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밭에 착지하지 못하고 민들레 홀씨들이 시멘트 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다. 한껏 꽃을 피우고 홀씨만 남았으니 이제는 땅에 착지해서 싹을 틔울 때까지 쉬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쉴 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나뒹구는 민들레 홀씨들이 꼭 날 보는 것만 같았다.
나 역시 쉴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해 '쉼'으로 주어진 시간 앞에서도 나뒹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쉬고 싶은데, 일에 대한 미련 때문에 쉬는 시간도 맘 편하지 않았다. 어떻게 쉬어야 할지를 잘 몰라 쉬는 시간을 허투루 보낼 때도 많았다.
이제껏 두 옥타브의 음들을 하나하나 교정해 왔다. 이번엔 내가 소리를 잠시 쉴 때가 왔다. 음치 교정 선생님은 이젠 제때 쉬는 법을 배울 차례라고 하셨다.
쉼표에는 종류가 많았다. 그 마디를 온전히 쉬는 온 쉼표부터, 두 박을 쉬는 이 분 쉼표, 한 박을 쉬는 사 분 쉼표, 반으로 계속 쪼개어지며 쉬는 수많은 쉼표들이 존재했다. 정확히 박자만큼 쉬고 제때 다시 소리를 내는 것은 상당히 도전이 되는 일이었다. 쉼표만큼 쉬고 타이밍을 맞춰 제때 들어가기 위해서는 쉼표가 주어졌을 때 제대로 쉬어줘야 했다. 덜 쉬거나, 너무 쉬거나 하면 다시 시작할 타이밍을 놓치기가 일쑤라 딱 알맞게 주어진 박자만큼 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쉬는 것은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소리를 내야 할 때를 위해 충전하는 것이었다. 힘을 얻기 위해 쉬는 것이지, 갖고 있는 모든 힘을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종종 불안한 마음에 쉴 만큼 충분히 쉬지 못하고 음을 내거나, 혹은 너무 퍼져버려 과하게 쉬는 바람에 내가 소리 내야 할 때를 놓치고 말았다.
배우 안성기는 작품 활동을 할 때보다 작품을 쉬고 있는 시간이 자신에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 휴식 기간 동안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다음 작품에 자신이 어떻게 표현될지가 결정된다고 했다. 진정한 '쉼'은 나를 채우기 위해 쉬는 것. 나의 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 쉬는 것이다. 말하자면 쉬는 것은 차가 주유소에서 엔진을 끄고 연료통을 열어 연료를 채우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연료를 잘 채워야 차가 다시 굴러가는 것처럼, 잘 쉬어야 내가 정작 움직여야 할 때 시동이 걸리는 것이다.
배우 안성기는 쉬는 기간 동안 분명 좋은 영화들을 많이 감상하고, 해 보지 못한 연기를 연습해 보기도 하고, 자신이 배우로서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충전의 시간이 새로운 작품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더 깊은 연기를 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되도록 도와주었을 것이다.
인생이란 노래에서도 많은 쉼표가 주어진다. 어떨 땐 한참을 쉬어야 하는 때도 있고 잠깐만 쉬어도 되는 때도 있다. 하지만 쉼표가 주어졌을 때라도 내가 노래를 부르는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쉼표가 주어진 부분도 노래의 일부이다. 소리를 내는 부분과 쉬어 가는 부분이 모두 아름다운 노래를 이루고 있다. 쉬고 있더라도 나는 노래의 일부분에 서 있는 것이고, 내가 노래하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있어야 제때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소리를 내는 시간만큼, 쉼표로 주어진 시간도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 되어야 했다. 모든 소중한 것은 그 가치만큼의 값을 치러야 한다. 차를 탈 땐 차표를, 비행기를 탈 땐 비행기표를 사야 하듯 휴식을 할 땐 쉼표를 사야 했다. 티켓을 사야지만 좌석이 주어지는 것처럼, 휴식 티켓 값을 제대로 지불해야지만, 온전한 휴식의 좌석이 내게 주어진다. 돈이든 시간이든, 무언가 값을 치러야 나의 쉼을 위한 한 자리가 제대로 마련되었다.
