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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Apr 05. 2024

운암 위에 배가 떠 있는 형세

단양 수운정 원림

단양 수운정 원림 - 운암 위에 배가 떠 있는 형세


주변 풍광이 영혼을 맑게 하는 수운정(水雲亭)     


제천, 청풍, 단양, 영춘의 사군산수(四郡山水) 중 단양필경은 조선의 시공간을 넘어 근·현대의 질곡에서 여전히 명승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삶의 억척스러움과 경망스러움, 산업 발전에 따른 자본의 천박함 같은 것, 주변으로 내모는 진솔함이 있다. 단양 산수는 여전히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원형 그대로의 자연 경물로 질박한 원림 미학을 구가한다. 뿜어내는 풍광의 중심과 주변은 보편의 경관 미학으로 가득하다. 과대포장하거나 자본의 논리에 침식당하지 않으면서 특정 풍경의 틀 속에 안온하다. 한국정원은 발견의 미학이다. 국내에 이토록 뛰어난 풍광을 점잖게 숨겨 놓은 곳은 드물다. 단양의 풍광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여 절경이라는 말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풍경의 용어로 비경(祕境)만큼 최고의 헌사가 있을까. 단양팔경이라 일컫는 풍경의 향유는 ‘경관의 비경’을 보편적이고 탁월한 가치로 서술한다. 국가 유산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단양의 아름다운 원림 향유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어가 단양팔경이다.


동아일보, 1926.09.04. 기사, 향토예찬 내 고을 명물(46)

동아일보 1926년 향토 예찬 내 고을 명물 기사는 단양의 ‘류계(柳溪)’라는 분이 투고한 「녹음 속에 간간이 핀 꽃송이 거울 같은 물결 위에 흰 돛단배」라는 제목의 글이다. 투고 사례로 동아일보 3개월분 구매권을 받는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단양은 남부럽지 않은 천연적인 경치가 많다. 문밖만 나서면 발길 닿는 곳이 모두 골골이 맑은 시내요 기암절경이다.” 신선의 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팔경(八景)이 있다고 한다. 1926년도의 신문 투고 기사는 단양팔경을 ① 상선암, ② 중선암, ③ 하선암, ④ 사인암, ⑤ 옥순봉, ⑥ 구담, ⑦ 도담삼봉, ⑧ 석문으로 기술한다. 오늘날의 단양팔경과 같다. 이는 1923년 『충북산업지』, 1930년에 『군세일반(郡勢一般)』과 다르다. 이들 관급 공식 기록에는 사인암(舍人巖) 대신 운선구곡(雲仙九曲)이 포함되었다. 단양의 일반인에게 운선구곡은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사인암을 8경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 기사에 나오는 단양팔경은 1956년 『단양팔경』 기록과 같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단양팔경의 내용으로 유지한다.     


그런데 1923년의 단양팔경 이전에 기록된 팔경 문화를 기록한 근거를 이준(李埈, 1812~1853)의 문집 『괴원집』에서 만난다. 단양팔경의 문헌상의 첫 기록이다. 제1 경이 수운정(水雲亭)이다.


단양팔경의 명칭 변화 정리  

1. 1923년, 1930년 – 운선구곡을 포함

2. 동아일보 1926년 – 운선구곡 대신 사인암을 포함

3. 동아일보 1926년의 단양팔경은 1956년 문헌에 등장하고 현재까지 이어짐


지금은 아쉽게도 관광 안내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이 수운정이다. 수운정은 단양팔경의 명칭 변화 과정을 문헌으로 탐구하다 보면 첫 번째 경관으로 출현한다. 위정척사파의 주창자인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장남이기도 한 이준의 「단양십경차무의도가운」에 묘사한 수운정의 시경(詩境)은 상쾌하다.     


