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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현 Oct 23. 2017

백수일기 15화

편 가르기 대한민국

   요즘 식당, 카페에서 'No kids Zone'을 운영하는 곳이 늘고 있다. 저출산 국가로 나라에서는 각종 출산 장려 정책을 펴고 있으나, 아이를 가진 부모가 갈 곳은 줄어들고 있다. 왜 'No kids Zone'이 생겼을까? 여기에 '맘충'이란 신조어가 등장한다. 어린 자녀를 핑계로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엄마들을 비하하는 말이다. 식당을 뛰어다니고,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 그리고 그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부모.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고, 경험해 봤을 일이다. 2012년 국물녀 사건, 그리고 최근 240번 버스 사건까지 자녀를 제대로 훈육하지 않아 엄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일이 많아지자 'No kids Zone'을 운영하여 사전에 문제를 막으려 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부모의 잘못된 교육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No kids Zone'의 찬반 양상을 보면 자녀른 가진 부모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날 선 대립이 눈에 띈다. 상대편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다른 문제들과 참 닮았다. 금수저, 흙수저, 남혐, 여혐, 종북, 꼰대 등 대립적인 신조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좌와 우, 남과 여, 부와 가난, 이러한 차이를 이유로 편을 가르고, 적대적인 감정을 표출하여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관용이 부족한 건 아닐까? 물론 모든 문제의 원인이 하나만 존재하진 않겠지만, 우리는 분명 차이를 인정함에 있어 매우 인색하다. 한 예로 예전 어르신들은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하셨다. 왼손잡이였던 나는 어려서 바른손으로 밥 먹어야지, 글씨 써야지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남들과 다른 손을 사용하는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했다. 우리의 왼손이 잘못한 것 없이 틀린 손이 되었다. 그 덕에 지금은 양손잡이가 되긴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이후엔 교복과 두발 단속으로 강력히 통제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들과 다른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암시를 받으며 자랐다. 성인이 된 이후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다른 개성을 표현하고 싶어 하면서도 유행을 찾는다. 혼자만 튀면 손가락질받을까 걱정하며, 적당한 유행따라 남들과 비슷하게 다르고 싶어 한다. 직장에선 여전히 와이셔츠에 타이. 복장 자율이었던 전 회사에서 롤업 팬츠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출근했다가 "소풍 왔냐?"란 핀잔도 들었다. 내규가 자율복장인데, 남들은 다 정장 입는데 왜 혼자 튀냐는 것이다. 이렇게나 우리는 차이를 이해할 줄 모른다. 가정, 학교, 문화와 사회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교육을 하는데 개인이 폭넓은 관용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Tolerance


   수능 언어영역의 문제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문제였는데, 정작 작가는 그 문제에 오답을 제시했다. 작가도 모르는 작가의 의도가 있나 싶은 웃픈 상황이다. 우리는 교육부가 정해놓은 모범 답안을 사유 없이 외우고 시험지에 쏟아내는 교육을 받았다. 유시민 작가는 본인의 저서 <<표현의 기술>>에서 '예술작품은 해석의 자유를 온전하게 열어 둡니다. 시인이 하려고 한 말과 독자가 들은 말이 완전히 달라도 괜찮습니다. 그게 오히려 정상입니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글일수록 평론가들은 더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합니다. 그럴수록 더  많은 연구논문과 비평이 나옵니다.'라고 말한다. 시험 점수로 줄 세우는 것에 용이해서인지 폭넓게 생각하고 다양하게 표현해야 할 문제도 정해진 답안을 찾는 효율성에 치우친 교육을 강제받았다. 다양한 시각을 갖지 못하고,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고, 다름을 틀림으로 배워온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잊었다.


 

Diversity


   편 가르기는 단순히 이해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정치권의 편 가르기는 '바르게 다스리는' 일에는 소홀하고 각 당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국민의 삶을 힘들게 한다. 직장 내 편 가르기는 기업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게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대립은 동기부여를 떨어뜨려 성장 동력을 잃게 한다. 이렇듯 편 가르기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즉, 다름에 대한 배척이 단순한 문제가 아닌 나와 우리의 삶에 불편함을 초례하게 되는 것이다. 편협한 사고는 실질적인 문제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개성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앞서 말한 문제를 해결할 씨앗이다. 오늘부터 한 걸음씩 가정과 교육, 사회적 분위기가 편 가르기와 편협함에서 멀어져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로 걸어 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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