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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Mar 17. 2024

소박의 미학에 깃든 거문고 풍류

청주 백석정 원림

청주 백석정 원림 – 소박의 미학에 깃든 거문고 풍류     


조용하고 한적한 효심의 공간 미학     


시의 경지는 사람의 마음을 잡는 매력의 공간에서 떨치고 일어난다. 한국정원문화에서 수없이 싹트고 반복 재생되는 시의 창작 또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에서 비롯한다. 한국정원문화는 규모와 지형지물에 따라 감동의 결이 다르다. 공간의 규모와 분위기가 웅장하여 감복하기도 하지만, 아주 조용하고 한적하여 소박한 미학을 보여주어도 감읍한다. 웅장보다 소박이 주는 아름다움에 더 크게 감동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번 정원문화답사는 그러한 소박한 아름다움이 주는 누정을 찾았다. 아주 화려하거나 규모의 웅장함보다는 검소하면서도 수수한 시인의 공간이다. 청주 낭성면에 있는 백석정(白石亭)1)을 찾았다. 


매가 제비집에 깃들 듯 위태로우면서도 단단하게 안착한 백석정 전경 (2023.11.14.)

              

백석정은 조선 중기 신교(申灚, 1641~1703)가 36세인, 1677년(숙종 3년)에 건립하였다.  백옥과 같은 흰 바위 위에 푸른 이끼 쓸고 지은 정자이다. 세속을 멀리하며 자연과 어울리는 은일의 시경(詩境)을 펼친 곳이다. 대왕산(483.1m)을 배경에 두고 앞에는 잔잔한 시냇물이 흐르며 주변을 소요음영하기에 딱 좋은 장소성을 지녔다. 부친 신득홍(申得洪, 1608~1653)2)이 짓고자 염두에 둔 것을 아들이 완성하고 호까지 ‘백석정’이라 하였다. 11세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니, 아버지의 마음을 실천하는 데 사반세기인 25년이 걸린 셈이다. 유교적 명분에서 ‘인’과 ‘효’는 돌아가신 부모를 평온한 곳에 모시는 효심으로 드러난다. 효심은 이렇듯 일상생활의 우선순위에 드는 덕목이다. 이는 조선의 선비가 유교의 틀 안에서 ‘풍수’를 실천하는 동기이며 목적이기도 하다. 


부친이 ‘낮게 읊조리며 천천히 거닐며’ 미음완보(微吟緩步)하던 평온의 터에 정자를 지었다. ‘효심의 터잡기’이다. 정자 앞에는 감천이 흐르는데, 이를 지담(芷潭)이라 하였다. 지담은 자연에 발견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지(芷)는 순백한 물을 가리키고, 담(潭)은 웅덩이나 연못을 말한다. 부친 신득홍은 ‘지담’으로 자호하였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백석정기」에서 “마치 매가 제비집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골서연소鶻栖燕巢) 위태로우면서도 추락하지 않는(위이불추危而不墜)”다고 백석정의 입지 조건을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정자의 이름을 백석(白石)이라 한 것은 바위가 희기 때문이다. 바위는 본래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옛날에도 희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백석이란 명칭은 정자가 세워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정자가 세워지기 전에는 덩그러니 솟은 평평한 바위가 높은 손바닥 모양을 하고 있어 벌어진 꼭대기가 발을 붙일 만하였는데, 이는 조물주가 붙잡아 두고서 주인을 기다린 것이다. 지담(芝潭) 신공(申公)이 소요하다 우연히 이곳에 이르러 배회하고 음영하다가 말하기를, “이곳에 정자를 지을 만하다.” 하였는데, 지담공의 아들 주부공(主簿公)이 이어서 그 뜻을 이루고 마침내 백석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마치 매가 제비집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위태로우면서도 추락하지 않는 것이 묻지 않아도 신씨의 정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덩굴을 부여잡고 올라가 난간에 기대어 강을 굽어보고 덕분에 회포를 한 번 풀었던 것이 어느새 30년이나 되었는데 일찍이 마음속에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좋은 벗과의 이별에 비의할 만하였다. 청주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그 정자가 아무 탈이 없는지를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면 마음이 곧 기뻤다. 만일 비바람에 퇴화되었다거나 목동이나 나무꾼에게 훼손을 당해 좀 퇴락된 면이 없지 않다고 말하면, 문득 그 때문에 언짢았다.


