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야.
이렇게 너의 이니셜을 적어놓고 보니 20년도 훨씬 전에 읽었던 한국 소설들에서 인물을 지칭하던 방식이, 그걸 흉내내 “S언니에게” 혹은 “H에게”라며 편지를 쓰던 추억이, 하나의 브랜드처럼 그 이니셜의 영원한 주인인 것 같은 정치인이, 팝콘처럼 떠오른다. 사실 이건 주제에서 도망치려는 딴소리. 힛. 네가 건네준 글감이 언제 넣어둔지도 모른 채 뒷주머니에서 발견한 커피 도장쿠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글감을 받고 제주로 떠나고 한동안 잊고 지냈단다. 처음 의욕과 달리 쉽게 풀어내질 못하겠더라. 그러는 동안 남편이 내게 이런 문자를 보내왔지.
제주도에서 얻은 것 3가지
첫째. 활보가 가족을 위해 정말 애를 썼구나
둘째. 나는 자연을 좋아한다
셋째. 나는 하고 싶은게 많았다
그러니까 그가 얻은 것은 어떤 깨달음이었나 봐. 자신, 그리고 가까운 가족에 대해 알게 되는 것. 우리가 글쓰기를 통해서 이미 하고 있는 것. 그래서 어쩌면 멀리 떠나지 않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그럼에도 제주도라는 장소로 인해, 그 장소가 품은 풍경과 생활양식과 그로 인해 삶의 무늬 같은 것들이 어떻게 조금 달라졌는지, 써보려고 해. 살다 보니 남편 덕을 다 보네, 내가. 키득.
제주에서 1년, 제주에서 돌아와 9개월째. 놀고 먹는 삶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확연히 다른 두 곳에서의 삶. 어떤 '감각'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제주에서 나는 활짝 열어젖혀진 대문 같았어. 사계절을 온몸으로 맞는 일 같은 것 말야. 아침에 하늘부터 확인하는 일, 걸음이 사색이 되는 이유 같은 것이 몸으로 익혀지는 순간들.
감각들은 밖으로도 열려 있었지만 안으로도 열려 있어 '나'라는 존재를 인지했던 20대 이후로 가장 많이 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 40이 넘도록 바다에 가도 물에 발 한 번 담궈본 적 없던 내가 바다 수영을 좋아하게 되었어. 짠물에 눈가를 훔치면서도 파도에 밀리는 혹은 파도를 타는 그 느낌에 환호했지.
그렇구나 환호! 제주에서 난 다시 환호하게 되었어. 20대 때 인도네팔, 30대 때 아프리카 배낭여행 이후로, 안 그래도 애늙은이가 더 속늙어버렸거든. 그때 잃은 감탄하는 자세를 제주에서 다시 찾았어. 아침 하늘이 맑아도, 달이 밝아도, 바닷물이 유난히 파래도, 곶자왈에 잎사귀가 짙푸르러져도, 그날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워도, 귤이가 밥을 잘 먹어도! 몰랐는데 세상은 감탄할 일 투성이더라.
그리고 내 삶에 없을 것 같던 쫓기지 않는 여유롭고 단순한 일상을 꼽을게. 많은 사람들이 물었어. 아이 학교 보내고 뭐 하냐고. 매일을 밖으로 나가 걸었어. 오름이기도, 곶자왈이기도, 올레길이기도 했지. 비가 오면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 오늘 못 걷겠네" 아쉬워하면서. 그리곤 밥을 지어 먹고 귤이가 있는 학교로 데리러 가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를 지켜보았어. 그러다 보니 자연히 놀이터에서 기다리는 엄마들과 친해져서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는, 한번도 내 인생에서 일어날 거라 상상해본적 없는 시간을 갖기도 했지. 귤이가 놀이터 일정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와 도시에서와 다를 바 없이 하루를 마감하고, 혹은 바다로 뛰어가 놀던 날도 있었고. 배달을 시켜먹을 곳은 오직 치킨집 밖에 없어서 우리는 1년 동안 치킨집 쿠폰 열 몇 개를 모았단다!ㅋ
코로나키즈인 귤이는 자기를 확장하는 시간을 가졌어. 5세 때부터 여행 한 번 못하고 어린이집이 전부였던 아이가 산으로 바다로 들로 자연으로 다니고, 학교와 친구라는 세계에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어. 그 순간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제주가 준 선물이네.
또 있다.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 육지에선 별 볼 것 없는 도시에 사는 까닭에, 집도 좁고 엉망이라는 이유로 굳이 먼 곳의 친구들을 부르지 않았는데 아마 제주였기 때문이겠지. 오래된 벗들에게 제주여행을 부추겨 우리 집으로 초대해 깊은 시간을 보냈어. 남편의 친구네, 우리 부모님과 내 동생들, 몇 십 년만의 가족여행을 제주에서 해보기도 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좋은 일만 있었을 것 같지만 셋이 딱 붙어 지냈기에 더없을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 나에 대해 잘 알게 된다는 건 솔직해진다는 것이기도 해서 남편과 서로 으르렁거렸어. 귤이와 붙어 있게 된 남편은 분노조절장애인가 의심했을 정도로 화를 많이 냈고 오히려 귤이와 사이가 멀어질 것 같았어.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은 인생에 언제고 필요한 시간이었고, 오히려 그 시간을 당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싶어. 귤이가 더 자라 방문 걸어잠그기 전에 싸워도 보고 화해도 해보고 밑바닥을 보고 새살을 돋게도 하고.
복직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제주는 가닿을 수 없는 어떤 꿈과 환상의 나라처럼 느껴져. 제주에서의 삶도 전생의 일 같았고. 그런데 쓰면서 깨달았어. '아, 이러려고 글을 쓰지!' 다시 도시에서의 일상을 살면서 그새 잊고 지냈던 그 덕목들을 일깨우려고. 그렇게 나는 좀 더 건강해진 것 같아. 아파트 9층에서, 다시 좁아진 집에서, 감탄력은 줄어들고 복잡해지기만 한 일상에서, 오늘 아침 심호흡 끝에 출근한 숨막히는 일터에서도 나는 끝끝내 잘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싶어졌어. 4년 만의 복직 첫날, 그만두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 회사에서 이상한 용기가 샘솟는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이 글을 쓴다.
그래서 YS 네게도 나의 안전부절 뒤에 찾아온 이상한 용기가 전해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