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의 봄은 평년보다 꽤 기온이 높았습니다. 엘니뇨 현상이었는지 라니냐 현상이었는지 때문에 벚꽃이 막 진 5월에도 등이 축축해질 만큼의 더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가뜩이나 갑갑한 시내버스 안은 땀냄새까지 더해져 불쾌감이 높았습니다. 버스 안 라디오에서는 어제 파산 신청을 한 기업들에 대한 암울한 소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미도파 백화점과 뉴코아 백화점이 파산했다는 소식에 버스 안에는 낮은 탄식이 흘렀습니다. 바로 어제 친구들을 만나고 쇼핑을 했던 그 백화점이 부도가 났다는 소식은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출근길을 서두르는 어른들의 초조한 눈빛에는 옅은 불안감마저 깔려 있었습니다.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IMF에 대한 암울한 뉴스는 이제 우리 일상에도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등교하는 학생들은 지난밤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부모님의 한숨소리에 마음이 무거웠고, 출근하는 회사원들은 오늘의 출근이 마지막 출근길이 되지는 않을지 불안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끝나고 얼마 전 데뷔한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공허하게 버스 안을 채웠습니다.
걱정거리 근심거리 하나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그룹 신화의 데뷔 앨범 ‘으쌰! 으쌰!’의 가사처럼 23년 전 그해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IMF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해 봄은 겨울보다 더 춥고 음울했습니다. 하지만 그 음울함 속에서도 우리가 봄볕처럼 따뜻하고 희망적으로 느끼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만 킬로미터 건너 미국에서 전해오는 박찬호 선수의 활약 소식이었습니다. 박찬호가 LA 다저스의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날이면 직장이나 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중계방송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였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도 라디오를 품에 숨기고 이어폰을 소매춤으로 빼어 선생님 몰래 중계를 듣곤 했습니다. 박찬호가 삼진을 잡았다는 캐스터의 말에 교실의 모든 학생들이 동시에 함성을 지르는 광경도 펼쳐졌습니다. 선생님들도 학생들을 크게 혼내지 않고 오히려 경기 상황을 더 궁금해하셨습니다.
그해 한 시즌 15승이라는 대 기록을 세운 박찬호 선수는 가장 음울했던 시대를 보내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값진 행복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박찬호가 힘든 마리너리그 생활을 이겨내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IMF의 터널을 지나 밝은 미래를 누릴 것이라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스스로 박찬호 세대라고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IMF의 어둠이 걷힌지는 오래되었지만 우리 세대는 아직도 박찬호를 떠올리면 그 시대의 암울했던 기억과 희망을 생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BTS가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달성했다는 소식과 전 세계 팬들이 한국 가수의 노래를 그것도 한국어로 따라 부르며 즐긴다는 뉴스는 우리 박찬호 세대에게 믿기 어려운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K-POP과 드라마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뉴스들 앞에서 우리는 기쁨보다 어리둥절함이 앞섭니다. 전 세계가 한국을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마저 듭니다.
박찬호 세대가 간절히 바랬던 건 빨리 이 어둠의 시대를 벗어나 IMF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실직한 우리 부모님들이 다시 일자리를 되찾고 부도가 난 백화점들이 문을 열어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다시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던 그때의 지위를 되찾고 다시 이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20년 만에 많은 것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47위까지 추락했던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는 우리가 우러러만 보던 유럽의 선진국들을 제치고 10위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대한민국을 파산한 실패국가로 분류하던 IMF는 이제 우리를 선진국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국방력은 세계 6위 규모로 성장해서 북한과 주변 국가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걱정을 크게 덜었습니다. 미래 성장 가능성을 평가하는 글로벌 혁신지수에서는 전 세계에서 5위,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습니다. 줄줄이 도산했던 한국의 대기업들은 이제 글로벌 시장에서 선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경영학 교과서에 성공사례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박찬호 세대는 지금의 BTS 시대의 영광이 낯섭니다. 우리 세대가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결과임에도 과연 우리가 이런 번영의 시대를 누려도 되는지 어리둥절합니다. 지난 20년간 우리는 어려움을 참고 견뎌내서 무너진 대한민국 경제를 다시 세우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습니다.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했고 학생들은 저축하고 근검절약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즐겁고 흥겨운 것들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회복과 발전이 더 우선시되었습니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우리는 개인의 성공에만 몰두하지 말고 세계로 나아가 대한민국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실에 걸려있던 교훈도 ‘세계로 뻗는 한국인이 되자’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 당시 유행했던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는 대학생들은 가방에 태극기 배지를 달았고 교환학생을 떠나는 학생들의 가방에는 기숙사에 걸어둘 태극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회 전반에 알 수 없는 결연함과 진지함이 짙게 배어있던 시대였습니다.