-이익, 「백석정기」, 『성호전집』제 53권 '기', 한국고전종합DB.  

   

‘난간에 기대어 흐르는 물을 굽어보(凭欄俯流)’았던 이익의 탁월한 식견을 빌리면, 한국정원문화를 이루는 누정은 주인을 잘 만나야 제대로 빛을 발한다. 누정의 입지가 아무리 좋아도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풍경으로 드러나지 못한다. 공간은 사람을 만나야 제 뜻을 펼친다. 사람의 오감이 풍경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엔도르핀(endorphin)이 분비되는 경로의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 뇌가 세상을 이해하고 마음을 편하게 한다. 공기 중에 떠도는 정보가 손끝과 코끝, 피부에 닿는다. “사물이 주인을 만나고 만나지 못함이(物之遇不遇如是夫)” 세상 사람들에게 청주에 백석정이 ‘있고 없음’을 표상하는 것과 같다.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관계를 다루는 핵심 개념이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다. 표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추체험(追體驗, nacherleben)과 역지사지(易地思之, hineinversetzen)와 모방(模倣, nachbilden)이다. 한국정원문화의 재구성은 추체험으로서의 재구성을 이룬다. 누정에서 ‘빙란부류’는 추체험의 경관 요소로 대단히 중요한 경관 요소인 것이 분명하다.

     

맑고 청아한 지담에서의 거문고 풍류     


신교는 백석정을 지은 해에 가사 「백석정별곡」을 지었다. 그가 지은 여러 편의 시조와 가사는 산수 원림, 음악, 음주, 낚시 등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산수 원림에 대한 애착이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자연의 순환에서 뜻을 얻어 세상이 화평하고 즐거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반영한다.

      

신교는 본인 스스로 산수 원림에 대한 애착을 병이라 자인한다.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몹시 사랑하고 즐기는, 고질과도 같은 성벽(性癖)인 ‘연하고질(煙霞痼疾)’과 산수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 정도에 지나쳐 마치 불치의 고질과 같아 벼슬길에 나서지 않음을 이르는 말인 ‘천석고황(泉石膏肓)’이란 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산수 원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나친 사랑이 고질병으로 들어앉았다고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이는 17세기 후반, 당대의 사대부가 지녔던 산수 원림을 대하는 보편적 인식이다. 그럼에도 신교는 산수 원림을 직접 운영하면서 보다 다채로운 서술을 구사하는 의미 있는 작품을 자신만의 결로 창작한다. 신교의 가사 작품은 「백석정별곡」과 「임경정별곡」 2편, 시조 22수가 있다. 또한 백석정을 노래한 한시가 신교의 3편을 포함하여 당대 문인의 40여편이 전한다. 시조 중 「귀산음」은 2023년 고2 모의고사에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男兒 生世하ᆞ야 쇽졀업시 늙어가니 / 하ᆞ올일이 젼혀 업서 名勝地을 차ᆞ자보니 /白石灘 도라드러 風景이 그지업다. / 俗離山 文藏臺나ᆞ간 眼前의 버러 잇고 / 十里洲 萬頃波나ᆞ간 左右의 둘러시니 / 地勢도 됴커이와 物色이 奇絶하ᆞ다. / 白玉가ᆞ갓하ᆞ간 바희우희 碧苔을 ᄡ그리치고 / 數間彩閣을 臨水하ᆞ여 디어내니 / 洞庭湖 岳陽樓ᅟ긴다ᆞ갈 이여셔 더하ᆞ갈손가.


