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금수정 원림
사실 포천 금수정(金水亭)은 예정에 없었던 방문이다. 최기운 화백이 한 날 매운탕을 끓였다고 집으로 초대하여 남자들끼리 놀았다. 거실에 근사한 정자 그림이 있어 다가가서 풍경을 만끽하는데 철원의 고석정이었다. 최 화백은 대뜸 “형님, 가져가세요.”라고 하면서 내민다. 얼떨결에 받으면서 다음 답사지는 “철원 고석정이네”를 연발한다. 그랬다. 나의 한국정원문화 탐방은 순전히 흐르는 물결처럼 순순하게 떠다닌다. 생성과 소멸의 법칙인 기연(起緣)에 의존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이 함께 만나는 대상지 선정은 암시적이고 본능에 따른 예감 같은 정신적 교감에서 비롯한다. 그럼에도 철원 고석정을 다루는 글은 뒤로 미룬다. 돌아오면서 들린 포천 금수정을 찾은 잠깐의 선택 때문이다. 포천 금수정은 나를 선정(禪定)에 들게 한다. 전후좌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금수정 하나로 마음이 모아진다. 금수정 원림에서 내려다본 낮게 깔린 여울에서 반사되는 빛의 변화가 좋다. 어떤 것도 끼어들지 않는다. 풍경에 홀린 삼매경의 경지가 이런 걸까? 더할 나위 없이 근사했다.
포천 금수정으로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따랐다. 어쩌다 보니 밭둑길로 들어서서 영평천 둑길로 향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막다른 길과 마주쳤다. 이곳은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을 통과하는데, 오가천과 영평천의 합류 지점이다. 이곳에 보가 있어 물을 가두고 수위를 조절하기 때문에 낚시하기 좋은 장소이다. 하지만 보 위를 따라 냇물을 건너는 일은 어렵다. 물살이 빠르고 미끄러운 수초가 많아 위험하기 때문이다. 내가 찾았던 날, 이곳에는 낚시를 하기 위해 트럭을 타고 두 명이 막다른 길에 세워둔 차량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린다. 차가 밭둑길로 돌려 나갈 수 있도록 멀찌감치 주차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나가야 그들은 막다른 길에 트럭을 대고 낚시를 할 참이다. 낚시하기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다. 그들만의 정해진 자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기다리며 주변 경관을 감상하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재촉하지 않는다.
금수정 아래 막다른 길 끝에 계단이 있고 포천 안동김씨 문중의 선영이 펼친다. 절벽 위 소나무 숲 아래 금수정이 언뜻 보이는 지점이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연경재전집』권 50의 「기동음산수(記洞陰山水)」를 보면 “들 가운데를 따라 좁은 내를 끼고 들어가면 정자 북쪽에 석문이 있다. 석문에 ‘동천석문(洞天石門)’이라고 새겼는데 한석봉의 글씨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둑방길로 접근하는 방향으로 암각문이 새겨진 연유를 유추하였을 때,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둑길로 접근 방향을 설정하였겠다. 지금의 둑방 막다른 길이 고문헌에 나타난 본래의 금수정 출입로이다. 동음(洞陰)은 지금의 포천을 말한다. 조선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에는 ‘동음양골영흥(洞陰梁骨永興)’이 먼저 보이고 그 아래 지도에 ‘영평현’이라고 적었다. 조선의 영평현은 신라 때 동음, 고구려 때 양골, 고려 때 영흥이라 불렸다. 영평은 현재 포천의 북부 지역으로 1914년 영평군과 포천군이 통합되기 이전까지 철원과 맞닿은 경기 최북단의 군이었다.
금수정은 영평팔경(永平八景)의 제2경에 해당한다. 「명오지(名塢志)」에는 금수정이 영평현 서남쪽에 있다면서 다음처럼 기록한다.
