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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Nov 11. 2018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살면서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살인사건>
이창동 감독의 <버닝>

 잔혹 살인 사건들의 보도가 유달리 눈에 밟히는 지금, 이상하게도 두 편의 영화  <고령가 살인사건>과 <버닝>의 결말들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다. 전자엔 빗발치는 폭력의 기호들에 전염됐다 싶은 한 소년이 있었고 <버닝>엔 끊임 없이 불행을 감내해야만 하는 자에게 주어진 최후의 도구로써 칼이 쥐어졌다는 점에 그렇다.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는 사건들은 스크린 속 세상이 아닌 현실 자체다. 불안과 폭력의 징후들은 우리 사회 전반에 깊이 내재돼 있다. 


 ‘강서구 PC방 살인사건’과 ‘거제 살인사건’처럼 잔혹하지만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인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주류 언론들은 살해동기를 우울증이나 피해자의 과실, 살인에 관한 단순 호기심을 제목으로 삼아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범행 수단을 자세히 묘사하는 점 또한 예외는 아니다. ‘불친절해서 살인’과 같은 자극적인 보도 내용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해자를 향한 분노와 비난으로만 사건을 소비하도록 한다.

      

 그런데 정말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 끔찍한 행위의 원인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 순간 살인이란 행위가 납득될만한 폭력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반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폭력은 더 이상 한 가지 요인이나 개인의 일탈로 설명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도 도처에 존재하는 폭력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 차마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 이제 그 반대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음을 숙고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면서 또한 가해자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다고 말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살인 사건의 폭력들은 인지 과정을 넘어선 충동적인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생 에릭과 딜런은 900여발의 총알을 난사해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와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영화화 되기도 했던 ‘콜롬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이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됐으며 또 살해원인을 분석하고자 연구 논문과 기사들이 수천 건 작성 됐다. 사실 나는 수 많은 작품과 텍스트들이 단 한 사람의 진실한 고백보다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사건 당사자인 딜런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가 펴낸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란 책 앞에서 말이다.  

    

 가해자 딜런은 부족함 없는 가정환경과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사건이 있기 전까지 특별한 사고나 문제한 번 일으킨 적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니 수 클리볼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일을 감수해야만 했다. 뚜렷한 이유 없이 하루아침에 괴물이 된 아들을 이해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와 신경의학자들을 만나 조언을 얻고, 다른 가해자 에릭의 부모를 만나기도 했다. 또한 딜런이 평소 어떤 학생이었는지 학교로부터 자문을 구했으며 자신이 추억하는 딜런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사실 이 초인적인 행위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살인자가 돼버린 아들을 이해하기 위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설이 있다. 이 과정을 거쳐 그가 깨달은 사실은 사건이 있기 전까지 딜런이 보낸 우울증과 신경 불안의 징후들을 자신이 미처 인지하지 못했단 점이고, 미국 사회 속 위태로운 개인들이 얼마나 쉽게 총기를 구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오늘날 불안 증세를 겪는 누구라도 할 수만 있다면 손 쉽게 딜런의 자리로 갈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진단은 오늘날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총기 난사사건을 보며 너무나 유효했다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살인의 동기를 수 클리볼드의 사례로만 판단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유념할 사실은 ‘왜’에서 멈추지 않고 ‘어떻게’로 나아간 클리볼드의 판단에 있다. 남겨진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가해자를 향한 비난만이 아니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이 잔인한 폭력의 주체가 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누구나 우울과 불안으로 인해 자기 파괴의 충동을 지닐 수 있다. 이 욕구는 스스로에게만 향하는 바를 넘어 타인에게로 향한다는 점이 요지다. 그런 불안정한 개인이 쉽게 칼이 쥐고 돌아다닐 수 있는 사회라면 과연 그 책임을 응당 가해자에게만 돌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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