-신교, 「백석정별곡」 -1절 9행 『백성정유고』


사내로 태어나 명승지를 찾다 백석탄의 수려한 풍경을 만난다. 여기서 속리산 문장대를 바라볼 수 있다. 물가에 몇 칸의 아름다운 누각을 지으니 악양루 못잖다. 「백석정별곡」 1절 9행에서 정자 주변 경관을 개관하고 동정호 악양루와 비견한다. 그리고 이어서 2절 9행에서는 한시 「백석정팔경」을 국문가사로 고쳐 읊는다. 옥계의 달, 석봉의 구름, 숲의 피리소리, 사탄의 어부가, 지담의 작은배, 다리위의 버들, 백암의 단풍, 절벽의 소나무가 백석정 팔경이다. 3절 4행은 석양 무렵 백석정을 미음완보하면서 풍경을 노래한다. 4절 11행에서는 낚시와 약주로 도도풍미(陶陶風味)를 구가한다. ‘도도(陶陶)’는 화평하고 즐겁다는 ‘화락지모(和樂之貌)’를 말하니 신교의 ‘도도풍미’는 ‘화평하고 즐거운 풍류’를 말한다.

      

5절 7행은 백석정에서 거문고를 타며 무릉도원의 정경을 읊었다. 거문고는 심성을 가다듬고 원림의 흥취를 장중하게 표현하는 벗이다. “비파 뜯고 거문고 타며 즐기니 화평하고 즐거움에 또한 잠긴다(鼓瑟鼓琴 和樂且湛).”3) 신교는 백석정에서 거문고로 흐르는 물과 높은 산을 희롱하니 신선이 노닌다며 이곳을 무릉도원의 이상향에 빗댄다. 산수와 거문고가 어울려 나오는 도도풍미의 탄성이다. 마지막 6절 10행은 백석정의 은일에 시인 묵객이 찾아와 ‘취하도록 잔 들며 한가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작취한담(酌醉閑談)으로 지내는 모습을 노래하였다. 이를 키워드로 정리하면 수간채각 – 백석정팔경 – 석양 풍광 – 도도풍미 – 무릉도원 – 작취한담으로 이어진다. 이를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처럼 이어진다. 몇 칸의 정자를 짓고, 주변 팔경을 감상하다가 어느날 석양의 풍광에 전율한다. 가끔 낚시와 약주를 곁들이고 거문고를 타며 음악의 풍류에 든다. 어쩌다 찾아온 벗과 잔 따르며 한가로운 시절 인연을 즐긴다. 더군다나 신교의 거문고 연주의 주제는 산수 원림의 형상에 배어들어 ‘도도풍미’의 경지가 갑절 이상으로 발현하도록 풍류를 안배한다.   

  

「백석정별곡」 2절 9행의 「백석정팔경」의 은유     


신교의 「백석정별곡」의 2절 9행은 한시로 지은 「백석정팔경」을 국문가사로 바꾸어 백석정의 경관을 기록하였다. 백석정의 붉은 난간에 기대앉아 멀고 가까운 곳을 바라본 풍경의 발견이다. 

     

朱欄의 비겨 안자 遠近을 바ᆞ라보니 / ❶玉溪山 바ᆞ갉은 銀燭이 되어잇고 / ❷石峰의 가나ᆞ간 구룸 翠帳이 되어셰라 / ❸沙灘의 노랫소라ᆡ 고기낙나ᆞ간 늙은이오 / ❹草坪이 졋소라ᆡ나ᆞ간 소먹이나ᆞ간 아하ᆡ로다 / ❺芷潭의 ᄯ것나ᆞ간 바ᆡ나ᆞ간 一葉이 가뵈얍고 / ❻柳浪의 빗신 다ᆞ리 半空의 므지겔다 / ❼白巖의 셧나ᆞ간 丹楓 錦屛을 둘러잇고 / ❽翠壁의 늙은 솔은 四時예 프으럿다


