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능가사
005. 마음이 편해지는 길 - 강릉 능가사 / 온형근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법당
야트막한 언덕 뒷밭으로 민가 담장을 끼고 올라서니 솔개가 움집을 짓고 살만한 아늑한 공간이 열린다. 삼면의 급한 경사를 지닌 산들이 법당을 에워싸고 있다. 이런 공간에서의 첫 느낌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 1학년에게 느낄 수 있는 단정함을 넘어선 단아함이다. 그랬다. 능가사는 단아했다.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고 이번에는 좌선이 아닌 입선으로 서서 명상에 몰입했다. 내가 정호가 되어 서 있었다. 내가 정호를 찾는 게 아니라 정호가 정호를 찾았다. 법당 문고리를 채우던 Y자형 새총 같은 막대기가 반들반들 반짝거리며 빛을 낸다. 나무 재질에서 매끄러운 촉감이 손바닥을 통하여 가슴으로 전해진다. 이내 이 공간에 서 있는 모든 객체가 부드러워진다. 나도 입매무새를 바로 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한다. 법당 앞 잔디는 겨울 흙의 들었다 놨다를 견디고 있고, 단 아래 마당은 잘 다듬은 모래사장처럼 잔돌들이 이리저리 모난 부분을 부딪치면서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모든 예술의 완성은 사람됨이다.
고암 갤러리는 법관 스님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이다. 생전 처음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이내 첫 번째 절에서 만류하여 일 배로 마쳤지만, 내 생애 스님과 맞닥뜨려 절을 주고받는 일은 처음이었다. 불법 근처에서 떠돌기만 했다. 스님 어깨 위에 걸린 만공스님의 글씨 가산소거迦山小居가 아주 잘 어울려 있다. 사실 맨 처음 내 눈이 머문 곳은 다유구덕茶有九德이었다. 내용 전에 글씨와 그림이 그리고 여백이나 색감 모두가 앉으면서 눈길을 끌었다. 자세히 보니 대둔사 응송 스님의 글씨다. 정말 예스럽다. 뇌와 귀, 눈과 소화, 술과 갈증, 피로와 잠, 추위와 더위에 차가 함께 한다. 한 잔의 차에서 한 조각의 마음이 나오고, 한 조각 마음은 또한 한 잔의 차 안에 담겼다는 말 그대로 스님의 예술론은 차 한 잔에서 시작되고 이어졌다. 글씨도 그림도, 시도, 소설도, 음악도, 연극, 영화 등 이 세상에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모든 행위의 지향점은 사람됨이라 했다. 사람됨을 잃고서 예술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단정이 소박하지만 강한 울림으로 닿는다. 같은 생각이다.
욕심이 뼛조각처럼 희어진다는 것은
모자라고 바보스럽다는 말이다. 뭔가 되고자 함이 욕이라면 그 욕을 어찌 없앨 수 있을까. 살면서 하고자 함과 되고자 함, 그렇게 해야 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는 지금도 그러운 욕을 끌어올려 한 해를 준비하고 한 해의 시작을 다듬고, 그래서 다시 자신을 연마하고 채찍질하는 게 아닌가. 어쩌라는 말일까. 욕심을 어찌 잠재울까. 조금 모자라고 어딘가 완성되지 않은 비워짐 같은 안목에 기댈 일이다. 안목밖에 다른 게 없다. 세상과 인생과 예술을 바라보는 안목을 조금씩 찬찬히 모자라지고 부족해지고 관심에서 멀어지는 세상살이로 치환하는 게다. 조금씩 찬찬히 나간다. 금방 되지 않겠지만 나아간다. 볼 줄 알면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사리라는 게 뭔가. 모든 게 비워지고 더깨가 닦여져 마지막에 남는 희디 흰 뼛조각 아니겠는가. 마음을 희게 하여 내 안의 뼛조각만 능가사 법당 문고리 채움 나무처럼 반짝이고 싶다. 모자라고 바보스러운 내가 얼마나 더 모자라고 바보스러워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능가사를 다녀오고 나서 생긴 병통이다.
(2014.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