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는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2013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어둠 속에서> 2013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속 자연물은 그것이 세트 위에 세워진 인위적인 풍광이건 아니건 간에 언제나 영화 안으로 전부 포섭되지 않는 잉여의 감정을 남긴다는 데 의의가 있다. 보이는 것만으로는 끝내 다 이야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영화 속 풍경에 대해 말한다는 건 보이지 않는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어둠 속에서>를 서두로 두고 싶은 까닭은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연결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의 명징한 주제는 레이차트의 영화 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전에 <어둠 속에서>라는 영화에 관해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른 영화들 중에서도 국내에 비교적 덜 알려진 이 영화는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 궤적을 따라갈 때 서사의 비중이 비교적 높은 영화로 받아들여진다. 그건 아무래도 에코-테러리즘과 살인 사건이 연속해서 출현하는 영화라는 데 근거를 둔다. 이 작품엔 급진적인 환경운동가 3명 조시, 다나, 하몬이란 인물 셋이 등장한다. 각기 다른 이유로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환경 파괴를 막는다는 목적 아래 저마다 필사적이다. 이들은 모두가 잠든 사이 수력댐 폭파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이 과정에 무고한 시민 한 명이 사망하고 셋은 윤리적 문제에 봉착한다.


조시와 하몬은 희생자의 죽음을 묵인하려 하는데 다나는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다나는 자신의 죄를 털어놓기로 결심하지만 이를 막기 위해 찾아간 조시에 의해 불운한 죽음을 맞는다. 다나를 살해하고 도주한 조시는 초점을 잃고 캠핑 매장을 배회하는데, 조시의 얼굴이 매장 거울에 비친 순간 그의 얼굴엔 길 잃은 짐승의 표정이 깃들어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대의를 위해 뭉친 그들이었지만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고 종국엔 길을 잃었다. 길 잃은 연대에게 더 이상 가능성이란 존재하는지를 묻는 비관적인 이야기가 바로 <어둠 속에서>다.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는 이야기가 밀도가 높을수록 되려 영화가 활력을 잃는 편이다. 죄의식과 침묵, 자본의 폐해라는 주제가 보다 직접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설명 불가능한 지점이 매력적이던 그의 세계가 쉽게 정치적으로 읽힐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전경들은 여전히 영화 속 화면 자체를 초월한 형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영화 중반부 조시 일행이 보트를 타고 댐 한가운 데로 들어가는 장면이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댐 주변 캠핑장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 카메라는 이들 중 한 캠핑카의 내부로 들어가 TV 속에 상영되고 있는 코미디 쇼 화면과 자동차 창밖에 위치한 조시 일행과 캠핑 객들을 오래 지켜본다. 이후 물살을 가르고 지나가는 보트에 탄 조시 일행은 강 한 구석에 우뚝 솟아난 수목림과 마주한다. 태양빛을 머금은 나무들이 연속해서 등장하는 이 순간은 카메라에 비친 자연물이란 대상이 반대로 감상자를 목도하고 있다는 다소 섬뜩한 감정을 전해준다.


단순히 나무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형성하는 기괴한 리듬. 이후 벌어지는 사태를 고민했을 때 조시 일행의 공모를 목격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연 그 자체라는 결론으로 이끌린다. 침묵하고 있지만 침묵하지 않은 자연의 소리를 들은 건 다나뿐 인 것인가. 어떤 의미로도 환원되지 않는 지형이라 하기에 <어둠 속에서>의 풍경들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 <어둠 속에서>에서 볼 수 있듯 레이차트 영화 속에 등장하는 풍경은 단순히 조망하는 경탄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걸 보고 있는 일종의 감시자다. 이 야행의 목격담을 거쳐 우리는 죄책감을 안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다나가 가장 윤리적인 이었음을 안다. (어쩌면) 연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사이를 잇는 개인의 몸부림만이 조용히 어둠 사이에 빛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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