좋도다 시냇물과 산이 성령을 상쾌하게 하고   可愛溪山愜性靈(가애계산협성령)

푸른 이끼 무성한 떨기 창공에 닿은 것이    蒼苔繡骨逼空淸(창태수골핍공청)

도인은 다시 솥에 단약을 제조하지 않는데    道人不復調丹鼎(도인불복조단정)

날리는 폭포 산뜻한 소나무 밤새도록 소리 나네   飛瀑寒松夜夜聲(비폭한송야야성)     

-이준, 「단양십경차무의도가운」 제1경, 수운정, 『습유일록』    

 

수운정은 운암(雲巖) 위에 지어진 정자이다. 주변 산수 원림의 풍광이 가히 사랑스럽다. 수운정 주변의 경관을 예찬한다.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신령한 풍광이라는 말이다. 계류는 화강암 너럭바위에 힘차게 부딪는다. 부딪칠 때마다 소리는 맑고 구성지다. 튀어 오르는 물보라로 주변에는 푸른 이끼가 융단처럼 두툼하다. 푸른 하늘까지 닿을 정도라고 짙고 무성한 푸른 이끼의 세력을 과장한다. 선명한 녹색으로 눈매를 시원하게 한다. 지금은 도인이 단약을 제조하지 않지만 신선의 도를 찾는 이들이 즐겨 찾는 신선계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이 바위에 부딪쳐 내는 소리와 소나무가 내는 송풍이 밤을 잊고 분주하다. �논어� 「자한」의 “흘러가는 것이 이 물과 같다. 밤낮을 그치지 않는구나.(逝者如斯夫 不舍晝夜)”를 연상한다. 물이 쉬지 않고 흐르듯이 학문도 쉬지 않고 해야 한다는 맥락을 짚는다. 운암 냇물의 흐름이 매우 빠르게 흘러가니 되돌릴 수 없다. 모든 세상사의 지나감이 이와 같다.


무이구곡(武夷九曲) 6곡 향성암에 주희가 쓴 바위글씨

❷ “서자여사(逝者如斯)” - 서자여사는 『논어』「자한」의 “逝者如斯, 不舍晝夜(흘러가는 것이 이 물과 같다. 밤낮을 그치지 않는구나)”에 나오는 말이다. 주희는 구곡 전체의 경관을 묘사한 「무의도가」 열 수 전부를 각 굽이의 암벽에 남겼는데, 지금 남은 것은 1곡 수광석(水光石), 2곡 늑마암(勒馬巖), 4곡 제시암(題詩巖), 5곡 만대봉(晩對峰), ❶ 6곡 향성암(響聲巖), 8곡 계북암(溪北巖)의 여섯 군데만 남았다. ❸ 물에서 오르기 쉽게 계단을 쪼아 만들었다.


팔경 안에 구곡이, 구곡 안에 팔경이 포함된 사례     


이준의 단양 10경은 수운정으로 시작한다. 일찌감치 수운정은 운선구곡의 3곡으로 불리었다. 팔경에 구곡을 포함한 사례가 없고, 구곡에 이미 정한 팔경을 포함하는 경우도 없다. 그래서일까? 1956년의 단양팔경에는 운선구곡이 빠진다. 그 후 현재까지 ‘수운정’은 단양팔경에 들지 않았다. 다만 오대익(吳大益, 1729~1803)에 의해 ‘운선구곡’의 제3곡인 ‘물과 구름이 어우러진 정자’로 남아있다. 정종로(鄭宗魯, 1738~1816)에 의하면, 운선구곡의 설곡은 이준의 단양 10경의 설정 한 세대 이전인 1797년(정조 20년)의 일이다. 수운정은 운암 위에 있다. 운암은 「오암이 담(五巖二潭)」의 하나이며, 파자(巴字) 형으로 흐르는 시냇물과 주변의 산이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뿜는 중심에 젊잖게 자리 잡고 있다.


운암 앞 파자(巴字) 형으로 굽이치는 우렁찬 물길

운암 앞 남조천을 건너 마주 보는 산자락 끝도 예사롭지 않다. 깎아지른 듯 뛰어난 경관미의 암벽이다. 도끼로 쪼개듯 ‘부벽준(斧劈皴)’으로 내리꽂은 황톳빛 암괴로 이루어졌다. 이런 기암이 3곳이나 있어 장엄하다. 이들이 한결같이 눈에 힘주고 바라보는 곳이 운암이다. 운암은 질시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는다. 그러나 시샘 앞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젓하다. 운암 위에 배의 기세를 지닌 정자가 있었다. 수운정(水雲亭)이다. 단양의 사인암을 찾고 정원문화를 탐구할 때마다 수운정이 등장한다. 단양팔경에 해당하는 곳을 원림 문화로 해석하여 틈나는 대로 답사하였는데, 계속 수운정의 위치만 비정할 수 없었다. 따로 운선구곡(雲仙九曲)을 탐사하겠다는 계획만 무르익었다. 운선구곡 또한 없어진 곳이 많아서 여유 있는 준비와 시간으로 추진할 작정으로 미뤘다. 그러다가 운선구곡을 준비하는 새로운 관점에서 수운정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한때 사인암보다 더 많이 찾았던 운암에 위치한 정자가 수운정이다. 오대익 이전 세대인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단구일기에 “운암의 서쪽 수백 보에 사인암이 있는데, 찾아 유람하기로서는 부족하다((西望數百步 有舍人岩 不足搜覽)”고 하였다.   


