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숲을 뚫고

왜, 서로를 서로라고 하지 않나.

by 온형근

부소산성의 아침은 분주하다


저린 언저리 잠깐 쉬는거야. 걷는 게 아니라고. 신기하게 복자기나무와 이팝나무가 많다. 복자기나무는 군창지 주변에서 잘 자랐다. 문화재사업소 광장에서 생활체육 에어로빅은 어디나처럼 활기차다. 많은 날들이 에어로빅으로 은혜로웠으면, 하늘과 땅에 고하는 혈류 왕성한 고백의 시간.

곳곳 가을길 장치이더라


끝 마르며 자람이 더딘 단풍나무의 잎도 서두른다. 버틸만한 에너지는 소멸되었다. 이른 단풍으로 추워 보인다. 큰나무 곁에 심은 복자기나무는 나무젓가락이다. 숫자 채우기에 공조하였겠으나 세월 지나 훌쩍 떠나간 옛 사랑 아쉽듯이, 햇살을 가렸으니 서로에게 서로가 되지 못한 묵언의 야멸찬 외면이었으리. 외면처럼 차고 못된 게 있으랴. 오석 깎아 앉게 만든 돌벤치에 앉는다. 엉덩이로 뼈까지 지르는 한기에 정신이 오롯하다. 오래 앉아 있는 게 수양이라.

언덕 얕아 보폭도 정중하다


부소산성의 사비루 알현을 회곡점으로 삼는다. 운동 나온 이들의 다리 찢는 왕성한 육신의 기능에 늘 놀란다. 저들이 하는 것 중 따라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걷는 단정함이 다이다. 단정하게 걷다 보면 생각도 보드라워진다. 고란사 신형 산타페가 놓여진 자리에 없다. 사비루는 모든 것을 알고 있겠다. 백마강 삼천궁녀 이후로 사비를 둘러싼 산맥은 더더욱 울렁울렁 겹겹이 에워 싼 게 분명하다고. 아침 강물은 기지개 펴느라 잔잔하다. 도도한 금강의 줄기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언제나처럼 장하고 의젓하다.

배 고픈 상황 말고는 급한 게 없다


부소산성 정상에서 지하수로 입을 적신다. 산성을 걷고자 나섰건만 정확하게 길의 경로를 그을 수가 없다. 고란사 눈길로 읍하고 소나무 숲 언덕에서 산성의 기운을 느낀다. 사람의 발길로 어루만진 흙길이 순정한 도타움으로 살갑다. 충분히 더 많이 머물러 소요한다.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판단한다. 그럼에도 붙잡는 일이 다가오면 모른 체 넘어간다. 받아 주는 게 배움이고 공부이다.

처음부터 이정표는 없었다


길은 사람의 마음에 나 있다. 해서 마음이 지나가고, 스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은 나 있다. 길에는 비슷한 사람의 마음이 배어 있다. 그의 마음과 내 마음이, 내 마음과 너의 마음이 어디쯤에서 만났을까. 길은 안다. 어디에서 그들의 마음이 만났는지. 안타깝고 섭섭하며, 기쁘고 신났던 지점의 유전자가 길의 단단함이 된다. 처음부터 그들의 마음이 내어 준 것이라, 길은 온전히 길이 아니다. 길은 마음이 내다 놓은 바깥의 풍경이고, 마음은 길이 주워 담은 풍경으로 그득하다. 길과 마음은 서로에게 기대도록 내 준 담장이 있어 내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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