영평현(永平縣) 서남쪽에 있다. 금수정은 서울 근교에서 계곡 근처 거주지로는 최고이다(近畿溪居之最也). 고을 치소에서 바라보면 숲과 산기슭이 수려하고 은은하여 특이한 정취가 있다. 들판을 따라 가로질러 가다가 시내를 끼고 가야 도착한다. 이미 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 보면 시내가 호르는 형세는 굽이쳐 돌다가 정자에서 막힌다. 여기서 다시 남으로 꺾여 흘러가는데, 이것이 ‘백운계(白雲溪)’이다. 들판의 형세는 평평하고 넓으며, 녹음이 우거져 끝없이 펼쳐지고 현문(懸門) 밖의 숲과 나무는 푸릇푸릇하고 그윽하다. 예전에 양사언의 별장이었다가, 지금은 김씨(金氏)의 소유가 되었다. 금수정 앞에는 소고산(小姑山)이 마주하고 있는데, 그림처럼 예쁘다. 이 산 아래도 살기에 알맞다.
-성해응, ‘경기’ “명오지”, 「연경재전집외집」권 64 /잡기류, 『연경재전집』, 한국고전종합DB.
백운계는 백운산에서 발원한 영평천의 물이 금수정 아래 주위에서 이룬 계곡이다. 현문은 관아의 문 또는 고을의 어귀를 말한다. 고을현에서 금수정을 바라보는 풍광이 숲과 나무로 푸름의 절정이라 하였다. 금수정 앞에 마주하고 있는 산이 소고산이다(前對小姑山). 그림처럼 아름답고 곱다(姸妙如畵). 영평팔경은 ①화적연(禾積淵), ②금수정(金水亭 ), ③창옥병(蒼玉屛), ④낙귀정(樂歸亭), ⑤선유담(仙遊潭), ⑥와룡암(臥龍巖), ⑦백로주(白鷺洲), ⑧청학동(靑鶴洞)으로 영평천과 한탄강에 걸쳐 입지한다.
영평팔경과 금수정은 봉래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라는 조선의 명사를 빼놓고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다. 글씨와 시, 거문고에 뛰어난 신선같은 풍격을 지녔다. 남사고(南師古, 1509~1571)에게 역술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독특한 일화도 남겼다.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한시와 「미인별곡」, 「남정가」 등의 가사, 그리고 내 막내 ‘정호(晸皓)’도 좋아하는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는 지금도 전국민이 애송하는 귀한 시이다. 금수정에는 척약재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의 시비가 있고,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 시조비가 돌에 새겨져 반긴다. 그 옆에는 ‘안동김씨 세천비’가 있는데, 금수정 건립 관련 기록이 자세하다. 김구용이 이곳을 소요하며 즐겼고, 아들 명리가 정자를 지어 ‘우두정(牛頭亭)’이라 하였으며, 그 후손 윤복(胤福)이 ‘금수정(金水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윤복과 양사언은 매우 긴밀한 교우를 나눈 사이이다. 금수정에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원림 문화를 향유하였으며 명필의 글씨와 시를 바위에 새겼기에 후인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된다.
금수정은 함경도와 금강산 길목에 있는 명소이며 박순과 김수항을 제향한 ‘옥병서원’ 등이 있어 자연스럽게 금수정은 조선후기 서인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서인의 시조 격인 박순(朴淳, 1523~1589)의 사당이 있고,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을 만나러 송시열(宋時烈, 1607~1689)도 방문한다. 금수정의 입지를 월곡 오원(吳瑗, 1700~1740)의 「유풍악일기(遊楓嶽日記)」에서 살핀다.
