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하나를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라'면이라고 하겠다. 아무리 화려하고 대단한 음식이라도 라면을 처음 먹었을 때의 그 감격을, 여러 번 다시 먹어도 느낄수 있는 라면의 감격을 따라갈 음식이 없다.<아기공룡 둘리>에서 '핵폭탄과 유도탄'의 '라면과 구공탄'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저런 명곡이 있나하며 감격했다. 내 마음을 그대로 담은 곡이었기 때문이다.
"라면이 있기에 세상 살 맛 나~
하루에 열 개라도 먹을 수 있어~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맛 좋은 라면~
(간주) 가루! 가루! 고춧가루!~~~"
'라'면을 잘 끓이기 위해 난 봉지 뒷면의 라면 끓이는 방법을 착실히 따랐다. 그래서 설명에 나와 있는 그대로 정확히 550ml의 물이 끓으면 4분 30초 동안 정확하게 끓여 내었다. 1ml의 물도, 1초의 시간 초과도 용납하지 않고 정말 곧이곧대로 설명서에 고착했다. 누가 나를 위해 라면을 끓여 준다면 난 극구 사양했다. 그들이 설명서대로 완벽하게 끓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에 누구에게도 나의 라면을 맡기지 않았다. 혹여 내가 끓이다가 실수로 끓이는 시간이 초과되는 일이 있으면 나는 끓이던 라면을 버리고 새로 끓였다. 도저히 불은 라면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라면을 끓일 때 내가 그렇듯, 나의 '라'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 완벽주의 때문에 '라'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라'를 소리 내려고 하면 목소리에 '공기 반'이 제대로 섞이지 않은 것 같아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고, '라'음에 백만 분의 일 정도 못 미치는 피치가 거슬렸기에 나의 '라'를 망쳤다고 생각했다. 조금의 오차도 인정하지 않는 나의 완벽주의는 나의 노래를 숨 막히게 했다.
부르는 나만 숨 막히면 되는데, 듣는 사람도 따라 숨 막혔다. 열심히 연습하는 건 좋았지만, 난 완벽에 가까운 '라' 음을 구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은 그들의 귀에는 똑같이 들리는 '라'를 수백 번, 수천 번이고 다시 들어야 했다. 그들이 '이제 그만하면 된 것 같아.'라며 지친 표정을 하고 있어도, 나는 나의 기준에 못 미친 '라'를 다시 고쳐 부르며 그들도 지치게 했다.
나의 완벽주의는 어쩌면 일의 완성도를 높여 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높여진 일의 완성도만큼 내 마음과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 완벽주의 때문에 나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 되었다. 나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빈틈들을 모조리 캐내고 있었다. 그래서 장점 보단 단점들이 눈에 더 잘 들어왔고, 칭찬보단 지적질을 더 많이 했다.
이런 나에게 지친 아들이 어느 날 울며 말했다.
"엄마는 왜 내가 잘해도 칭찬을 안 해 줘요. 맨날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는 소리만 하고...
엄마 기대가 너무 높아서 나 힘들어요."
아차 싶었다.
내가 그랬구나.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아들에게도 완벽을 강요했구나.
내가 그들을 힘들게 했구나.
나의 '라'는 완벽을 추구하다 갈 곳을 잃은 음이 되었다. 갈 곳만 잃은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괴팍한 음이 되어있었다.
어느 날 괴짜 친구가 집에 놀러 와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했다. 자동반사적으로 난
"물 550ml에, 물 끓으면 4분 30초야."
라고 당부를 했지만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그렇게 안 끓여. 난 첨부터 물 하고 라면하고 같이 넣고 끓인다. 야, 그리고 물은 대충 눈대중으로 넣어 끓이면 되지, 뭘 그리 양을 재고 그러냐. 익으면 먹으면 되는 거고."
그녀가 처음부터 찬물에 넣고 끓은 라면은 그야말로 퉁퉁 불어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맛이 좋았다.
"이상하네. 불었는데도 왜 맛있지?"
"왜 맛있긴. 대충 끓이니까 맛있지. 너처럼 그렇게 끓이면 불은 라면의 맛을 볼 수나 있겠냐."
이 괴짜 친구는 나랑은 정반대의 사람이다. 그의 인생에 '완(完)'이 들어가는 걸 보지 못했다. '완벽, 완성, 완전' 이런 말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냐, 다 불완전한 인간들 투성이인 게 세상이야. 근데 넌 뭘 그렇게 완전하려고 하냐. 불완전한 게 정말 인간다운 모습이야. 넌 너무 인간답지 못해."
그가 나의 치부를 송곳으로 찔러주었다. 빵빵해진 풍선이 송곳 끝에 터지는 느낌이었다.
완벽주의에 빵빵해진 풍선이 터지자 나는 흐물흐물한 풍선이 되었다.
더부룩해진 속에서 가스가 나가듯 한결 편안해졌다. 가벼워졌다.
나의 '라'도 빵빵한 바람을 덜어내자 편안한 '라'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송곳처럼 날카롭고, 가스 찬 배처럼 더부룩했던 소리가 부드럽고 가벼운 소리로 다시 태어났다.
다시 태어난 '라'음을 얹어 '라면과 구공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가사를 개사해 불러본다.
"라면은 불어도 맛 좋은 라면,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맛 좋은 라면~
(간주) 가루! 가루! 고춧가루!~~~"
라면을 꼭 설명서대로 끓일 필요는 없다. 라면은 불어도 맛 좋은 라면이다.
음치 튜닝 '라' 카드--불어도 맛 좋은 '라'면 카드
<그림:나무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