-신교, 「백석정별곡」 -2절 9행 『백성정유고』


팔경의 명칭은 신교의 사촌 형제 아들인 조카 죽헌 신필청(申必淸, 1647~1710)4)의 한시 「백석정팔경」에서 가져왔다. 백석정 팔경의 경관 요소는 ❶은 옥계제월(玉溪霽月), ❷는 석봉귀운(石峯歸雲), ❸은 사탄어가(沙灘漁歌), ❹는 초평목적(草坪牧笛), ❺는 지담소정(芷潭小艇), ❻은 류랑장교(柳浪長橋), ❼은 백암단풍(白巖丹楓), ❽은 취벽창송(翠壁蒼松)이다. 시선의 이동에 따라 원근앙부(遠近仰俯)의 경관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백석정의 남쪽에 멀리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옥계제월’은 원경(遠景)이고 ‘석봉귀운’은 앙관(仰觀)이다. 북쪽으로 뻗어나간 모래톱과 들판에 관련된 경관 요소인 ‘사탄어가’와 ‘초평목적’은 부감(俯瞰)이고 근경(近景)이다. 그리고 백석정 바로 앞에 지담의 경관 요소인 ‘지담소정’과 ‘류랑장교’도 부감이고 근경이다. 그리고 다시 백석정 뒤의 경관 요소인 ‘백암단풍’과 ‘취벽창송’은 원망(遠望)이고 앙관이다.

     

백석정 남쪽으로는 달에 비친 산이 촛불처럼 아름다우며 석봉으로 가는 구름이 산울타리(취병)처럼 백석정을 둘러싸서 조화로운 경관을 만든다. 북쪽으로는 모래밭에서 노래하며 낚시하는 늙은이와 들판에서 피리 부르며 소 먹이는 아이의 풍경이 등장한다. 백석정 바로 앞 감천(지담)에 떠 있는 배는 가벼운 일엽편주(一葉片舟)로, 버들 물결이 비친 다리를 하늘의 무지개로 연결한다. 백석정 뒤편으로는 바위는 하얗고 단풍은 붉고, 소나무는 푸르러 하나같이 선명한 색채를 드러낸다.

     

백석정 누정



온형근               




   차량이 쏜살같이 지나는 다리 아래로 감천의 여울은 잔잔하여 맑은데

   한 잔의 맑은 녹차를 건네며 백석정이 말을 걸어 온다.

     

   뭐라고 그때 일을 써 바치고 싶다는 모양새로 꿈틀댄다.

   서편으로 해가 지려는 때쯤

   이미 산그늘로 물살은 진하여 우주 한가득 담기고

   늦가을 안개로 피어오를 때마다 젖었던 바위 이끼로 푸르고

   붉은 단풍 너풀대며 석양빛 몇 줄기 타오른다.

     

   수심 낮은 물결 따라 조각배 혼자 노닐게 하니

   쉼 없이 무심하여 드리운 낚싯대를 쳐다보는지 알 수 없다.

   정자 마루에 앉아 난간을 붙잡은 채

   상실의 시대를 하염없이 먼산으로 돌린다.     


   늦은 달밤 찬기운 몇 잔의 술로 뎁히고

   아직 가라앉지 않아 일렁이는 일엽편주에

   꽤나 산 날이 많아 어긋나는 순간 있어도

   물에 비친 백석정, 내 몸 위에 초승달 하나 베이듯 걸쳤으니

   언젠가 다른 이의 품새로 물결 조용히 바뀌련만


   오늘의 풍광을 거울처럼 걸어 둔 채 두고두고 마주할 뿐     


-2024.01.27.     


청주 백석정은 32번 국도에서 관정길로 들어서 작은 교량 근처에서 접근한다. 483m의 대왕산 정상에서 감천으로 길게 이어져 내려온 해발 240m 지점에 위치한다. 한 잔의 맑은 녹차를 건네며 단아하게 손짓한다. 할 이야기가 많아 보이나 쉽게 곁을 주지 않는다. 이르게 지는 햇살을 산자락이 가로막는다. 흐르는 물은 짙어져 산과 누정이 함께 물에 노닌다. 조각배를 띄우자니 일렁이는 물결로 우주의 잔상이 깨어지고, 낚시대 드리우자니 작은 파장으로 물에 비친 나뭇가지 부러지겠다. 난간마루에 앉으니 내 모습이 옛사람의 풍류와 겹친다. 한참 후에는 다른 사람의 품새로 바뀌어 비추겠지만 당장 거울처럼 자리한 감천의 짙은 화폭이 맑고 청량하여 보고 또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백석정 주변 현황도 (자료 : 구글어스)