또 서쪽으로 4, 5리를 가니 금수정(金水亭)이 나왔다. 근처의 시냇물은 활처럼 굽이져 돌아 흐르다가 정자 아래에 이르러 다시 띠처럼 길게 휘감아 안았다. 정자는 푸른 절벽 위에 세워졌는데 절벽이 매우 깎아지른 듯하였다. 정자 북쪽에 문처럼 생긴 두 개의 바위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석봉(石峰)의 글씨로 ‘洞天石門(동천석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옆으로 강가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에 ‘廻瀾石(회란석)’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중국 사신 허학사(許學士)의 글씨를 본뜬 것이라고 하였다. 정자의 편액은 봉래의 글씨였다. 정자 옆에는 오래된 전나무와 늙은 소나무가 드높이 서 있고, 정자에 오르니 맑고도 앞이 탁 트였기에 앉아서 조촐하게 술을 마셨다. 정자의 서북쪽 100여 보 되는 곳에는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매우 기이해 보이는 하얀 바위가 있었는데, 가운데가 움푹 파인 곳이 바로 ‘와준(窪尊)’으로, ‘尊巖(준암)’ 두 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옆에는 ➀봉래의 절구 한 수가 새겨져 있었다. 와준은 모래가 채워져 있는 것이 흠이었다.
거기서 서쪽으로 10여 보 되는 곳에 작은 바위에는 ➁봉래의 3, 5, 7언이 새겨져 있었다. 정자가 있는 벼랑으로부터 시내 옆길을 따라가서 보고, 한참 앉았다가 정자에 올라가 잠시 눈을 붙이고 나서 점심을 먹었다.
-오원, 「유풍악일기」, 『월곡집』제 10권 / 기, 한국고전종합DB.
금수정 원림은 참나무류의 울창한 교목과 소나무 군락으로 울울창창하다. 멀리 넓게 펼쳐진 시선을 마음껏 향유하면서도 아늑한 정자의 품격을 엿볼 수 있다. 달려온 산자락 사이로 흐르는 시내는 평평하고 잔잔하며, 주변의 경관을 거울처럼 비춘다. 오원의 「유풍악일기」는 풍악산을 유람하면서 쓴 일기로 3월 17일 서울 집을 출발하여 4월 4일에 화적연으로 해서 금수정, 창옥병, 사암서원을 들리는 중이다. 사암서원은 지금의 옥병서원을 말하며 이날은 물이 깊고 배가 없어서 서원에 참배하지 못해 섭섭해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위에 인용한 「유풍악일기」 ➀의 절구는 다음과 같다. 술통처럼 움푹 파인 바위인 ‘준암’의 옆에 새긴 시이다. 정기안(鄭基安, 1695~1767)의 「유풍악록」에 기록된 내용을 오원이 인용한 것이다.
비단물 은모래는 한결같이 평온하고 / 錦水銀沙一㨾平(금수은사일양평)
골구름 강비 속에 흰 갈매기 산뜻해라 / 峽雲江雨白鷗明(협운강우백구명)
진인 찾아 도화원길 우연히 들었거니 / 尋眞偶入桃源路(심진우입도원로)
고깃배를 동구 밖으로 쫓아내진 마시오. / 莫遣漁舟出洞行(막견어주출동행)
-양사언이 새긴 글이라고 기록함. (정기안, 「유풍악록」, 『만모유고』권 6 / 잡저, 한국고전종합DB)
금수정 원림의 뛰어난 풍광을 시경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금수정 앞을 흐르는 영평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한다. 비단 같이 곱게 흐르고 은빛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이곳 금수정 여울인 ‘백운계’를 대표하는 경관이다. 금수정 주변의 산과 여울이 골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불러들이는 자연의 순환을 돕는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의 전형적인 경관을 보여준다. 날아다니는 새들에게는 천국의 놀이터이다. 무릉도원이 여기이니 신선이 사는 이곳의 풍광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염원이 시에서 발현한다. 자연과 조화로운 공존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위에서 발췌한 글 「유풍악일기」에서 밑줄친 ➁의 시는 「증금옹(贈琴翁)」이다. 조선의 문사들에게 여러 버전으로 재생산된 금수정 원림의 대표적인 시이다. 이 시는 『동국여지지』제2권, 경기우도의 「영평현(永平縣)」조에도 나온다. ‘금옹’은 김윤복을 말한다. 김윤복과 양사언은 거문고로 풍류를 나눈다. 매번 달이 뜬 밤에 정자 위에서 연주하고 시를 지어 석벽에 새겼다.
