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전 _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
단풍이 절정이던 가을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덕수궁을 방문했다.
시청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만날 수 있는 덕수궁은 자주 갔던 경복궁, 광화문 광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날씨가 추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바로 옆이 시청 앞 광장이라 그랬을까 덕수궁의 첫인상은 왠지 모르게 차가웠다.
높은 빌딩들로 둘러싸인 덕수궁은 이른 아침부터 견학을 온 학생들과 즐겁게 사진 찍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입장료는 성인(만 25세 이상) 기준 단돈 1,000원, 이미 만 25세를 넘긴 나와 덕수궁 원정대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티켓을 샀다.
대한문을 지나 덕수궁으로 들어서니 빨갛게 물든 단풍이 나를 반겼다. 덕수궁의 첫인상이 차가웠다는 말은 취소다. 그 정도로 단풍이 예뻤다. 발아래로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낙엽길을 따라 걸으니 아침 공기만큼이나 차가웠던 마음이 금세 녹아버렸다.
*중화전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한 까닭에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는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한 품계석이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 출처 : 덕수궁 홈페이지
중화전 뒤로 보이는 높은 빌딩들이 이질적이다. 과거 우리 조상님들은 궁 주변으로 저렇게 높은 빌딩들이 들어설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중화전으로 향하면서 왕이 걷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마치 내가 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대한제국 당시로 치면 나는 상민이었으려나?
(아, 신분제가 폐지돼도 신분에 얽매이는 인생이라니...)
중화전을 둘러보다가 화려한 단청이 잘 드러난 처마를 찍었다.
예전부터 옛날 건물을 보게 되면 처마에 먼저 눈길이 갔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를 일이다.
세월과 함께 나이 든 중화전을 지나 발길을 돌렸다.
덕수궁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라고 들어서 작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주요 전각(문을 포함해)만 무려 13개나 된다.
발걸음을 여기저기로 옮기다 보면 단체 관광객들,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 여행을 온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
고종이 가배를 마셨던 정관헌...?
정관헌의 모습은 그야말로 독특하다. 문이 없기 때문에 마치 신전을 떠오르게 하는 이 건물은 고종이 가배차(커피)를 즐기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나는 얼마 전까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빠져있는데 드라마에 등장하는 고종은 가배(커피)를 즐겨마신다. 아까 언급한 것처럼 고종이 정관헌에서 가배를 즐겼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정관헌은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이하 생략) - 출처 : 덕수궁 홈페이지
덕수궁 홈페이지에 정관헌은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라고 설명돼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지식백과에는 '고종이 정관헌에서 다과를 즐겼고 외교사절단 맞이를 위한 연회 장소로도 이용했다.'라고 등록돼 있다.
최근까지 덕수궁에서 고종이 마신 가배차를 주제로 다양한 행사도 진행됐으니 고종이 정관헌에서 다과를 즐겼다는 건 아예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실록에 공식적으로 고종이 우리나라 최초로 가배차를 마셨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으니 나머지 상상은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정관헌은 연회를 즐기기 좋은 장소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으로 치면 핫한 파티가 열리는 공간처럼 오픈돼 있으니 시대를 앞서간 대한제국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는 기록에 남은 것들만 사실로 기록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기록된 것들 그리고 합리적인 추정과 가설들이다. 그렇지만 나는 역사에도 상상력이 발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말처럼 기록된 역사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상이 필요하다. 그래야 역사를 토대로 한 다양한 창작물들이 빛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터무니없는 국수주의만 아니라면 다양한 상상은 영감을 주고 그 영감은 미스터 션샤인처럼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로 창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던 정관헌을 뒤로하고 햇살 듬뿍 비치는 소나무 숲을 지나 석조전으로 향했다.
: 돌로 지은 궁
옛 궁궐 양식과 대비되는 석조전은 덕수궁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이다. 단청과 추녀 뒤로 보이는 석조전이 낯설지만 꽤나 잘 어울린다.
