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1.1.3. ‘단편’으로서의 텍스트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벤야민의 <베를린 유년시절>은 이처럼 도대체 어떤 것이 소위 벤야민 자신이 원했던 '최종판'인지, 벤야민은 이 글들을 몇 꼭지로, 그리고 어떤 순서로 배치하려 했는지 전해져 있지 않은 텍스트이다. 우리가 어떤 작품 - 그것이 문학이건, 미술이건, 음악이건 간에 - 이 최소한 그를 만든 창작자가 만족할 만큼 그의 의도가 완전하게 성취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베를린 유년시절>은 완성되어 있지 않은 미완성의 단편 Fragment 이다.
그런데 벤야민에 대한 최근 연구서에서 Davide Giuriato는 <Mikrographien. Zu einer Poetologie des Schreibens in Walter Benjamins Kindheitserinnerungen (1932-1939)> Wilhelm Fink 2006에서 <유년시절>의 이러한 파편적인 텍스트의 형식 그 자체를 벤야민의 사상과의 내적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다시 말해 그는 <유년시절>이라는 텍스트의 그 물질적 존재방식을 어떤 문학작품의 "완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함의하고 있는 미학적 전제들 - '그를 완성이라고 선언하는 작가의 의도', 작가의 주관적 의식에 따라 이루어진 '최종본'이 '진정한 작품'이라고 보는 등 - 을 거부하고 오히려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것들의 일정한 Konstellation 속에서 드러나는 사태 자체의 의미에 착목하였던 벤야민의 철학/미학적 사고와 관련시킨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유년시절>의 미완성성과 파편성은 “전기적인 이유도, 사회역사적인 이유도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거의 연구되어 오지 못했던 시학적 poetologische 근거들”에서 찾아야 한다.
이후 벤야민의 ‘진리’ 개념 - ‘인식비판적 서설’에서 가장 분명한 형태로 등장하는 - 과 관련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실지로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크다. 벤야민에게, 최소한 벤야민이 기획했던 사상 내에서는 글을 쓴 저자의 '의도'나 계획'이 완전하게 실현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작품이라는 생각은 낯설다. 오히려 벤야민에게서 중요한 것은 저자의 의도나 입장이 작품 속에 얼마나 구현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대상이, 나아가 이념이, 얼마나 스스로 드러나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벤야민이 마틴 부버가 주관하는 잡지 <피조물>에 실은 글 "모스크바"라는 글에 대해 썼던 다음 편지글의 문장만을 인용해보기로 하자.
"제 서술은 모든 이론들에서 거리를 취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바라건대 창조적인 것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모스크바 일기, 23쪽)
여기서 ‘창조적인 것’이라고 이야기된 것은 <인식비판적 서설>에 가면 ‘이념 Idee'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벤야민에게서 이념은 주체가 ’파악‘한 대상 혹은 객체의 표상이 아니다. 이념은 주체의 의도나 주관적 표상과는 무관한 ‘객관적인 것’으로 ‘세계의 그림 Bild der Welt'을 그 속에 함축하고 있다. 이념은 개별적인 별들이 모여 만들어진 ‘별자리 Sternbilder’ 처럼, 사물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그 사물들로부터 나온 그림 Bild 이다. 진리는 “이념들로 이루어져 있는 의도가 없는 존재”이며, 그것은 “인식 속에서 주체가 의미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철학의 과제는 모나드적 성격을 갖는,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Vorgegebenes, 그런 점에서 ’객관적인‘ 이념 Idee 의 ’드러냄 Darstellung' 이며, 이념들 자체가 사물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별자리 같은 것인 한, 그 이념의 드러남은 주체에 의해 주관적으로 규정되고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자체의 일정한 Anordnung, Konstellation 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어쩌면 <베를린 유년시절>이라는 텍스트가 가지는 파편적 성격은 그 자체로 벤야민의 진리관에 잘 들어맞는다. 개별적인 짧은 글들이, 정해져 있는 순서도 없이, 저자의 의도에 따라 마련된 순서 없이, 각각 개별 종이에 쓰여진 채로 거기 그렇게 있다. 그것들 - 개별 꼭지들 - 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모으고, 조합해 읽는가에 따라 그것은 그때마다 서로 다른 ‘이념’을, 다양한 함의들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 글들을 벤야민의 사상에서 중요한 ‘기억’, ‘역사, ’미메시스‘, ’경험‘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배치해서 읽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