                 

백석정을 찾아 시경(詩境)을 나누다     


조선 사회의 16세기 전반에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는 이념과 생사의 갈림길을 요구한다. 상당수가 정치 권력에 대한 불신과 동요로 벼슬을 버린다. 그리고 누정을 중심으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택한다. 누정에서 관료의 자질과 인문학의 교양을 공유하면서 현실적 한계에 따른 갈등을 떨쳐낸다. 17세기에도 붕당으로 서로 밀고 밀리며 사(士)와 대부(大夫)의 반복으로 누정 건립은 더욱 활기차다. 누정이 만들어질 때마다 사대부들은 서로 찾아 교유하며 자연스럽게 시회(詩會)로 이어진다. 당대의 시인 묵객이 찾은 백석정의 공간과 정서적 특성은 누정을 읊은 시경(詩境)으로 귀착한다. 이들은 백석정의 아름다운 풍광을 통하여 신선 세계에 대한 암묵적인 동경을 다룬다. 백석정을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세속의 번민을 씻을 수 있는 장소로 향유한다. 한가롭고 조용하며 속세를 초월한 공간이다. 누정 원림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세계를 시경(詩境)으로 창작한다. 

     

백석정을 찾아와 지은 많은 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신교의 백석정은 다음과 같다. 백석정의 원운(元韻)이다.


바다의 동쪽 이 땅에 바위가 있는데   海之東有石 해지동유석

바위가 하얗기에 내 정자를 지었네   石白構吾亭 석백구오정

고운 서까래 물가에 닿아 일렁이고   臨水飜彩桷 임수번채각

하늘을 향하여 그림 같은 살창이 열렸네   依天闢畵欞 의천벽화령

높이 뻗은 푸른 등나무에 한참을 바라보고   長睨喬藤碧 장예교등벽

골짜기 청초한 난초가 절로 사랑스럽구나   自愛谷蘭靑 자애곡난청

세상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 헤어지고   與世相違別 예세상위별

이제야 돌아와 산신과 짝하네   今歸伴岳靈 금귀반악령


햇빛을 받으니 그러지 않아도 하얀 바위가 더욱 희다. 바위를 주춧돌 삼아 정자를 올린다. 흰 것의 본질은 색채를 받는 것이다. 돌은 ‘굳음’이다. 받아들이는 본성을 굳은 지조로 지켜내는 수기(修己)의 공간이 백석(白石)이고, 백석정(白石亭)이다. 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바위 아래 흐르는 물에 비친 채색한 서까래가 일렁인다. 위로 보니 살창이 그림처럼 하늘을 나눈다. 정자 뒤로는 푸른 산이다. 산을 오르는 등나무에 눈길이 갔다가 다시 골짜기 난초의 청초함에 이끌린다. 세상을 떠나니 이렇게 좋다. 나는 이제 여기 신선과 짝하여 머물겠다. 시를 읽으면서 나도 백석정의 풍경 가운데 서 있다. 내게 경관이란 ‘정원에 오랫동안 머물기’에 다름이 없다. 백석정은 장엄한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밝고 맑은 얕은 여울이 주는 내면적인 안정을 느낀다. 백석정에 앉아 지담(芷潭, 지금의 감천)을 바라보는 여울 가득 눈썰미가 지극히 편안하다. 

    

백석정의 시경을 읊은 작품을 통하여 백석정 원림의 풍광을 살펴본다. 신교와 교우 관계에 있는 인물로 보이나 유자포(兪子布)와 신계징(申啟澄)은 남은 기록이 소략하다. 