저는 IMF 시대가 시작된 1998년 박찬호의 15승 소식에 기뻐하던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가 방콕 아시아 게임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우승을 거두는 모습을 보며 대학생이 되었고 18승으로 아시아 투수 최고 기록을 세웠던 2000년을 지나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과 미국을 무너뜨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직장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박찬호 세대의 한 명으로서 저 또한 IMF 시대의 사명감 같은 것이 제 가치관과 인생에 깊숙이 영향을 미쳐왔던 것 같습니다. 진로 결정에 있어서는 제 개인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그 직업이 국위선양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 중에 대기업의 해외 전략부서나 외무고시에 관심을 갖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외국계 기업에 취직해서 글로벌 기업의 경영 노하우를 배우겠다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7~80년대의 강요된 전체주의적인 애국심과는 다른 위기를 함께한 동지들에게서 느끼는 자발적 애국심이 그 시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이렇게 즐겨도 되는 걸까?
그 세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기쁘고 좋은 일이 있어도 마냥 즐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 축하할만한 국가적인 이벤트들이 많았지만, 방심하다가는 다시 IMF가 올 수 있다고 스스로 자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외환보유고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지만 아직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라며 자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함 들어도 참고 견디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미루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전 세계를 춤추게 만들 때에도 어쩌다 얻어진 우연이라며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이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습니다.
대한민국이 경제 문화의 강국이 되어버린 BTS시대를 바라보며 우리 박찬호 세대는 솔직히 불안합니다. 자만하고 방심하다가 이 모든 풍요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앞섭니다. BTS가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한건 어쩌면 우연이지 아닐까 걱정하며 BTS의 순위가 한 단계만 떨어져도 불안해합니다. 대한민국 축구는 2002년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지만 이후 피파랭킹에서 30위 안에도 들지 못하고 있고, 싸이는 강남스타일로 세계를 집어삼킬 것 같았지만 더 이상 빌보드 차트에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We don’t need permission to dance
뉴스에서만 보던 BTS의 노래를 처음으로 제대로 들어보았습니다. 노래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이 빌보드 차트에서 몇 위를 했는지에만 관심 가졌던 것을 반성하며 그들의 음악에 빠져보았습니다. 듣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찾게 되고 인터뷰 영상들을 검색하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그들의 노래가 제 유튜브 뮤직 즐겨 듣는 음악 리스트와 구독 채널에 추가되었습니다.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고 그들의 생각을 쫒게 되었습니다.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의 의미를 곱씹으며 그 메시지의 깊이에 감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느 BTS의 팬들처럼 저도 그 늪에 빠져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입덕의 과정에서 제가 스스로 놀랐던 점이 있습니다. 그들을 좋아하면 할수록 BTS가 대한민국 가수라는 것을 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노래에는 우리 세대가 품어온 결연함이나 애국심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메시지를 노래에 솔직하게 담아 전달하는 진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진심으로 공감하는 메시지를 만들고 이를 아름다운 멜로디에 담아내는 그들의 능력을 바라보며 미안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이들을 지난 98년도의 박찬호 선수를 바라보던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왜 이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빌보드 차트를 정복하고 경제부가가치를 창출해서 국위를 선양하기를 바라고 있었을까. 왜 이들이 방심하지 말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높여주길 바랬을까.
박찬호 선수는 전 국민의 기대감을 어깨에 짊어진 채 그 큰 부담감 속에서 매 경기를 했어야 했다고 합니다. 15승이라는 대 기록을 달성했음에도 제대로 기뻐하지 못하고 국민들에게 더 나은 결과를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스포츠 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씩 경험하는 슬럼프에서는 전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박찬호에게 너무나 큰 위안을 받았지만 그에게 너무나 큰 부담을 안겨주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박찬호 세대는 이제 BTS 세대가 이루어 내고 있는 것들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세대는 애국심이나 결연함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지금 세상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BTS 세대는 국가는 더 부유해졌지만 개인은 더 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부는 늘어났지만 분배는 더욱 양극화되었고 청년들의 일자리와 경제적 여건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IMF를 벗어나기 위해 받아들인 무책임한 시장경제의 결과로 지금이 세대의 개인은 더욱 불행해졌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 세대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으로 행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박찬호 세대도 BTS 세대에게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국가와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법은 이제 결연한 애국심이 아니라 서로 진심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현재에 충실하고 즐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결연하게 심각하게 살았던 것일까요. 힘든 국가적 상황을 극복하는 데 있어 왜 그렇게까지 현재의 행복을 미뤘던 것일까요. 우리 박찬호 세대들은 이제 어깨의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고 좀 더 가볍게 덜 진지하게 이 시대를 살아갔으면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하고 그 성취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BTS세대의 삶을 배웠으면 합니다. 그들이 말했듯이 우리가 춤추는 데 허락은 필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