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빛 호수가 둘러싸인 길 위를, 차를 타고 달리는 이의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솜사탕처럼 폭신하다. 그러다가 풍선은 빵 터져버리고, 솜사탕은 형체 없이 찐득하게 녹아버린다.
타즈마니아(Tasmania)를 여행했을 때처럼, 이번 뉴질랜드 여행에서도 길 위에 누워있는 동물들의 사체를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타즈마니아를 처음 여행 갔을 때 포섬, 캥거루, 왈라비, 웜벳 같은 야생동물들의 로드킬을 목격하게 되었다. 새도 많은 곳이라 야생 앵무새 사체도 종종 눈에 띄었다. 야생의 자연을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어중간하게 도시로 발전한 곳이라서였을까? 오랜만에 여행 온 뉴질랜드에서도 어렵지 않게 로드킬이 목격된다.
퀸스타운(Queenstown)에서 와나카(Wanaka) 호수로 향하며 하웨아(Hawea)라는 호수를 지났다. 뉴질랜드 특유의 황토색빛 암석이 솟은 산을 두른 에메랄드 빛 호수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며 로드킬을 당한 동물들의 사체를 수없이 목격해야 했다.
에메랄드 빛 호수가 둘러싸인 도로 위 로드킬. 나의 감정은 하나로 일관되게 흐르지 못하고 아름다움의 환희와 죽음의 잿빛 같은 슬픔, 그 동물들이 겪은 고통이 느껴지는 아픔과 알 수 없는 분노로 혼합되어 버렸다.
멀미가 났다.
아직 경험이 없어 미숙한 새끼들이나, 장애가 있어 재빨리 피하지 못한 동물이거나, 너무 순진한 야생의 아이들일 것이다.
토할 것만 같았다.
살갗이 찢기고, 피가 새어 나오고, 까칠해진 털이 곤두서 죽은 채로 누워있는 동물을 보니 그 모습이 꼭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누군가의 모습이다. 눈을 감은 채로, 혹은 눈을 뜬 채로 길 위에서 숨을 거둔 동물들의 사체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혹시 우리, 지금 로드킬 당한 어느 연약한 생명체이진 않을까.
인간은 무자비하게도 자신의 안락과 편리를 위해 동물들의 살 자리를 파헤치고 밀어버리고 폭력적으로 매몰시켜 왔다. 그런 폭력은 동물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게도 그런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편리'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알아차리지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은 사람의 살 자리를 매몰시킨다.
누군가의 편리를 위해 학교가 세워졌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아침에 사과 대신 토스트에 쨈을 발라먹게 되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공장 음식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 카톡을 더 자주 하고, 친구는 하루쯤 없이 살 수 있어도 핸드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친구보다 핸드폰을 더 아끼게 된 세상에 살게 되었다.
그런 누군가의 편리와 이익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폭력을 남겼다. 우린 어쩜 피만 흘리고 있지 않을 뿐이지 현대 문명이라는 길 위에 로드킬 당한 채로 누워있는 안타까운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뉴질랜드 여행에서 느낀 그 복잡한 감정이 다시 솟아오른다. 삶의 순간에 느껴지는 환희는 가끔 알 수 없는 죽음이 드리워진 도시를 보는 불안함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무표정한 이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슬픔, 그것마저도 알아채지 못한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그들의 아픔과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좌절 섞인 분노로 엉켜버린다.
누구를 위해서 나는 이 현란한 문명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편리함의 끝판왕을 달리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시간이 없다며 안달이고, 나 대신 기계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 세상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피곤에 절어 곤죽이 되어있다.
우린 어쩜 로드킬 당한 야생동물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건 아닐까. 우린 어쩌면 쌩쌩 달려오는 차를 피하지 못한 경험 없는 새끼 동물들이자, 미숙한 생명체이자, 너무나 순진한 야생동물일 지도 모른다. 누군가 '편리'라 이름 부르는 그 모든 것들 때문에 우리는 쓰러지고, 힘을 잃고,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조심하라고 당부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아들에게 말한다.
찻길로 다니지 말고, 그냥 흙길을 걸어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더딜지라도 흙길로 걸어라.
니 발과 몸을 움직여 흙길로 걸어라.
흙길을 둘러싼 아름다움을 즐기며 천천히 그렇게 걸어라.
<사진 출처: 시드니 모닝 헤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