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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24. 2019

고립과 외로움이라는 택배는 누가 자꾸 보낼까?

나만 외로운 걸까? #14, 후기 청년기의 우울과 외로움에 관한 연재


인터넷의 역설

     

몸이 좋지 않아서 한국에 온지도 벌써 반년이 지나갔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연어가 회귀하듯 나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꿈에 그리던 고국의 품에 안긴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20년 만의 귀환은 몇 달 전부터 나를 설레게 하였다. 그동안 1년에 한 번 정도는 다녀갔지만 이렇게 오래 체류하기는 처음이다. 나의 희망에 찬 모든 기대는 한국의 시골로 향하였다. 예상대로 한국의 시골은 20년 전의 모습을 아직도 그대로 간직한 채 숨죽이고 있었다. 집 앞의 2차선 도로가 4차선의 고속화 도로로 확장이 된 것이 변화의 전부였다. 물론 마을 회관도 리모델링되어 있었다. 마을의 집도 대부분 그대로였다. 몇몇 폐가가 된 집들은 완전히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무나 배추가 자라고 있었다. 단지 눈에 띄게 변한 것이 있다면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동네 어른들이 너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나의 어머니다.

     

나는 임시거처로 서울 근교의 자그마한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혼자 살기에 적당한 집을 골랐고 학교 앞이어서 밤에 특히 조용하였다. 물론 내가 고른 것은 아니고 여동생이 골라준 집이었다. 1인이 살기에 최적화된 그런 집이었다. 최소 2주에 한 번은 시골집에 가서 아버지와 남도 여행을 하겠다는 나의 결심은 몇 달을 넘기지 못하였다. 시골집이 좋은 이유는 인터넷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 외의 장점은 수도 없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 장점들은 막상 마주하고 보니 장점이 아니었다. 인터넷이 없어서 불편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스마트폰이라는 기계는 그 불편함을 상쇄하고 있었다. 내가 꿈꾸는 고향은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되지 않는 세상과 단절된 곳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연결해야 할 인터넷의 기능은 세상을 세분화해서 철저하게 단절시키고 있었다. 심지어 산 정상에서도 무인도에서도 스마트폰은 여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편리함만을 따진다면 세상은 분명 진보했고 발전하였다. 언제 어디서든 세상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분명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명의 이기는 시골에서도 누리고 있었다. 각 집의 창고나 대문에는 감시카메라고 작동하고 있고 농산물의 판매도 온라인상의 직거래를 이용하고 있었다. 인터넷이라는 보이지 않는 연결망의 고리는 시골의 생활 패턴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젊은 축에 속하는 노인들은 카톡을 통해 소통하고 유튜브를 보며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접한다.

     

이러한 삶은 시골에서마저도 얼굴을 마주할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방송을 통해 전할 메시지도 휴대폰을 이용해 전하고 있었다. 문명의 이기는 점점 더 개인을 편리한 세상으로 끌어내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철저하게 고립시켜 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가 시골에서까지 만연하고 일상화되고 있었다. 어릴 적 동심을 그리며 귀농이나 귀촌을 한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렸을 적의 게마인샤프트는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풍경이나 생활환경은 그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공동사회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의 고립을 피해 시골로 떠난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고향은 그렇게 돌아오질 못할 고향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립되는 개인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이제는 예측 자체도 쉽지 않다. 신문명, 신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새로운 정글의 법칙을 창출하고 있다. 잘 나가는 초 인류 기업들도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다. 개인들의 전문직도 언제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명료해지고 있는 현대사회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안개도시를 만들어가고 있다. 현직에 있는 전문직은 물론 일반 회사원들까지 자기 직업이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은 이제 더 이상 어떤 특정한 직접이 되기는 어려워졌다. 그 직업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 그들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사회였던 우리 사회는 빠르게 이익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다. 어릴 적은 시골은 물론 서울도 공동사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골에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은 괴기하고 암울하기만 하다. 텅 빈 공간에 노인들만 몇 분 보이는 사막화되어가는 공간은 안쓰러워 보일 뿐이었다. 새로운 인구의 유입은 끊긴 지 오래고 남아있는 자들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마저 떠난다면 이제 정말 사막이 되고 말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그래서였을까? 일부 몇몇 동호회나 지인들이 협동조합이나 사단법인 형태로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마을을 직접 조성한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소 의도적인 공동사회에 대한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 간의 교류가 끊긴 혼자만의 세상은 무한한 자유를 주는 대신 무한한 고립감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선물이 되는 것이다.

     

고립이란 무인도에 갇힌 사람처럼 주위에 접촉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구치소나 교도소에 갇히는 것만이 고립은 아니다. 고립은 군중 속에서도 가족 내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왕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왕따는 나쁜 의도로 특정인을 배제하는 행위지만 고립에는 의도가 개입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의 고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모두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골목은 아이들로 넘쳐났고 시끌벅적하고 활기에 찬 함성소리는 각자의 담을 넘어가고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고 자란 세대여서 였는지는 몰라도 우리 세대는 그 시절을 동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원형이 보존된 같은 공간으로 돌아가도 소용이 없다. 설사 그 시절만큼 많은 아이들이 산다고 가정해보자. 많은 아이들이 골목으로 뛰쳐나와 해지는 줄 모르고 뛰어놀 확률은 희박해 보인다. 학원에도 가야 하고, 게임도 해야 하고, 야간 자율학습도 해야 하는 아이들이 한가롭게 골목에서 하루 종일 뛰어놀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어떤 일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명의 발전을 거부하거나 거스르자는 뜻도 아니다. 단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만큼은 기억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골목에서 하루 종일은 아니어도 가끔이라도 모든 시름들을 내려놓고 뛰어놀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아이들만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의 고립은 더욱 심각하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는 줄어들게 된다. 많은 친구들은 먼저 세상을 저버리고 남은 친구들도 같은 곳에 살 확률은 줄어든다. 가족은 철저하게 핵가족화되어 자식과 같이 살지 않는다. 배우자와는 사별을 했거나 아니면 졸혼이나 이혼을 했을 확률이 높다. 옛날처럼 어른을 우대하고 공경하던 시절은 끝이 났다. 서울의 공원이나 놀이터는 노인들로 넘쳐난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노인들은 그렇게 흐르는 세월만큼이나 철저하게 외톨이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나처럼 후기 청년기의 사람들은 어떨까? 어렸을 때 잠깐이지만 공동사회의 경험을 가진 우리 세대는 노인들보다 더 외로움에 직면할 수 있다. 현대 문명의 이기는 노인들은 피해 갔지만 우리 세대를 피해 가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 쓰나미에 정면으로 노출된 채 온몸으로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젊은 세대처럼 게임에 열중하지는 않지만 웬만한 현대 문명은 그런대로 잘 소화하며 따라가고 있다. 세상을 바꾸어 놓을 만큼 편리하고 발전된 기술들은 서서히 우리의 고리들을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대면보다는 SNS를 이용하여 소통하는 일이 많아졌다. 심지어 불화가 심한  가정에서는 SNS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부부간은 물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소통이 가능해진 세상에 노출되고 말았다. 유일하게 SNS상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 반려동물만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반겨주는 서글픈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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