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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un 10. 2020

작은 유토피아?

에리카 발섬

 


  자가격리 시대에, 나는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할리우드 고전 영화로 눈을 돌렸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2003년작 <삶의 설계>를 다시 보며 다음 문장을 적었다. " 철학자들이 지적했듯, 연약함이란 진리의 발밑에 존재하는 바나나 껍질과 다름없다" 만약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지고 싶지 않다면, 나는 이렇게 얘기하면서 시작하겠다. 지난 몇 달 동안 온라인에 스트리밍된 수 많은 영상 작업들이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고.


  영화관과 예술 공간들이 무기한 폐쇄되면서 영화제는 황급히 (온라인 영화제 형식의) 가상판을 편성했으며, 기관이나 상업 갤러리 역시 시간 제한을 기반으로 한 선별 형태의 온라인 프로그램을 개시하며 그들의 가시성(혹은 존재의미)를 위태롭게 지탱해오고 있다.  무빙-이미지 수집의 대가 중 한명인 줄리아 스토첵은 2022년 베를린 전시 공간에 공개하기로 한 15시간 분량 68개 이상의 작품들을 자신의 웹사이트에 공개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영상 작업물의 온라인 전시가 새로운 건 아니다. 큐레이션한 한 작품을 2주 동안 보여주는 Vdrome.org은 2013년에 시작되었고, 케네스 골드스미스의 UbuWeb에 2002년부터 비디오 파일의 첨부하는 방식이 진보적인 단계로 취급받으면서, 허가받지 않은 형태로 배포되는 방식은 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허나 전세계적인 전염병의 대유행이 본격적으로 (온라인 전시의) 문을 열었다. 온라인 아트페어들에 "관람실"이란 농담을 던지긴 쉽지만 다른 매체들과 다르게 재현 가능성과 물질성과의 관계 때문에 무빙-이미지는 쉽게 온라인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가디언지 조차 "비디오 아트"가 "접근 가능하며 독창적이고 기이한 문화에 굶주린 새로운 관객들을 찾아내고 있다"고 선언했다.


 스토첵은 자신의 수집품들을 온라인에 공개하기로 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영화와 영상 작업물들이 시초부터 예술가와 관람자에 제한을 두지 않은 민주적 매체였다는 역사적 맥락을 언급한다. 실제로 1960년대와 70년대 예술가들의 활동에 영상 이미지작업이 주는 매력은 진귀함으로부터의 탈피였다. 이탈리아의 미술 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게르마노 셀란트는 2012년 폰다지오네 프라다, 베네치아란 동명의 이름을 한 카탈로그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예술 작품의 무제한적인 제작과 민주적인 배포에 대한 욕망을 "작은 유토피아"라 선언함과 동시에 20세기 미술의 반-역사가 될 것을 제안했다. 셀란트에게 이 유토피아의 신격화는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에 복합적인 유행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 주장을 뒷받침할 충분한 근거는 후에 자신의 작품이 널리 유통을 희망했던 예술가들의 필름과 비디오 보급이 광범위하게 발전했던 유통 인프라에 있었다. 디지털 보급의 수용은 이 작은 유토피아의 제언을 재점화한다. 즉, 적어도 합법적인 채널에서는 1990년대 이후부터 다소 메마른, 한정판 모델의 인공적인 진귀함으로  인해 영상 이미지는 희소성이 전제된 예술 시장에 더 잘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계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저작권으로부터 안전하며 안락한 집에서 훌륭한 예술작품에 대한 열린 접근은 마치 꿈결처럼 들린다. 나는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의 단편 프로그램 일환으로 제공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루스 베일리의 <올 마이 라이프> (1966)로 돌아가 가장 완벽한 3분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베를린 아스날 영화 협회에서 격주로 번갈아가며 올리는 영화와 영상예술도 열정적으로 따랐다. 나는 어나더 가이즈가 마련한 지난 4월 13일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영화 감독을 추모하는 화상 행사에 앞서 사라 말도로르의 단편들을 봤다. 나는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 영화제 경쟁작들을 봤고 최근에 설립된 중남미 예술 플랫폼 코리엔테스도 눈여겨 봤다.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여겼을 즈음, 런던의 케이트 맥거리 갤러리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는데, 무시무시한 단편 영화감독 존 스미스의 신작이 인스타그램에 초연되었고 일주일 간 감상이 가능하단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클릭했다. three-minute Twice (2020) 란 제목의 영화에서 스미스는 손을 씻으며 거울 앞에 서있는 채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마이너 키로 두 번 불렀다. 마치 장승곡 같았다. 다음 컷엔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올바르게 대응하자는 대중 연설 장면이 등장했다. 이와 다르게 그는 말했다" 우리 사회 대부분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평소대로 우리 사업을 진행해야한다"고. 감독 존 스미스는 "영국의 COVID-19 관련 사망자 수가 2만5천명에 달했던 6주 동안의 락다운이 벌어졌던 런던에서, 메이드 인 런던"이라는 타이틀로 끝을 맺는다. 대단히 경제적인 의미와 함께 스미스는 그의 영국 정부가 행해온 10년간의 긴축재정으로 국민건강보험과 사회 서비스가 파괴된 것을 고발하며 건조한 유머로 재단하며 격노한다. 오늘날 통치자들은 취약한 사람들을 거부한 채 나머지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미스의 영화는 얼마나 간결하고 시의적절하며 온라인 전시에 딱 들어맞는 영화다.