심낙수, 「유단구기」 일부   (자료 : 규장각)

  

그러니까 수운정은 운선구곡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단양의 풍광은 점차 도식화되어 정리되는 과정을 거친다. 강가나 계곡을 따라 사인암, 운암,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을 오암(五巖)이라 하고 배를 타고 선유(船遊)하는 구담, 도담을 이담(二潭)이라 칭하며 유형화를 도모한다. 단양의 절경을 오암이담으로 꼽기에 이른 것이다. 심낙수(沈樂洙, 1739~1799)의 ‘오암이 담’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산(海山)이 금강산이고 강산(江山)은 사군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금강산에 가보지 못했지만 혼자서 사군의 단양을 여행했다. 그런데 단양이 사군에서 (경치가) 으뜸이었다. 오암(五巖)으로는 사인암, 운암,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이 있고 이담(二潭)으로는 구담, 도담이 있다. 강은 오대산에서 시작되어 소백산으로부터 수백 리를 거치면서 신령 어린 정기를 모아 단양의 오암이담(五巖二潭)에서 모두 하나의 경관으로 되었는데, 이것은 마치 삼협(三峽)의 빼어난 경치가 형문(荊門)에서 꽃핀 것과 같다.     

-심낙수, 「유단구기(遊丹丘記)」, 『은파산고(恩坡散稿)』, 奎15680-v.1-11     


단양의 경관은 오암이암으로 하여금 하나의 경지를 이룬다. 신령 어린 정기를 모아(취정육영, 聚精毓靈) 기르는 풍광이다. 오암 중 ‘운암’은 높은 층을 이룬 암석과 맑은 계곡으로 유명하다.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수운정’이 있었기에 조선의 사대부가 운암을 즐겨 찾았다. 서애는 안동과 한양을 오가면서 이곳의 기막힌 풍취에 반해 직접 매입하여 수운정을 경영하였다.     


운암은 사인암 상류 수 리쯤에 있다. 검은 돌이 층첩으로 솟아있고, 그 높이는 수십 길이 되며 물가에 닿아있으며, 한 면이 쪼아내 새긴 것 같다. 물이 파자(巴字) 모양으로 흘러가서 술잔을 띄울 만하다. 전에 서애 유성룡공이 영남으로부터 한성으로 왕래하다가 이 암벽의 승경을 사랑하여 담비가죽 하나로 매입하여 중간에 머무르고 쉬었다가는 장소로 삼았다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여지도서(與地圖書)』, 1973, 275쪽.     


오암이담과 운암과 운선구곡의 수운정     


단양팔경은 ‘오암이 담’이라 불리는 단양의 산수 풍광이 골격을 이룬다. 오암에서 빠진 ‘운암’ 대신 ‘석문’이 대체되고 이담 중 ‘구담’과 함께 둘러보았던 ‘옥순봉’을 추가하여 오늘날 단양팔경을 이룬다. 운암은 수운정이 위치한 장소이다. 이곳은 산수와 풍광, 그리고 문화 경관으로 이름났다. 특별히 운암구곡 또는 단구구곡으로 부르다가 신선의 경지에 든다는 의미로 운선구곡으로 불린다. 운암구곡은 오대익의 호를 따서, 단구는 단양의 옛 이름이어서 그렇게 불렀다. 『단양 군 지(1977)』에 “수운정은 서애 유성룡이 세우고 퇴락하여 오대익이 중건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구지만 남아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오대익이 운선구곡을 설정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데, 당시에는 단구구곡이라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단구주인 운암이, 무이구곡시에 화운하여, 단구구곡의 사를 지었는데, 그 운을 써서 노래를 지어 올렸다. (丹丘主人雲巖 和武夷九曲詩韻 作丹邱九曲詞 用其韻賦呈)

     

-정범조, 「해좌선생문집」 권 30, 시, 『해좌집』, 한국고전종합DB.   

