허전하신지 대체 뭔 얘기를 나누다가 거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대충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남성 호르몬이 젊었을 때 여기저기 씨를 뿌리도록 하고, 늙으면 자식들 밥까지 축내지 않도록 (여자보다) 빨리 죽게 설계된 게 자연의 섭리인 듯하다"
비단 리비도뿐 아니라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는 말씀이었다.
#2
예전에 공모전 응모한다고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건 둘째 치고 요즘은 텔로미어만으로 노화를 극복한다는 개념 자체가 구식이 되었다.
노화는 텔로미어뿐만 아니라 DNA 자체를 읽고 쓰고 복제하는 생체 시스템이 마모되어 생긴다고 한다. 말하자면 '총체적 난국'이다. 무슨 문제점 하나 해결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단순하게 텔로미어만 복구하면 통제를 벗어나 증식하는 세포가 생기고 그걸 우린 다른 말로 '암'이라고 부른다.
까닥 잘못하면 암 되는 것만 피하면 텔로미어 가지고 어찌어찌 비벼서 불로불사를 이룰 수 있을 거란 환상은 진즉 깨진 지 오래고, 요즘 추세는 '어떻게 하면 노화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을 수 있을까'에 주목한다나 뭐라나. 여기서 새삼스러우면서도 중요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현재로선) 무슨 방법을 써도 우린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인생의 결론은 정해져 있다는 것. 따라서 과정을 잘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잘 죽을 수 있도록.
#3
따라서 의학의 유행도 한정된 인생을 최대한 생생하게 살다 가는 방법에 주목하는 듯하다. '죽음'은 인류가 극복해야 할 궁극적인 질환임은 여전하나, 이상적인 목표에 가깝다. 대신 '노화'가 치료 대상이 된 것이다. 노화를 죽음으로 가는 과정으로 본다면 이를 치료하겠다는 건 변형된 '제논의 역설'을 떠오르게 한다.
제논의 역설. 나보다 앞서 기어가는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역설이다. 내가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도달할 시간 동안 거북이는 조금이라도 기어서 내 앞에 있고, 또 내가 그만큼 도달하면 거북이는 좀 더 앞에 있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노화가 젊음과 죽음의 사이에 있다면, 노화를 한없이 미룬다면 죽음에 도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요즘 30대는 옛날 20대와 비슷하다고 하지 않는가? 모 보험회사 광고는 이제 지금 나이에 0.8을 곱해서 생각하자고 했다 (얼마나 보험료를 더 뽑아먹고 보장을 미루려는 생각인 건지). 물론 그만큼 죽음도 뒤로 미뤄지긴 했다.
그러나 죽음이 정해져 있는 운명이라면 결국 노화를 미루고 미뤄도 젊음과 노화, 죽음이 어느 한 지점에 수렴하는 순간이 올 것 같다. 그게 당장 내일일 거로 생각하진 않아도 언젠가는 온다는 건 우린 경험상 알고 있지 않은가.
#4
#3에서 말한 의료계의 유행 말인데, 그래서 요즘 환자(?)들은 병에 걸린 뒤 병원에 가는 게 아니라 병에 걸리기 전부터 병원에 간다. '미용'이라든지, '검진'이라든지, '영양제'라든지 하는 게 그거다. 어라 이거 돈독 오른 의사들이 너도나도 한다는 아이템 아닌가!
맞다. 근데 이거 자체는 선진국에서도 보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다만 '생명에 직결(?)되지 않은 치료에 돈을 쓰는 게 합리적이냐?'라고 질문할 수 있겠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소비자들이 이미 하고 있다. 인간은 노화를 피하고 젊음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최신 의학은 그걸 '치료'한다.
그래서 정부가 정책 편의주의적으로 의료를 필수니, 비필수니 구분하는 거 말인데, 현장에서 '의료를 파는' 공급자 입장에서 보면 탁상행정 하다가 잠꼬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필수 의료를 망쳐놓은 책임을 언제까지 비필수 의료 탓으로 돌릴는지... (난 필수 중 필수인 산과 의사인데, 하... 할말많않 ㅠㅠ)
#5
여기저기 주워들은 기억에 따르면 (출처 불명 죄송) 오래 사는 생물은 자손의 수가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심각한 저출산 문제와 N포세대의 원인 중 하나는 의외로 사람들의 수명이 늘어나서 그런 것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여러 원인 중 하나로서.
어릴 때 우연히 보고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던 영화 중 하나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1994)'다.
영원한 젊음을 사는 괴물을 당시 '젊은' 브레드 피트와 톰 크루즈가 연기했는데,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환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영화 속 주인공은 영생을 저주라고 했지만, 이래서야 설득력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나도 뱀파이어가 되어 영생을 사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아무튼 위의 가설을 보고 문득 그 영화가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뱀파이어는 생식으로 자손을 만들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오래 사는 생물(?)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결국 사망에 매우 취약해지는 영화 속 묘사가 지금 와서 보니 생물학적으로도 흥미롭네.
(또 생각나는 대로 맘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