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란 대로도 괜찮아

호주 봄꽃과 열매

by 나무향기

한국은 단풍으로 물드는 계절이고, 호주는 자카랜다(Jacaranda)로 물드는 계절이다. 호주의 자카랜다는 한국의 벚꽃에 버금갈 정도로 '호주 봄' 하면 떠오르는 보랏빛 꽃이다. 호주 곳곳이 이 연보랏빛 꽃으로 드문드문 물들면 '봄이 왔구나'하고 마음이 살며시 기지개를 켠다.


난 한국의 꽃 중에선 벚꽃과 목련을 사랑하고, 호주의 꽃 중에선 자카랜다를 사랑한다. 이 꽃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무에서 꽃이 먼저 나와 잎 없이도 자신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고동색 나뭇가지에 잎도 없이 소담스레 피어난 꽃들을 보면 꽃에 더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꽃은 잎 없이 피어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 보고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것마냥 나를 바라본다.

초록의 간섭 없이 오롯이 자신의 색으로 나를 대해 주기에 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이 꽃들을 사랑한다.




주말에 탬보린 마운틴에 올랐다. 폴란드에서 온 노부부가 살고 있는 자연에 옴폭 담긴 집에서 자보티카바(Jaboticaba) 열매를 얻어왔다. 이 열매는 신기하게 나무 몸통에서 열매가 자라난다. 멀리서 보면 나무에 벌레라도 다닥다닥 붙은 모양이다. 환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이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나무에 매달려 있는 포도알처럼 생긴 열매가 군락을 지어 붙어 있다.



아침나절 햇빛이 윤이 나게 닦아 놓은 건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생긴 것도 포도알처럼 생겼는데, 과육 역시 포도와 비슷하다. 맛은 라이치(Lychee)와 포도를 반반 섞어 놓은 맛이다. 노부부는 우리에게 자신들이 담근 자보티카바 와인을 한 잔 권했다. 달짝지근한 와인 맛이 술을 못 마시는 내 입맛도 사로잡았다. 신비로운 맛에 반해 나는 이 처음 보는 열매로 와인을 담으려 한다. 숙성을 시켜 와인이 되려면 적어도 1년이 걸리겠지만, 기다리는 시간 내내 설렐 듯하다.


내가 처음 본 이 봄 열매와 지금 한창 피어나고 있는 자카랜다가 닮아 있다. 모두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한 채 제 모습으로 피어났다. 자카랜다는 초록잎 없이도 우아하게 자신의 꽃을 피우고 있고, 자보티카바 열매는 가지에서 뻗어 나오지도 못하고 나무 몸통에 자신을 맺어 놓았다. 모든 걸 갖추지 않아 더 아름다운 꽃과 열매다.


한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잎과 가지가 내게는 없어 보여, 나의 꽃을, 나의 열매를 초라하게 여겼다. 그땐 목련의 우아함도, 벚꽃의 잔망스러움도 몰랐던 어린 나이였다. 내게 없는 잎과 가지를 가진 이들을 부러워하며 나의 소박한 꽃을 초라히 여겼다. 나의 작은 열매를 하찮게 여겼다.


하지만 이젠 잎 없이 우아하게 피어나는 목련의 터질 듯한 기품과 잎도 없이 하늘을 채우는 벚꽃의 찬란함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내게 없는 잎과 가지를 억지로 갖추려 하기보다, 잎과 가지 없는 채로도 나를 담아낼 수 있는 자리를 찾게 되었다.


자카랜다는 잎 없이도 자신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봄 하늘을 향그럽게 채우며 자신의 부족함으로 자신의 찬란함을 맞이하고 있다. 온전히 갖추지 못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자란 대로 그 자리를 찬란하게 채우고 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처럼 늘어지게 달리지 못하고 나무 몸통에 어설프게 벌레처럼 매달려 있어도, 자보티카바 열매는 반들반들 윤이 난다. 다른 나무 열매들처럼 꼭지를 늘어뜨리고 주렁주렁 달리지 못하고 딱정벌레처럼 다닥다닥 붙었어도 자신의 자리를 탓하지 않고, 햇볕이 선사한 웃음을 가득 받은 환한 얼굴에 광을 내며 영글어 간다.


자신의 비루한 자리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갖추지 못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영글어내는 이 꽃과 열매들이 사랑스럽다. 어쩌면 모자라기에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그들이 사랑스럽다.


호주 봄꽃과 열매가 나를 다독인다.

"모자란 대로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