  

오대익은 누구인가? 오대익은 운암과 수운정이 좋아 단양에 머물면서 원림을 미음완보하면 수기(修己)에 힘쓴 사람이다. 특히 도교적 사고와 수련을 꾸준히 전개하며 수련에 힘쓴 흔적을 남겼다. 오대익의 운선구곡 3곡의 「수운정」은 다음과 같다.     


삼곡이라 巴字로 물 흐르고 바위는 배와 같은데, 三曲巴流岩似船(삼곡파류암사선) 

서애옹의 정자 그 옛날 어느 때에 있었나? 崖翁亭閣昔何年(애옹정각석하년)

선인은 한 번 웃으며 구름 가운데 앉아서, 仙人一笑雲中坐(선인일소운중좌) 

머리 돌려 속세를 바라보며 가련하게 생각하네. 回首紅塵乙可憐(회수홍진을가련)


-오대익, ‘수운정’, 「운암(운선구곡」」, 『단양군지』, 1977, 751~153.   

  

물이 정자를 감싸서 흐르는 곳에 수운정이 있다. 파자(巴字)는 태극문의 중앙선 모양을 말한다. 이 멋진 경관에 서애 유성룡이 정자를 지었음을 밝힌다. 그래서 오대익 자신이 중건하였음을 “옛날 어느 때에 있었나?”라며 은근히 수운정의 정통성을 내놓는다. 여기 구름 속에 앉은 신선은 머리 돌려 속세를 가련하게 바라본다. 오대익의 구곡은, 대은담-황정동-수운정-연단굴-도광벽-사선대-사인암-도화담-운선동으로 설곡하였다.   

  

정범조(丁範祖, 1723~1801)가 지은 운선구곡 3곡의 「수운정」의 시어를 참고하여 텍스트로 이미지를 만들어 상상한 풍경을 선보인다(Adobe Firefly).     


떠있는 정자의 기세는 배와 같은데   浮浮亭勢恰如船(부부정세흡여선)

태고의 세월 어린 반석의 뿌리 남아있네   有石盤根太古年(유석반근태고년) 

서애옹의 관물하신 정취 생각하니   緬憶厓翁觀物趣(면억애옹관물취) 

머문 구름과 흘러가는 물이 더욱 아름답네   雲停水逝傡堪憐(운정수서병감련)  

   

-정범조, 「수운정」 운선구곡 3곡, 『해좌집』    


정범조의 「수운정」 시경을 텍스트로 삼아 생성한 AI 이미지 (자료 : Adobe Firefly)

   

정범조의 「수운정」 시경을 텍스트로 삼아 생성한 AI 이미지 (자료 : Adobe Firefly)     

정자의 기세가 흡사 배와 같다는 정범조의 운선구곡 ‘서시’는 단양이 ‘무이구곡의 신령스러움이 어린’ 곳(丹邱分毓武夷靈)이라 에두른다. 정범조의 「수운정」시경에서 보듯이 정자는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으며 그 형상이 ‘다락이 있는 배’ 모양인 누선(樓船)과 같다. 정자가 디딘 바닥은 오래된 반석이니 정자의 입지로 최적의 요건이다. 실제로 이곳 남조천의 물살은 빠르고 경쾌하다. 끊이지 않고 물보라 일어 안개구름을 만든다. 이는 선계의 풍광을 구성하면서 이곳을 신선의 세계로 빠지게 한다. 구름이 머물고 물이 흘러가는 ‘운정수서(雲停水逝)’의 공간이다.     


운선구곡 모식도 – 3곡이 수운정이다 (자료 : 단양군, 필자의 재구성)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의 운석구곡 서시에도 단양이 무이구곡과 청아함을 다투는 것 같다(丹丘爭似武夷淸)고 하였다. 정종로의 수운정 시경은 다음과 같다.     


