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레이차트 감독론을 시작하며
나는 켈리 레이차트(레이카트로 불리기도 한다)의 영화 세계를 <어떤 여자들>이란 영화로 처음 마주했다. 그렇다. 마주했다란 말이 정확하다. 영화를 해석을 위한 텍스트로 여기던 시절, 부끄럽지만 그의 영화는 아무런 감흥도 던져주지 못했다. 당시 내게 영화란 단지 서사 안에 던져진 인물의 심리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하거나 특정 정파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느냐의 여부가 중요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나는 단순히 영화에 작동하는 윤리체계를 마치 심판대에 올려놓고 파수꾼 행세를 했다. (내 브런치에 작성된 대부분의 글들은 이런 양식에 따라 작성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시기에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가 찾아왔다.
<어떤 여자들>은 적잖이 당혹스러운 영화였다. 몬태나 주 평원의 광활한 사막과 이곳을 살아가는 네 여자의 무표정한 표정만이 기억에 남을 뿐. 서사를 다시 이야기하거나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분석하는 시도는 직관적으로 이 영화의 전부를 담지 못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떤 여자들>의 풍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 그보다 레이차트는 왜 인물의 얼굴을 바라보던 중 느닷없이 바깥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는가에 관해서 물어보고싶다.
영화 속 풍경은 카메라에 담긴 장소의 이미지다. 풍경은 곧 있는 그대로를 담는 카메라의 기능적인 면과 시선의 주체가 결정하는 위치에 담긴 주관적 면모가 충돌하며 빚어지는 형상이다. 영국의 사학자이자 미술사학자로 잘 알려진 사이먼 샤마는 그의 저서인 <풍경과 기억>(1995)에서 "풍경은 자연이기 이전에 문화이며, 숲과 물과 바위에 투사된 심상의 산물이다"라고 주장한다. 다른 감독들의 영화보다 나는 레이차트의 영화를 볼 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이차트 의 영화 속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사이먼 샤마의 말을 떠올린다. 사막 한가운데를 지나치며 느껴지는 적막함과 쓸쓸함. 마침내 당도해 마주한 한 그루 나무의 오뚝한 형상에 압도당한 경험과 (<믹의 지름길>) 일상으로부터 잠시 도피한 두 사내가 캠핑을 떠난 다음 날 아침, 함께 목욕을 할 때 갑작스레 개입하는 아침 이슬의 이미지로부터 에로스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올드조이>와 마찬가지로,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들이 전해준 감각적인 체험은 풍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럼 왜 켈리 레이차트가 우리 시대에 훌륭한 영화를 찍는 감독인가 라는 물음에 아직 명쾌한 답을 내리긴 어렵다. 이 연재는 그래서 그의 영화 속 풍경을 훑음으로써 그의 미학적 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한 개인적이고 사소한 시도다. 더불어 이렇게 답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의 카메라가 막다른 골목에서도 끝내 산책자의 시선으로 움직인다는 데에 큰 호의를 갖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영화감독들을 떠올렸을 때 뉴욕을 배경으로 속도감 있고 가차 없는 미국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는 감독에 샤프디 형제가 있다. 그리고 정 반대의 속도로 진행하는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가 있다. 보수적인 미국 오리건 주라는 장소를 비롯해 서부 개척지를 이동하고자 하는 여성의 몸(<믹의 지름길>) 과 더불어 친애하는 개와 함께 오리건 주를 넘어 알래스카로 향하는 여정(<웬디와 루시>)은 막다른 길에 다다를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가능성을 모색하는 영화적 시도다.
당장은 산책을 도모하는 레이차트의 단상들을 영화로 시도하는 저항 성격을 지닌 카메라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상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의 미학적 가치를 폄하하는 것 같다. 지겨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영화란 자본과 개인의 의지가 부딪혀 탄생하는 긴장이 물화한 것이 다름 아니다. 스펙터클의 한 복판에서 레이차트의 영화들은 느리지만 그 가운데서도 풍경을 돌아보고 자본주의의 이면을 들춘다. 그런 의미로 그의 영화 세계를 탐색하는 건 내게도 하나의 모험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