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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섬 Feb 04. 2020

버티는 삶에 관하여

About Enduring Life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中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던 적이 있었다. 어딘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고 싶고, 세상에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래서 둔해지는 법을 배웠다. 내가 느끼는 모든 슬픔에 둔감해지는 법을 말이다. 슬픔을 너무 받아들여버린 부작용 탓일까, 내 안에서의 행복의 기준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사진 찍을 때 억지로 미소 짓는 것이 어색해졌다. 행복을 연기하기 싫어서? 아니, 사실 대체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모르겠다. 

내 부모님은 칭찬에 인색한 편이셨다. 나는 그래서인지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인내하고, 슬픔이나 아픔을 덜 느끼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거나 마취시켰다. 나는 그렇게 자랐다. 하지만 당신들이 가끔 해주시는 칭찬이 정말로 진심에서 나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고, 동시에 표현의 과묵함 속에 딸려오는 진정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말도 있지 않는가. 매일 누구에게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사랑'과, 그렇지 않고 일주일 한 달을 끙끙 앓으며 고민하고 나서야 나지막이 사랑한다고 겨우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사랑'은 엄연히 무게가 다르다는 말. 나는 인색한 부모님의 칭찬에 아주 섭섭했던 적은 있어도, 한 순간도 결코 부모님께 감사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SNS에서는 타인의 일상이 박제되어 있다. 희한하게도 우리는 남들의 행복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남들의 감정 기복에서 최고의 순간들에 올라온 상황을 보고 내 감정 기복의 최저점과 비교하곤 한다. 남들에게 차있는 것들에게서 내게서 비어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애써 행복하지 않을 이유들을 나열하려 한다. 월요일이면 월요병이고, 다음 주면 개강이고, 나만 외롭고... 등등의 것을 말이다. 이러한 메시지들은 주로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에서부터 전달되곤 한다. 그들에게는 소비자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켜 어떠한 행동으로 옮겨지도록 하는 수단이겠지만, 때때로 나는 그것들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옆에서 한 마디씩만 해도 신경 쓰이는 마당에, 눈에 띌 때마다 내가 불행해야 될 이유들에 대해서 언급하니, 도저히 우울하지 않고 배길수가 없다. 

나 역시 내 안에 비어있는 것들에 대해서 아주 잘 느끼고 있다. 감정이 미적지근하고 흐릿해진 이후의 내 세계의 일부분은 항상 비어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빈 부분에 대해 더 이상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비어있는 것에서부터 행복을 느끼고자 한다. 마치 부모님의 인색한 칭찬에서 오히려 진정성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듯이. 배고픔이 있어 배부름의 행복을 알고, 추위가 있기에 따뜻함의 행복을 알듯이. 내가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수단은 약간의 결핍이다. 상처든 결핍이든 짊어지고 나아가도록 하자. 짐이 없을 수는 없다.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게 인생이니까. 내려놓기 위해서는 나아가야 한다. 서로의 짐을 바꿔지게 될지언정, 더 이상 스스로에게만 내려놓지는 말자. 내 안의 공백을 인정하고 그만큼 더 채워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자. 부디 행복하되, 조금은 부족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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