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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섬 Jan 16. 2021

평행선

Parallel Lines

사람은 변할까. 변한다면 무엇이, 그리고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람이 자라온 환경은 그 사람의 성격, 습관과 같은 중요한 요소들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 내가 이렇게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은 건 어렸을 적 칭찬에 인색했던 가족의 분위기 때문이라던가, 그런 식으로 말이야."


민호가 투덜대듯 말했다. 그의 표정은 범우주적인 법칙과도 같은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현자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재준이가 막 술잔을 비우고 말했다.


"그럼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뭐야.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있고, 뉴스나 방송 매체를 보면 그 숫자가 극단적으로 적지는 않은 거 같던데. 너무 지나치게 환경 탓하는 거 아니야?"


듣자 하니 그럴싸한 말에 나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 사람들도 자세히 알아보면 환경적으로 위기에 극복할 수 있는 성격이 형성된 케이스라고 봐야지. 부모님이 교육 방침을 통해 도전적인 성격이 형성되도록 만들었거나, 어렸을 적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에서 교훈을 얻고 감화되거나, 주변 누군가와의 교류를 통해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성격이 되었다던가.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확률에 대한 이야기야.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옛날 말이 된 것처럼, 재준이 네가 본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TV나 매체를 통해서 접할 만큼 드물다는 시점으로 봐야지. 매일 일어나는 사건 같은걸 매체에서 보도해주진 않잖아? 요즘은 어렵게 자란 사람들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환경적 요소가 그걸 더 어렵게 만드는 거고."


민호는 재준이의 반론을 예상했다는 듯이 줄줄 말했다.

그의 표정은 같은 주제에서 이 정도의 반론은 충분히 많은 사람에게 받아봤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야, 그렇다고 성공한 모든 사람들이 부유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아니잖아. 네 말대로라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가난을 극복해내고 성공하는 일은 확률적이니까 내가 그러한 환경에 있기를 바라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소리 같은데. 그거 너무 운명론적일뿐더러 본인의 인생을 너무 타인이나 외부 환경이 주도하도록 책임 전가하는 거 아니야?"


재준이가 질렸다는 듯이 쏘아대며 말했다.


"완전히, 백 퍼센트 환경이 나를 결정한다는 말은 아니야. 그냥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거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사람과 당장 오늘 끼니를 어떻게 때워야 할지를 고민하는 사람의 마음속의 여유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 그 여유에서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래퍼의 가사에도 이런 말이 있거든. 3만 원 있는 사람이 마신 소주는 불쌍하고 3억 있는 사람이 마신 소주는 겸손해라는 가사가."


어느덧 우리 세 명의 근처에는 꽤 많은 수의 소주병이 놓여있었고, 살짝 풀린 눈의 민호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남 탓 환경 탓만 하면서 살 거야. 민호야. 넌 좋은 사람이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그런 생각들이 네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거야. 아니, 어쩌면 힘든 환경이 너를 그런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었을까? 아니야. 네가 말한 성공으로 가는 그 '확률'은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 배 수십 배도 될 수 있다고. 제발 탈출구 없는 생각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친구로서 하는 충고야."


어느덧 심각해진 이야기에 나는 그만 끼어들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술 때문에 격해져서 하는 말일까. 서로의 마음속에 있던 솔직한 얘기들일까.


"네가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는 것도 솔직히 우습다. 너 대학 학자금 걱정해본 적이나 있어? 부모님 직장에서 다 나온다며. 나는 개강할 때마다 무서웠어.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의 피와 살덩어리 같은 등록금이 6개월마다 내 목을 졸라 오는 느낌이야. 너네 집 잘 산다며. 그러면서 나한테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제발 노력 좀 해라고 이야기하는 거, 그거 맞는 거야?"


어느덧 눈동자가 돌아온 민호가 신랄하게 말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리고 거기서 우리 집 이야기가 왜 나오는데? 잘 살면 얼마나 잘 산다고.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얼마 전에 아프셔서 직장 그만두신 것도 알고 있는 놈이... 진심으로 충고해줬더니 진짜 섭섭하고 짜증이 나네. 맨날 패배의식에 찌들어서 구시렁거리고나 있고, 그러니까 네가 번번이 시험 떨어지는 거 아니겠냐? 현실을 직시해라, 좀"


재준이는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끼어들어야 할 타이밍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저기... 얘들아. 싸우지 말고. 내가 들어보니까 너희 둘 말이 모두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환경이 사람의 성격 형성과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스스로가 가진 생각과 신념, 행동이 그 영향을 어느 정도 상쇄시킬 만큼 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희 둘 다 한 발자국씩 양보하고 서로 그만 물어뜯어. 종강기념으로 좋은 기분으로 모인 거 아니었냐고, 우리."


나름 잘 중재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쏟아져 나온 재준이의 말에 나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너도 항상 그런 태도가 문제야.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맨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거 같다면서 왜 이렇게 자기 의견이 없냐? 회색분자같이... 너도 그러다가 토론 교양수업에서 교수님한테 호되게 혼나고 학점도 망했잖아, 너. 에이 짜증 나. 내가 먹은 몫만큼은 계산하고 먼저 갈 테니까, 니들은 더 먹고 가든지 말든지."


재준이는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더니 서둘러 계산하고 짜증이 가득한 발걸음으로 술집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너무나 급박하게 변해버린 우리들의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민호를 쳐다보았지만 민호는 나랑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야, 저 새끼 원래 저래. 다혈질이라니까. 지 할 말만 하고 짜증 나니까 확 가버리는 거 하루 이틀 보냐. 어려움이 없이 자라서 그래. 제 맘대로 안 되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거지. 일단 오늘은 쫑났으니까, 계산하고 나가자."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민호를 따라 계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민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어느 인터넷 공간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우리 사이는 평행선처럼, 평생 접점 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그렇게 끝날 운명이었다.'


과연 그런가? 민호와 재준이는 평행선 같은 친구들일까? 이내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접점이 없었다면 친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1도씩만 기울었어도 그 둘은 또 다른 접점에 도달했을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1도를 만들어내는 건 무엇일까?

기울이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서로를 향해 굽히는 게 어렵다면,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각자의 환경인가 그 사람 그 자체인가?

사람은 변할까? 변한다면 무엇이, 그리고 얼마나 변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가 평행선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한데 모아놓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걸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느덧 집에 도착한 나는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웠다.

그 이후의 기억은 더 이상 나지 않고, 그날 나는 극심한 숙취에 한참을 자고 나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Photo by Octavian A Tudos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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