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좋아서 업그레이드를 받았습니다

by 이남우
목소리가 너무 좋고 젠틀하셔서 좌석 업그레이드해드렸습니다.

항공사 카운터 너머의 지상 승무원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승무원이 여권을 돌려주며 건넨 탑승권에는 정말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이라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승무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을 더듬었습니다.


"...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네, 괜찮습니다. 탑승 전에 라운지 이용하시고 편안한 여행 되세요."


승무원은 정말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항공권의 좌석번호를 형광펜으로 표시해주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항공권 좌석 업그레이드였습니다. 혹시 승무원이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탑승권을 잘못 준건 아닐까 싶어 이름을 꼼꼼히 확인해 보았지만, 분명 제 이름이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10시간 동안을 좁은 좌석에 구겨져 비행할 생각에 우울해 있었는데, 이런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라니요. 미국에 살고 있는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저가 항공권 판매 사이트에서 가장 싼 가격에 구입한 미국 항공사의 이코노미 항공권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즈니스 클래스 업그레이드라니, 정말 복권 당첨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꿈같이 편안한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샌프란시스코에서 친구들은 제 이야기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항공권 업그레이드를 그런 이유로 해줄 리 없다며 조사관처럼 저를 캐물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 항공사의 VIP 멤버이거나 이코노미 항공권 중에 가장 비싼 항공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저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여러 가설과는 달리 저는 그 항공사의 멤버십도 없고, 제가 구입했던 항공권은 환불도 안 되는 최저가 항공권이었습니다. 결국 친구들은 승무원이 이야기 한 대로 '목소리가 좋아서' 좌석 업그레이드를 받은 것으로 할 수 없이 결론지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목소리가 좋으세요?

커피숍 사장님은 주문을 받다 말고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대구 출장을 갔다가 너무나 찌는듯한 날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려 들어간 커피숍이었습니다. 저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신용카드를 사장님께 건넸습니다. 사장님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인지 주변 손님들도 고개를 돌려 카운터 쪽을 쳐다보기에 제 등 뒤가 따가웠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저는 진동벨과 영수증을 챙겨 서둘러 에어컨 앞 명당자리를 잡았습니다.


불이 들어온 진동벨을 들고 카운터에 찾아가자 쟁반 위에 제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시원하게 얼음 가득 컵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제가 주문하지 않은 마들렌과 마카롱이 두 개씩 같이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 하자 사장님이 말했습니다.


"서비스니까 맛있게 드세요. 목소리가 너무 좋으셔서 맨날 오셨으면 좋겠네."


사장님의 바람과는 달리 그 이후 그 카페를 다시 찾지는 못했습니다. 대구 출장을 갈 일이 다시 있다면 한 번쯤 다시 들려볼까 생각했지만 공짜 마카롱을 바라는 손님으로 비칠까 싶어 망설여집니다.


제 인생에서 항공권 좌석을 업그레이드받거나 공짜 마카롱을 서비스받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이지만,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가끔 듣곤 했습니다. 어려서는 제가 말이 별로 없고 조용한 성격이라 말을 많이 하라고 일부러 칭찬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 좋다는 칭찬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정말 그런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녹음된 제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제 스스로 닭살이 돋을 만큼 느끼하다 싶었는데,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 소리가 듣기 괜찮았나 봅니다.


대학교 때 같은 과에 인기 많던 여자 동기는 제게 생일 선물로 책을 녹음해서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다른 남자 동기들처럼 음악 CD나 도서상품권을 주면 안 되겠냐고 했지만, 그 친구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서점에서 가장 얇은 시집을 한 권 사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선물을 준 이후 그 동기와 특별한 일을 생기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는 목소리고 얼굴은 얼굴이니까요.


제 경험상 그리고 여러 연구에서 입증되었듯이 좋은 목소리는 멋진 외모만큼이나 살아가는데 꽤 유리한 장점인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과 교류할 일이 많아질수록 좋은 목소리는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알버트 메라비언의 연구에 의하면 첫인상을 결정짓는데 목소리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목소리는 첫인상의 38%를 차지하며 표정이 35%, 태도가 20%, 그리고 말의 내용이 7%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다른 조사에서는 여성의 87%가 남자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껴본 적이 있다고 하고, 그중 75%는 남성에 대한 호감도의 절반 이상이 목소리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사실 좋은 외모만큼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라면 일단 눈이 가고 호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런데도 목소리의 장점이 더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좋은 목소리는 호감을 넘어 신뢰감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뢰감이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채용이나 면접에서 외모보다 목소리가 더 큰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한 리크루팅 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인사 담당자의 97%가 목소리를 채용 결정에 고려한다고 합니다.


저와 사귀었던 분들에게 그리고 저를 채용했던 담당자들에게 제 목소리가 중요한 이유였는지 물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좋은 목소리를 가졌다는 것에 대해 부모님께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자 합니다. 어쨌든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 아닌 타고난 장점을 가진 것에 대해 우쭐하거나 과시하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이 없으니까요. 좋은 목소리를 가진 것에 대해 겸손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영향력 (Influence)"입니다.


좋은 목소리를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만 대체로 낮은 톤과 깨끗한 음색을 의미합니다. 특히 중저음의 목소리는 남성의 좋은 목소리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위엄의 느낌을 주는 위압감(dominance)과 연관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진다고 합니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의 울음소리는 무려 20Hz에 이를 정도로 낮은 주파수로 다른 동물들에게 공포감을 줍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중저음의 목소리일수록 조직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듀크대학교에 메이유 교수는 미국 792개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연봉 간의 관계를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최고경영자일수록 더 큰 기업에서 일하고 높은 연봉을 받으며 재직기간도 더 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좋은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좋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일수록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자신의 메시지에 신중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중하지 못한 말 한마디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경계해야 합니다.


제 나이가 마흔을 넘어가니 이제 이성에게 호감을 주거나 새로운 인간관계를 위해 제 목소리를 활용할 일은 거의 사라진 듯합니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제 젊은 시절에 제 목소리의 장점을 잘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제 청춘시절이 더 화려했지 않았을까 남몰래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 일터에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기 위해 제 목소리를 잘 활용해야 할 필요가 많아졌습니다. 회사의 신년회나 송년회 같은 자리에서 제가 어떤 말을 어떤 분위기로 하는지에 따라 함께 일하는 많은 직원분들이 회사의 미래에 대해 밝게 또는 어둡게 생각하게 됩니다.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전달하는 말일 수록 더욱 진중한 목소리로 솔직함을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뒤늦게 깨달은 저의 몇 없는 장점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적절히 그리고 겸손하게 활용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목소리는 참 좋으시네요...


전화로만 통화하던 협력업체 이사님은 저를 처음 얼굴 보고 만나 자리에서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말줄임표 뒤의 숨은 말이 무엇인지 굳이 되묻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면 차라리 평범한 목소리를 가졌더라면 싶기도 합니다. 제 청춘시절이 화려하지 못했던 이유는 제 얼굴이 목소리의 장점을 상쇄했던 것이지요.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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