언덕 위에 외로운 정자는 떠날 채비한 배와 같고, 岸上孤亭似艤船(안상고정사의선) 

서애옹이 남긴 글씨 완연히 그 당년과 같네. 崖翁遺黑宛當年(애옹유흑완당년)

다만 지금 구름과 물이 예전과 같은데, 秪今雲水猶依舊(지금운수유의구)

몇이나 유람하는 사람이 가장 알고 사랑할꼬? 幾箇遊人最解憐(기개유인최해련)   

  

-정종로, 「수운정」 운선구곡 3곡, 『입재집』     


운암 위에 있는 수운정은 떠날 채비를 마친 배와 같이 날렵하다. 이때까지 서애의 수운정 글씨가 완연하게 남았다. 풍광은 지금도 예전과 같다. 이 경관을 알고 찾아오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서애가 경영하였던 수운정에서의 경관을 보는 것만으로 캐논뉴런(canonical neuron)이 활성화된다. 내가 직접 수운정을 미음완보(微吟緩步)하며 임천한흥(林泉閑興)에 빠진다. 이곳의 경관 가치를 알고 운암과 수운정을 거점 공간으로 삼아 원림을 경영한 오대익을 오히려 잘 드러낸 시경이다. 정종로의 운선구곡은 운선구곡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표현하며, 무이구곡과 비교하여 운선구곡의 특징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았다. 옥처럼 아름다운 층층의 봉우리, 신령스러운 산수를 무이구곡에 견주어 운선구곡의 역사적인 연속성과 문화적 가치를 강조한다. 정종로의 운선구곡시는 운선구곡이 신선의 경치라는 점을 들고, 이를 경영한 오대익 역시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드러낸다. 

    

단양팔경과 운선구곡에서의 수운정     


앞에서 통찰하였듯이 단양팔경의 기원은 오암이담이다. 오암이담이 자연스럽게 단양팔경이 된다. 단양팔경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단구구곡으로 경영되었던 오대익의 구곡이 관여한다. 운암과 수운정이 이에 해당한다. 운암은 오암이담에 속하였으나 팔경에서 탈락한다. 구곡으로 설곡 되어 운영되던 3곡 수운정과 7곡 사인암은 서로 다른 대우에 처한다. 3곡 수운정은 단양 10경에 들었다가 이후에는 팔경에서 제외되고 7곡 사인암은 팔경으로 흡수된다. 따라서 운선구곡의 7곡 사인암은 구곡과 팔경 모두에 해당하는 경관 요소의 특성을 갖는다. 반면에 사인암보다 높은 평가를 받던 운암과 수운정은 명맥만 남았다. 그럼에도 경관의 실체는 단양팔경과 운선구곡을 통틀어 ‘운암과 수운정’이 빼어났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운암은 그 자리에 여전하니 수운정의 자리는 상상으로 그려본다.   

   

운암과 수운정



온형근



               

   마치 맑은 가을 하늘 구름 한 조각 어디론가 떠날 줄 몰라 정갈하게 차려입은     


   사인암은 볼 게 없다며 먼저 찾았다더니 어느새

   오가며 들렸던 옛사람 몇은 신선의 세례로

   운암과 사인암을 오가며 현학玄鶴과 백록白鹿을 벗하였다더니


   명승을 친구 삼아 떠돌다 운암 앞을 휘몰아 흐르는  

   끊임없이 지즐대는 명랑한 물소리에 머문다.

   과연 유상곡수流觴曲水 자리 여기저기 드러난다.

   나는 이곳 너럭바위에 앉아 붉은 곰팡이 이는 속세를 잊을래

   내 앞에 당도한 술잔 받아 들고 고개 돌려 단정한 구름같이 우아하게 정좌한다.     


   바위를 두어 번 휘몰아 흐르는 아직도 맑기만 한 계류

   굽어살피던 붉은 기운의 암벽, 석영을 캐어 단약을 고을 때 넣는다더니

   나는 모른다. 네가 다다르는 강 건너 운암뜰로 나아갈 제

   물속에 잠겼던 너럭바위 몇이 들고일어나

   징검다리 놓고 시침 떼고 세월을 낚고 있었으니     


   아쉽고 또 아쉬워 물에 비춘 운암을 오래도록 쳐다보며

   수운정水雲亭 너의 신출귀몰을 꿈꾼다.