그렇게 주어진 좌석에 앉았다면 휴식을 즐겨야 했다. 좌석에서 내릴 때까지 온전히 라이딩(riding)을 즐겨야 했다. 바깥 풍경도 감상하고, 나를 뺀 다른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노래를 열심히 부르느라 놓치고 있었던 나를 뺀 세상에 조용히 시선을 얹어야 했다.
팔 분 쉼표처럼 잠깐 짬을 내어 자는 낮잠도 훌륭한 휴식이 되었다. 4분 쉼표처럼 좀 더 시간을 내어 호숫가를 산책하거나, 동네 산에 올라가 트래킹을 하는 것 역시 혼탁해진 내 소리를 맑은 소리로 바꿔주었다. 하지만 온 쉼표처럼 아주 길게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럴 땐 짐을 싸서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떠나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유럽으로 여행을 처음 갔을 때,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체코의 프라하였다. 한 밤중에 나간 시가지에서 본 프라하의 밤 풍경은 내가 동화 속 유럽의 어느 마을에 와 있는 착각을 하게 했다. 나는 쉼을 위해 프라하로 달려갔지만, 프라하 사람들은 내가 지난 시간들 동안 살았던 일상을 살고 있었다. 쉼이라는 좌석에 앉아 나를 뺀 세상이 일상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난 나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다음날은 시차 적응이 힘들어 버스에 앉아 조느라 아름다운 유럽의 몇몇 풍경을 놓치고 말았지만, 다정한 남편은 내가 놓친 풍경들을 사진으로 담아 내게 보여주었다. 졸지 않고 실제로 보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래도 버스에서 잠시 눈을 붙였기에 나머지 일정에선 온전히 유럽을 즐길 수 있었다.
잠이 쏟아지는 데도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면 나머지 여행 일정을 망쳤을 것이다. 반대로 피곤하니 가는 동안 잠만 자겠다고 했다면 나에게 활력과 진정한 쉼을 줄 아름다운 풍경을 놓쳤을 것이다. 피곤하다고 넋 놓고만 있다면 나에게 남는 건 더 피곤한 몸과 마음뿐일 것이다. 적절하게 즐긴 휴식은 나를 상쾌하고 즐겁게 할 만한 기운을 북돋아주는 라이딩이 되었다.
휴식의 라이딩을 하는 동안 창 밖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들은 그동안 지친 나의 뇌를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 풍경들을 보며 한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들은 나의 삶의 가닥을 잡아주고 있었다. 몸은 쉬고 있었지만, 그런 휴식 동안 눈으로 담은 바깥 풍경을 통해 나는 나를 충전하고 있었다. 노래는 잠시 쉬고 있었지만, 녹슬었던 음들을 휴식을 하며 정갈하게 고를 수 있었다.
온전히 즐긴 휴식의 라이딩은 아주 오래도록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그때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소중한 휴식이 되었다.
쉬지 않고 노래만 하다 목이 나가 쇳소리를 내기보단, 쉼표가 주어졌을 때 잘 쉬어 주어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팔 분 쉼표든, 사 분 쉼표든, 온 쉼표든, 나에게 주어진 쉼표는 모두 소중하다. 우리 모두는 인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다. 노래를 부를 때도 중요하지만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다.
쉼표가 주어졌을 때 우린 어떤 마음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쉼표를 즐기고 있을까.
또다시 나에게 쉼표라는 휴식 티켓이 주어졌다. 이제 티켓을 들고 라이딩을 즐길 일만 남았다. 라이딩을 끝내고 돌아오면 이젠 이전보다 더 깊은 소리를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음치 교정 카드--날 쉬게 하는 휴식 티켓,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