녹기금 소리 백아의 마음이요 / 綠綺琴伯牙心(녹기금백아심)
종자기만이 비로소 그 음을 아니 / 鍾子始知音(종자시지음)
한 곡 탈 때마다 다시 한 수 읊조리네 / 一皷復一吟(일고복일음)
청량한 허뢰가 먼 봉우리에서 일어나니 / 泠泠虛籟起遙岑(영영허뢰기요잠)
강에 비친 달은 곱디곱고 강물은 깊어라 / 江月娟娟江水深(강월연연강수심)
-양사언, 「증금옹」, 『봉래시집』권 1, 한국고전종합DB.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를 들었다. 춘추시대 초(楚)나라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잘 연주하였는데,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를 하면(志在流水), 그의 지음(知音)인 종자기(鍾子期)가 듣고는 “멋지다, 거문고 솜씨여. 호호탕탕 유수와 같구나(蕩蕩乎若流水)”라고 알아주었다는 고사가 『여씨춘추』에 나온다. 김윤복과 양사언의 금수정에서의 원림 문화는 속세를 벗어난 신선의 풍격을 그려낸다. 이후 조선의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이 ‘금수정 원림’에서의 풍류를 선망하고 끊임없이 답사하며 시경으로 작품을 표현한다.
동시대 후배인 허균(許筠, 1569~1618)은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에 정을 붙여(...)”라며 양사언의 금수정 원림 풍류를 논한다. 백여 년 후의 인물인 이익(李瀷, 1681~1763)은 양사언의 금강산 풍류와 금수정 풍류를 부럽게 선망한다. 양사언은 도가적 색채가 짙은 인물이다. 포천 군수를 지낸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과도 관련 있으며, 역시 포천 출신인 남사고(南師古, 1509~1571)를 스승으로 모셨음이 기록으로 남았다. 글씨와 문장에 능하여 산수를 즐겨 유람하였다. 여러 문헌에 기록된 양사언의 인물평은 “신선의 풍채, 도인 기골, 해서와 초서, 산수 유람, 벼슬살이 칭송, 효와 우애 및 청렴결백, 점복 능통”으로 요약된다.
양사언의 「증금옹」은 금수정 원림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작품인데, 이후 많은 문사들이 이 시를 모방하여 창작하여, ‘금수정 원림’ 문화는 널리 기록으로 남는다. 가령 박세당(朴世堂, 1629~1703)도 앞의 양사언의 「증금옹」을 모방하여 시를 남긴다. 더군다나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은 평생 거문고 타는 것을 좋아하는 금수정 주인인 김윤복을 비중있게 다룬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금수정의 주인인 안동김씨 가문의 이야기를 「금수정중수기」로 남긴다. 금수정의 시경을 표현한 많은 작품이 지속하여 창작되어 존재하는 것만 보아도 금수정 원림의 생명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정조시절 문인화가 지우재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은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에 자신의 여행을 기록한다. 1796년 51살의 봄이었다. 총 26개의 화면을 하나의 두루마리로 남겼다. 전체 길이가 16m에 이른다. 말 그대로 한강과 임진강 일대의 명승을 따라 같은 당파의 교유 인물을 만나 노닐면서 흔적을 담았다. 이 화첩의 18면에 창옥병과 함께 금수정을 표현하였다. 금수정 절벽 앞쪽의 준암도 그렸는데 반대편 언덕 위에서 부감의 시점으로 그렸다. 하지만 창옥병은 그 더 뒤의 북쪽에 있다. 시선의 방향을 부여하여 이어지는 장소로 표현하였다. 17면에 더 자세한 창옥병 그림이 있기에 가능한 방법으로 보인다.
