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0번째 글
요즘 나는 어쩌면 허무주의에 빠진걸지도 모르겠다. 요즘엔 뭘해도 신나지가 않고 재미가 없다. 침몰하는 배에 멍하니 앉아있는 느낌이다. 겨울의 끝자락은 원래 이리도 우울한 법인가.
내가 겨울을 싫어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추운걸 제일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픈 추억이 많은 계절이라서 그런것도 있다. 내 생일을 기준으로 나도 겨울에 태어난, 겨울에 축복받아 세상을 마주한 한 명의 인간이지만 운명은 마치 영화 시나리오처럼 겨울에 나를 유독 힘들게 한다.
블로그에 4,100번째 카운트를 기념하는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도대체 이 글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혼란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33년을 살면서 나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시간을 걸어온 것 같다. 매번 나는 강해야했고 완벽해야했고 빈틈이 있어서는 안되었으며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한편으로 모르는게 없고 못하는게 없는, 만물박사에 다재다능한 인간이길 바랬고 그렇게 비춰지길 원했다. 되돌아보면 그때마다 나는 항상 어떤 가면을 쓰고 소심하고 우울한 표정을 숨긴채 살아갔으니 이건 연기나 연출이었지, 나의 진솔한 본모습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본모습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나를 상대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다며 자위했지만 그건 남들보다 조금 더 이해한다는, 상대적인 것이지 결코 객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너무 많은걸 바라고 살았던걸까? 지금 내 상태는 번아웃일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번아웃된다. 불나방처럼 앞만보고 달렸기 때문에 이따금 모든게 하얗게 불타 없어져버린듯한 느낌이다. 책은 덮으면 멈추고 영화는 엔딩크레딧 이후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 보이진 않아도 멈춤화면일 것이다. 그러다 책을 다시 펴면 멈춰있던 인물이 다시 살아 움직이며 이야기는 이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삶은 좋으나 싫으나 계속 진행된다. 멈추는 법이 없다. 시간은 가는데 나만 멈춰선다면 나는 시간이라는 개념과 동떨어진, 시간을 초월했고 시간을 잘 활용한다며 악착같이 움직였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틀에서 이탈해버린 인간이 되어버린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라는 책이 내가 지금껏 읽었던 책들 중 최고의 책인 이유도 어쩌면 책 내용과 내 관점들이 비슷해서 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주어지는 어떤 자격이라고해도 소수의 누군가에겐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대단한 인물을 존경하는 한편으로 그를 시기한다. 대단했던 인물이 몰락하는 과정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스토리텔링이다. 그러니까 내가 10을 가지고 있고 대단한 인물이 100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처럼 100을 가지는것보다 그 사람이 나처럼 10으로 떨어지는게 감정적으로 더 희열적이라는 말이다. 누군가가 번아웃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그래프 위에 서 있다는 이야기다. 실패의 전초다. 모든게 무너지는 재난 영화 감독의 연출처럼 말이다.
번아웃이 누구에게도 올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게 굳이 나에게 오지 말란법도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약한 모습을 숨기고 강한 모습을 내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번아웃을 경험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하룻밤, 아니면 며칠 정도 쉬면 다시 원상복귀 될 것이지만 그건 잠깐의 마취제이고 언젠가는 또 번아웃을 당하게 된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죽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야하는가? 그저 즐기고 놀고 먹고 마시고 해도 어지간하면 굶어죽진 않는다.
의욕이 없고 매사에 피곤한 시기다. 그래도 약속이 있고 뭔가를 해야할 의무가 짊어져 있다. 어느새 이렇게 어깨가 무거워졌을까?
단순히 피곤한것과 번아웃은 다르다. 일이 미친듯이 많아서 밤새도록 일을 해도 뿌듯한 날이 있고 뭔가 가슴벅찬 성취감이 있을 때가 있는 반면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데 머리만 복잡하고 셀프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 심지어 꼭 해야만 하는 일도 못하는 날도 있다.
번아웃을 방지하려면 적당한 휴식과 수면, 규칙적인 식사, 안정적인 심리 상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나는 그런 환경에서 살고있지 않으므로 번아웃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 같다. 번아웃은 가능하면 피하는게 좋다. 그래도 이렇게 글이라도 쓰니 조금, 아주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