    

(1) 백석정 앞의 시냇물 / 잔잔한 개울물이 나를 보내네 / 냇물의 흐름도 마음이 있는 듯 / 떠나는 사람의 감정을 일으키네 (유자포, 「별백석정」)

(2) 작은 정자는 바위 틈에 기대어 있고 / 맑은 시내엔 일엽편주 / 우연히 와서 머물며 승경을 감상하며 / 지난해 노님을 다시 잇는구나 (신계징, 「제창벽」)

(3) 구름을 밟고 푸른 절벽 기어올라 / 달을 띄워 작은 배로 내려오네 / 산수간에 깨끗한 흥취가 있어 / 유인이 마음껏 노니네 (조위명, 「차영」)


(1)의 유자포의 시경은 잔잔한 냇물에 마음을 빼앗긴다. 백석정 원림 경관의 압권은 앞에 잔잔하게 흐르는 감천이다. 정자에 앉아 하염없이 잔잔한 냇물의 흐름에 나를 맡긴다. 나를 붙잡거나 보내는 것도 잔잔한 개울물임을 깨닫는다. 순간 백석정에서 일어나 떠나고 있는 나를 만난다. (2)의 신계징은 우연히 이곳에 와서 아름다운 승경을 감상한다. 돌아보면 이 작은 정자는 바위 틈에 매달렸다. 그럼에도 맑게 흐르는 계류에 일엽편주 한 척 띄운다. 마음에 심어 둔 조각배일 것이다. 지난해 와서 노닐었는데, 올해도 또 이어서 이곳을 찾았으니 여전히 좋기만 하다. 연이어 백석정을 찾았음에도 우연히 이곳에 왔다고 한다. 올때마다 새롭다는 중의적 표현이리라. (3)의 조위명(趙威明, 1640~1685)5)의 시경은 (1)과 (2)가 평면의 묘사였다면 이와 달리 보다 입체적이고 심층의 묘사이다. 구름, 달, 산수, 유인(幽人)으로 신선의 경지에 노니는 시경을 펼친다. 백석정이 놓인 지정학적 위치는 구름을 밟고 푸른 절벽으로 기어올라야 한다고 예사롭지 않은 접근성을 선보인다. 달이 뜨면 배를 띄워 화답한다. 먼 산 위에 뜬 달과 물 위에 띄운 배가 서로 흥취를 나눈다. 그러니 이곳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내가 속세를 떠나 그윽하게 사는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백석정 원림을 그림으로 그려 시를 받다

     

신교는 1690년 49세의 늦은 나이에 천거를 받아 출사한다. 「백석정별곡」은 출사 전 36세인 1677년에 창작하였다. 9년의 벼슬살이에서 모두 정6품을 넘지 않는 관직 생활을 하다 1699년에 사직한다. 관직의 괴로움을 당파싸움에 동화하지 못하는 시 창작으로 대변한다. 신교가 벼슬살이하는 동안 백석정의 풍광을 그림으로 그려 여러 사람에게 시를 받았다.

      

(…) 또 벼슬자리에 계실 때 백석정 그림 한 두루마리를 만들어 망천의 옛일에 기탁하여 당시 문장인 큰 선비들이 모두 지은 시가 그 위에 있다.(…)


-신교, 「家狀」, �백석정집�, .“…且於宦遊時 作石亭畵障一軸 以寓輞川舊事 時之文章鉅公 皆有詩題其上…”


백석정 원림을 직접 찾아가 창작한 시경과 달리 그림을 통해 제영시가 모인 것이다. 아쉽게도 신교가 화공을 불러 그린 그림은 남지 않고, 그림을 보고 지은 시만 남은 상태이다.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고, 그림은 소리 없는 시(詩有聲畵 畵無聲詩)’이다. ‘시 속에 그림이요 그림 속의 시(詩中有畵 畵中有詩)’이다. 그림을 보고 읊은 시는 백석정을 그리워하는 신교의 와유(臥遊)에서 시작한다.   

  

높고 높은 흰 바위는 동쪽으로 머리하고 / 화려한 채각은 범의 기세처럼 뛰어 오를 듯 / 베게 베고 누워 보고 보아도 부족하니 / 한양에서도 오히려 고향의 노님을 얻었네  


-신교, 「니현정헌제화장(泥峴精軒題畵幛)」


한양에 있으면서 오히려 고향에 있는 누정 원림에서 노니는 것(洛城猶得故園遊)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그 비결이 그림을 걸어 놓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림은 하얀 암석과 화려한 누각의 기세까지 보탬 없이 사실적으로 그렸다. 누워서 그림을 올려 볼 때마다 백석정 누정에 와 있는 듯하다. 시공을 초월하여 백석정을 들락댄다. 이 시를 원운으로 그림을 보고 시를 쓴 작품들은 언젠가는 돌아갈 귀거래의 대상으로 내재화하였다.     