석조전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건립을 계획하여 1900년에 착공, 1910년에 준공되었다.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내부에는 접견실과 대식당, 침실, 서재 등을 갖춘 건축물이다.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건립되었으나, 1933년 이후에는 미술관, 국제회의장,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훼손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석조전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재탄생시켰다. 국립고궁박물관과 창덕궁에서 보관하고 있던 당시 가구들을 원래 자리에 배치하여 황궁의 생활사를 재현하였으며, 재현이 어려운 공간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 출처 : 석조전 안내 팸플릿
덕수궁의 하이라이트는 석조전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석조전 관람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전에 석조전 해설사 인솔 관람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석조전 1,2층은 인터넷으로 사전 신청해야만 관람할 수 있다. 인터넷 신청을 하면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석조전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데 심지어 무료다.
석조전은 덕수궁에서 가장 돋보였다. 신고전주의 양식이라 그런지 그리스 로마 신전을 연상시키는 기둥과 문양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준공될 당시 얼마나 화려한 건물이었을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석조전에 들어가면 우선 예약자인지 확인한 후 실내화로 갈아 신고 입장하게 된다.
석조전의 로비라고 할 수 있는 중앙홀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인솔 관람을 신청한 사람들이 많았다. 관람 시작 전에 중앙홀을 사진에 담았다.
예약했던 시간 정각에 해설사 인솔 관람이 시작됐다. 중앙홀부터 간단한 소개들이 이어졌다. 무려 100년이 넘은 당시의 테이블부터 석조전 내부 곳곳의 장식, 배치된 가구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대한제국과 석조전이 걸어온 길을 따라 걸었다.
석조전은 고종의 재위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 아니며 고종 생전에 잠시 동안 활용되었지만 황실의 궁궐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됐고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다.
- 출처 : 덕수궁 홈페이지
몰랐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알아가며 2층으로 향했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무려 석조전 준공 당시 그대로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대한제국 시대로 타임리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2층에서는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와 황제와 황후의 침실, 욕실 및 서재를 볼 수 있다.
황제와 황후의 침실 같은 경우에는 고증 자료가 없어서 석조전에 황실 가구를 납품했던 영국 메이플사의 카탈로그를 참고해 재현했다고 한다.
황제 침실을 둘러보고 2층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덕수궁 맞은편에는 분수대가 자리하고 그 옆으로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은 단연 좋았다. 조금 더 머물고 싶었지만 인솔 관람이다 보니 잠깐 동안 사진을 찍고 해설을 들은 후에 다시 실내로 들어왔다.
2층 관람을 끝내고 1층으로 돌아왔다. 석조전 내부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졌는데 뜯어진 벽면을 그대로 전시해둔 공간이 있어서 꽤나 흥미로웠다.
: 예쁜 사진을 남기기 좋은 대식당.
석조전 내부에서 제일 예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진 찍기 좋은 장소가 바로 대식당이었다. 식당 테이블에 다양한 종류의 접시와 컵들이 정갈하게 정리돼 있는데 물론 대한제국 당시에 사용하던 것들은 아니다. 그래도 이 접시와 컵들 모두 당시 고증을 어느 정도 거쳐서 전시된 것이라고 하니 그 당시의 분위기가 조금은 묻어 있지 않을까.
대식당까지 둘러보고 해설사 분의 마지막 이야기와 인사를 끝으로 관람을 마쳤다.
석조전 관람은 생각보다 더 좋았다.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속적인 관람을 위해서는 지금처럼 예약을 통해 인원을 제한하며 운영하는 게 맞다고 본다.
석조전 지층에는 전시실이 따로 마련돼 있다. 지층의 경우 자유 관람이 가능하니 석조전 사전 예약을 하지 않은 분들은 여기라도 들러보길 추천한다.
+
덕수궁에 처음 방문했는데 생각보다 볼거리도 다양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도 많았다. 서울에 있는 고궁 중에 아직 가보지 않은 곳들도 있는데 덕수궁을 둘러보며 다른 궁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대한제국의 모습이 남아 있는 장소, 색다른 곳을 가고 싶은데 딱히 갈만한 곳이 없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덕수궁을 방문해보는 게 어떨까?
입장료 : 만 25세 이상 1,000원
석조전 관람 : 1,2층은 인터넷 예약제로 해설사 인솔 관람. 지층은 자유 관람(운영시간 : 09:00~18:00)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 전시에 따라 관람료 변동(매주 월요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