 이론적인면과 실질적인 측면에 있어서 이 (온라인 상영과 같은)새로운 국면은 분명 긍적적이다. 그런데 이게 왜 나에게 스트레스를 가져다 줄까? 끝없는 연결고리들이 확실히 과잉을 느끼게 한다. 이는 단순히 훌륭한 영화가 너무 많은데 비해 시간이 너무 적다는 의미보다 더 중요한 문재가 지금 존재한다. 인터넷이 고화질 스트리밍 서비스를 지원한 이래로, 그것은 화질에 대한 우려를 가라앉히며 히토 슈틸의 "나쁜 이미지"를 역사적 개념으로 바꾸었다. 게다가 온라인에 상영되는 작품들에게 매겨진 상업적인 가치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티스트들과 기관들은 이같은 (온라인 행사)를 삼가왔다. 올 봄에 찾아온 위기들은 디지털 프로그램화를 위한 필요 조건을 제공했지만, 우리의 새로운 환경에서도 과거 세계에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데 있어 우리를 머뭇거리게 했던 이유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지금은 어쩔 수 없는 타협이 더 많아졌을 뿐이다.


 "스트리밍"이라는 단어는 문제 해결을 위한 힌트를 던져준다. 온라인에 제공된 영상 이미지 작업들은 차별화되지 않는 끝없는 "콘텐츠"의 폭포 속으로 빨려들어갈 위험을 안고 있다. 예술가들이 택한 짧은 러닝타임의 작품들은 디지털 정보의 빠른 흐름에 맞춘 것이지만 그들이 팝업 광고나 틱톡과 같은 상대와 경쟁할 때 이 작품들이 납작해질 가능성이 있다. 인터넷 화면으로 보여지는 영상 이미지 작업들은  스크린의 크기나 위치, 빛의 보정과 집단 감상 경험과 같은 고유한 의도적인 맥락에 담긴 특수성이 사라진다. '이런 손해는 온라인에 공개된 작업물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지점들이다. ' 라며 영화 평론가인 A.S Hamrah가 괜히 언급한 게 아니다. 주류 영화에 관해 비평하는 Hamrah는 그의 2018년 출간한 책 제목은 "The Earth Dies Streaming"에 '하지만 그들은 예술 영화와 비디오에 의존한다. 컴퓨터 화면 스크린으로 온전히 옮겨질 수 없는 시공간의 조정에 과하게 의존한다. 어떤 작품들은 이런 (스트리밍 서비스)에 도약할 때 상대적으로 나빠질 것이다. 하지만 위태로운 건 특정 종류의 미적경험의 불과하다' 즉 그건 향수도 아니며 소중하게 여기는 엘리트주의도 아니다.