백석정을 직접 보지 못하고 신교가 제작한 백석정의 그림을 보고 제영시를 써준 송파 이서우(李瑞雨, 1633~1709)의 시를 살펴본다. 송파 이서우는 온형근의 『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에 다음처럼 소개하였다.


17~18세기 제천에 연고를 둔 남인계 일군의 멋진 인물 네 명과 만난다. 창랑 김봉지, 송파 이서우, 연초재 오상렴, 학고 김이만이 그들이다. 창랑 김봉지(1649~1713)는 ‘제천16경’을 의림지의 시경으로 처음 제시한다. 이어 송파 이서우는 이를 계승하여 오언절구 연작시로 시경을 전파한다. 물론 약간의 변형은 필연이다. 송파 이서우의 제자인 연초재 오상렴(1680~1707)은 ‘창랑옹모산별업16경소지’에서 시경의 외연을 확장한다. 그리고 학고 김이만(1683~1758)은 <임호부>와 <산사> ‘의림지’조에서 의림지 시경의 틀을 변모시키고 격조를 북돋운다.6) 


송파 이서우의 백석정 그림을 보고 지은 「차운」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백석정의 풍문을 들은 것이 오래더니 / 청산이 앉은 자리에 들어 새롭구나 / 응당 알겠도다 종이 창고의 나그네가 / 스스로 그림상자의 신세가 된 것을 부끄러워 한다 / 소각에 머물며 술 한잔 마시고 / 고주에 낚시대 거두네 / 서리맞은 단풍에 슬픈 마음 주체하며 / 다시금 행포의 봄을 생각하네


-이서우, 「차운」


이서우는 백석정의 주인이 백석정에 가 있지 못하고 종이 속에 있는 백석정을 쳐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라며 약을 올린다. 그러면서도 그림 속의 백석정에서 머물며 작은 배 띄워 낚시하고 술 한잔 마시고 싶은 심정을 나타낸다. 그림에 서리맞은 단풍의 풍경이 있었나보다. 백석정의 늦가을 풍경이리라. 내년 봄을 기약한다. 이외에도 더 많은 사람이 지은 ‘그림을 보고 지은 제영시’가 즐비하다. 신교가 벼슬살이하면서 화공에게 백석정을 그리게 한 그림으로 동료에게 보여주며 시를 청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백석정을 모르던 주변 사람도 서서히 백석정의 진면목을 보고 싶게 하는 채근의 묘수이다. 벼슬에 나아가서도 귀거래로 누정 원림을 경영하고자는 동시대 사대부의 진짜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현재진행형이다. 당파와 당론에 의하여 고귀한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 선명한 이념과 건강한 견해의 보편적 지성이 무너진다. 당리당략이라는 전제적 무리배의 지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정치다운 정치인이 성장하는 일을 흔쾌히 응원한다. 

                   

(온형근, 시인::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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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 산 34-1, 충청북도 문화재

2) 신득홍은 옥과(지금 곡성군) 현감으로 5년 지내고 퇴직, 유고로 『지담집』6권이 있다.

3) 「권9 소아 녹명지십 2-1」, 『시경집전(상)』, 동양고전종합DB

4) 신필청, 「백석정팔경」, 『죽헌선생문집』1, 475~476쪽.

5) 조위명의 호는 송천(松泉)으로 문예에 뛰어났고 필법이 절묘하였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성균관직강이 되어 현종의 시책(盆t그뒤 대사간, 도승지,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명문장가로서 예론에 밝았으며 명필이었다.

6) 온형근, 「제천 의림지–의림지 누정 원림과 용추폭포」, 『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 도서출판 드림북, 2023,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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