   자갈과 모래 일렁이는 백사장을 걷고 또 걷는다.

   발목이 좌우로 꺾이니 옛일 기리는 아득한 그리움 또한 묘합에 이른다.     


2024. 01. 17.     


‘운암과 수운정’은 조선의 인플루언서(influencer)였던 서애 유성룡의 유허지이며 셀럽(celeb)인 운암 오대익의 안목이 스민 곳이다. 조선 사대부의 발길을 재촉하였던 명승지이다. 더군다나 오대익은 수운정을 거점 공간으로 삼아 ‘하루에 한 번씩, 날마다 왔다 갔다’의 행위를 뜻하는 ‘일일래(日一來) 일왕래(日往來)’의 루틴으로 내공 수련의 ‘리추얼라이프(ritual life)’를 실천한다. ‘성(誠)과 경(敬)’을 다하여 ‘주의 깊은 알아차림’으로 임천한흥(林泉閑興)에 든다. 원림을 향유하는 궁극의 목표는 ‘원림에서 노니는 한가로운 흥취’인 임천한흥이다. 여유로운 흥을 체화하며 시경을 새기는 일이다. 운암 앞은 유상곡수의 장소로도 마땅하다. 너럭바위로 휘몰다가 어느 시점에 쏟아져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를 듣자면 세상의 진부한 속사정은 일순간 사라진다. 삶이 어쩌면 자갈과 모래로 일렁이는 백사장을 걷는 일 하나로 귀의하는 묘합(妙合)에 이른다.    

 

오암이담에서 이준의 단양 10경을 거쳐 단양팔경의 개념이 도입되는 변화 과정에 얽힌 실마리를 표로 정리한다.                    

단양팔경의 변화 과정과 운암과 수운정

수운정은 운선구곡의 3곡으로 명맥을 부여잡고 있으나, 복원되지 않았다. 운선구곡은 단양팔경에 상대적으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의 사대부가 즐겨 찾던 ‘오암이담’의 운암은 단양의 숨어있는 명승이다. 아는 사람만 찾는 은은한 풍광을 뽐내는 은일 공간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온형근, 시인::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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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준, 「단양십경무이도가운」, 『괴원집』1, 국립중앙도서관 필사본 20-22쪽.

2) 정종로, 『입재집』 제3권, 시 “次雲巖吳侍郞 大益 寄贈韻。並步其九曲十絶奉呈。丁巳”, 한국고전종합DB.

3) 삼협(三峽) – 중국의 구당협, 무협, 서릉협 세 협곡의 통칭으로 아름다운 풍광으로 많은 문인이 극찬한 곳

4) 형문(荊門) - 호북성 의도현 서북쪽의 산, 산의 형세가 문을 여닫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

5)  단구(丹丘) 주인 운암(雲巖)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 운에 화운하여 단구구곡사(丹邱九曲詞)를 지었는데, 그 운을 사용하여 지어서 올리다(丹丘主人雲巖和武夷九曲詩韻 作丹邱九曲詞 用其韻賦呈), 정범조, 이성호, 이채문, 남종진 역, 『해좌집』02, 가승, 2013, 442-443쪽.

6) 캐논뉴런(canonical neuron)은 공감을 위한 뇌의 활동이다. 실제로 행동을 취할 때나, 대상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특정 행동과 연관하여 발화되는 ‘대상과 관련한 움직임’에 관련하는 역할을 한다.

7) 윤선도, 「입문소동구점」, 『고산유고』 제1권 /시, “한 달 동안 문소동에 하루에 한 번씩 / 一月聞簫日一來, 푸른 산 붉은 나무 비단 일천 무더기 / 碧山紅樹錦千堆, 촌 늙은이는 그저 집안일이나 챙길 따름 / 村翁只作營家客, 아침저녁 한가한 정취야 알 턱이 있으리오 / 朝暮閑情豈識哉, 한국고전종합DB.

8) 윤선도, 「우음」, 『고산유고』 제1권 /시, 금쇄동 안에 꽃들이 활짝 피고 / 金鎖洞中花正開, 수정암 아래 물소리 우레 같네 / 水晶巖下水如雷, 유인의 신세 일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 幽人誰謂身無事, 죽장망혜로 날마다 왔다 갔다 하는걸 / 竹杖芒鞋日往來,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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