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짓>
일찍이 많은 평자들이 언급했듯 이 유려하고 아름다운 영화가 한 편의 영화로 성립하는 방식은 기묘하다. ‘유대인 탄압’, ‘인종 청소’ 처럼 특정 시대를 환유하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영화 속 배경엔 현대식 자동차와 도르트문트 축구클럽에 관한 언급 등 명료하게 시간 배경이 현재를 지시하는 말과 이미지가 출현한다. 반면에 라디오와 자동차를 제외하곤 기계 문명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도 함께한다. 게오르그를 쫓는 무장경찰은 언제나 그를 지나치거나 허술한 모습을 자주 노출한다. 사진 한 장이면 식별 가능한 바이델이라는 유명 작가의 얼굴을 멕시코 총 영사가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 또한 의아한 사례인 건 마찬가지다.
이런 긴박한 상황 한 가운데 이 영화는 도피의 일상을 집중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낭만과 무드를 엿보는 데 시간을 들인다. 가까스로 경찰을 따돌린 게오르그가 한 커플이 키스하는 순간을 우연히 마주하게 된 순간을 비롯해, 마리와 게오르그, 리차드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은밀한 연애의 순간 또한 앞서 이야기한 폭력적인 시대 배경이 지니는 힘들을 누그러뜨리는 일종의 해방적 시공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트랜짓>은 서사를 지탱하는 논증의 구멍을 제쳐놓고, 혹은 무시하더라도 영화에 자리잡은 긴장과 무드가 이를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로 성립하도록 하는 기이한 사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트랜짓>의 영화적 무드를 성립하게 하는가 묻는다면 그건 내러티브를 포기해서라도 도주자끼리 마주하는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고자 하는 이 영화의 선택과 결단에 있어 보인다. 이런 면에서 <트랜짓>의 무드는 왕가위의 <화양연화>와도 닮아있다. 마리가 헤어진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게오르그의 등을 여러 번 터치하는 순간이나 추방자들이 자신의 여정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모습, 부당하게 경찰에 잡혀가는 사람을 외면한 채 부끄러움 때문에 서로를 끝내 응시하지 못하는 호텔 안의 적나라한 사람들의 표정까지 <트랜짓>은 도망자 간의 교류의 반복으로 성립하는 영화이자 서로의 자리를 유랑하는 잠깐의 마주침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만남의 반복들이 끝내 유령이 되어 우리 눈 앞에 나타난 마리의 환영을 거짓이라 단언할 수 없는 근거가 된 건 아닐까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