영평천 건너에서 금수정을 바라본다. 절벽 위에 걸터앉은 작은 누각의 정자는 단아하다. 마치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외로운 섬처럼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단아한 정자의 기둥과 처마에서 장인의 섬세한 마음을 읽는다. 주변 자연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낮은 기반의 암벽 위 고즈넉한 분위기에 앉은 금수정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양사언과 김윤복의 깊은 풍류 나눔이 거문고와 함께 인문의 풍광으로 자리한 곳이다. 거기다가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과 양사언의 글씨와 시가 주변 바위에 새겨져 열광의 감동을 널리 펼친 곳이다. 이러한 독특한 이야기와 특성은 연경재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글을 통해 정착한다. 지금은 포천안동김씨 고택으로 세거지가 복원되어 있는데, 안동김씨 문은공파의 세거지이다. 비옥한 경작지와 문중묘가 주변을 두른다. 세거지에서 접근하는 금수정은 평지로 이어진다. 금수정 마루에 오르면 선경이 펼쳐진다. 금수정 아래는 깎아지른 바위로 급하게 앞 여울로 이어진다.
영평천 건너 멀리 보이는 푸른 산과 안개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개는 점점 사라지고, 푸른 산만 뚜렷하게 남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영평천 한복판 바위에 ‘옥같은 섬’이라는 ‘경도(瓊島)’라고 쓴 양사언 필체의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졌다. 그의 섬세한 초서는 우아하다. 여울에 솟은 매끄러운 암반군에 한결같이 뛰어난 의미를 부여한다. 옥같은 섬은 주변의 맑은 물과 백사장, 울창한 숲과 다양한 생태계를 지닌 섬이다. 이 자체만으로 뛰어난 생태성을 지녔기에 고귀하고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풍요로운 생태계는 윤택 있는 삶의 결을 만들고 평화로운 정서에 들게 한다.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우주가 안겨주는 접화군생의 느낌에 빠진다. 이러한 환경에서 노니는 순간 인문의 찬란한 깨달음이 있어 ‘옥같은 섬’이란 최고의 찬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래서 원림 문화의 꽃은 발견하는 깨달음에서 전율의 신비로운 체험을 불러낸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물 흐름
은빛 물살에 시달린 모래는 기슭으로 몰려 모래사장이 되어
백로 어슬렁어슬렁 노닐다가 한순간에 날아올랐더니
고니와 청둥오리 무심한 듯 따로 어울린다.
은빛 모래에 쏘인 햇살이 보를 타고 넘는 물살로 스민다.
파안대소하듯 튕겨 나오는 물보라는 가끔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올라 정자 마루를 힐끗댄다.
내 얼굴 슬쩍 건드렸던 지난밤 꿈에 어린
모양 사라진 오백 년 정인의 흐릿한 촉감
바위 글씨를 쓰며 어울려 거닐 때
강 건너 솔숲에서 노래를 부르면
금수정으로 달려가 거문고로 화답하였지
그때 별유천지 흰 물결 일고
백로는 이때다 싶어 혀끝을 맵게 오므려 날았다.
신선은 흰 구름 타고 튀어 오르는 물살마다 둥지를 트고
- 2024.02.25.
금수정의 풍광에 빠진다. 감성의 격정적 물보라가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오른다. 나도 정자 마루에 앉아 오랜 시간 좌정한다. 금수정을 노래한 문장은 정자 지붕 아래를 한 바퀴 돌아가며 걸렸다. 순간 과거와 현재가 화면으로 겹치면서 사라졌다 부딪히고 어울린다. 바위 글씨를 쓰며 어울리는 나와 건너편 숲에서 연주하는 송풍(松風)에 이끌려 거문고를 연주하는 화답의 장면이 생생하다. 이곳에서 낮은 소리로 읊조린다. 그것이 한숨일지라도 우주의 호출이다. 나는 그가 지은 운을 따서 튀어 오르는 물살마다에 둥지를 틀 따름이다.
1) 성해응, 「기동음산수」, 연경재전집 권 50, 從野中行。挾川而往入亭北石門。門刻洞天石門。石峯筆也, 한국고전종합DB.
2) 강양희, 봉래 양사언의 서예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논문, 2003, 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