 여기엔 경제적인 이면이 있다. 스트리밍 사업은 상업 영화나 수익성 좋은 영화관 계약과는 상당히 다르며 놀랄 일도 아니다. 1973년 홀리스 프램튼은 뉴욕의 현대 미술 박물관에 그들이 제시한 회고전에 대한 화답 편지를 썼는데, 영화 제작자들은 "사랑과 영예만으론 지속할 수 없다"고 썼다. 불행하게도 반 세기동안 거의 달라진 게 없다. 다행히도 예외가 있긴 하지만 예술가들은 온라인에 무료로 작품을 게재한 대가로 "가시성"이란 가짜 화폐를 받으면서 희귀성이 증가하는 시기가 온다.


 스트리밍으로 상영하는 현재의 긴급조치가 2020년 봄이 되면 사라질 거대한 홍수인가 아니면 여전히 잔존할 것인가. 나는 가능한 빨리 온라인 프로그램을 포기한 영화제를 비난하는 누군가를 상상할 수 없다. 갤러리나 기관에 있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만약 그들이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한 노력이 문화적 민주화에 대한 헌신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졌더라면, 그런 온라인 서비스는 개장 후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지면, 예술가와 큐레이터들에게 적절한 보수를 주고, 적은 수고로도 얻을 수 있는 점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며, 온라인 상황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을 선정하여 지각 빈곤을 완화하기 위해 앞서 선정한 작품을 발표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스토첵은 결국 자신의 소장품 860여 점의 모든 작품을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런 시도는 몇 가지 문제를 가져올 것이다. 그가 수집한 작품 상당수는 설치 구성 요소 또는 다중 스크린을 포함한다. 각 작가들과, 그리고 아마도 같은 작품의 판본을 가지고 있는 다른 컬렉션들과도 허락을 얻기 위해 협상이 필요할 것이다. 이 때문에 저작권 침해는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허가받은 스트리밍 계획은 지금까지의 희소성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보여지는 창으로 의존해왔다. 스토섹의 의도는 그녀의 컬렉션을 영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무빙 이미지 예술의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학생들이 수업 중에 참고할 작품들이 부족함을 자주 한탄해 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 자원의 가능성에 대해 흥분한다. 허나 나는 또한 스트리밍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1차적인 것으로 의도된 프레젠테이션 형식에 유용한 대응이지만  궁극적으론  2차 컨텍스트와의 결정적인 구분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한다. 그것이 마치 그림의 구별과 그 그림을 다룬  엽서처럼 빗대는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스토섹의 발표와 달리, "시청각적 요소로 인해, 시간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아트가 컴퓨터, 태블릿 또는 스마트폰으로 시청하도록 설계돼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장치만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우스꽝스럽게 우선적인 포맷과 부차적인 포맷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스트리밍의 가장 독창적인 예시들 중 하나로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화요일 오후 8시에 매주 방영하는 @preservinsinious Instagram 계정의 "Remains to Streaming"이다. 태평양. (다른 시간대에 계신 분들께도 다행스럽게,  방송 후 며칠 동안 볼 수 있다.) 실험영화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로스앤젤레스 아카데미 필름 아카이브의 마크 토스카노의 애견 프로젝트다. 토스카노는 더 이상 에코 파크 필름센터에서   "Remains to Streaming"을 상영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아파트에 16mm 영화를 상영하는 라이브 스트리밍을 시작하게 되었다. 5월 13일 아침, 나의 작은 아이폰 화면은바바라 해머와 크리스 랭던의 희귀작을 보여주었다. 영화의 사운드 트랙은 프로젝터의 달그락 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영화가 틀어지는 동안 토스카노가 상냥하게 수다를 떨며 디테일한 일화를 제시하고 (인스타 라이브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댓글에 화답했다. 그것은 극적 투영과 거리를 둔 경험이었고 광화학 물질과 소셜 미디어의 데이터 흐름의 이상한 만남이었다. 그것은 모든 최고의 상영이 그렇듯이 열정과 공동체의 문제였다. 나는 그 상영의 사랑스러움과 부족함을 좋아했다. 영화관에서 친구들과 같은 영화를 보는 것을 얼마나 고대했고 사랑했는지.




위 글은 아래 링크로 첨부한 에리카 발섬의 에세이를 부족한 영어실려과 번역기에 의존해 번역한 글입니다. 의역과 비문과 오탈자 많아요...


https://www.art-agenda.com/features/334094/a-small-utopia-artists-film-and-video-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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