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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27. 2019

오빠! 왜 돈 많은 놈들은 다 똑같지?

테오도라 #13.  너를 보내고 다시 100일을 맞이하며..



삶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그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삶이란 죽으려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밀쳐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뿐만 아니라 약해지고 늙어가는 모든 요소에 대해 잔혹하고 가차 없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죽어가는 것, 비참한 것과 경건함이 없는 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는 살인자가 아닐까? 하지만 늙은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살인하지 마라.”

     

삶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겨운 것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삶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이처럼 끊임없이 죽어가려는 모든 것과의 투쟁인 것이다. 죽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서일 경우가 더 많다. 물론 그 현상에는 나라는 개인 또는 타인의 의지가 반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상의 모든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의 생명은 꺼져 가는 것이다. 그 꺼져가는 기간이 짧을 수도 아니면 100년간이나 지속될 수도 있다. 꽃이 꽃망울을 터트리는 순간부터 꽃은 죽어가는 것이다. 그 기간이 아무리 길어야 100일을 넘지 못한다. 보통 1주일 전후인 경우가 많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가장 열심히 그리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는 의미의 이면에는 가장 열심히 죽어간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죽음이란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뚝 하고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펑하고 땅속에서 솟구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삶과 정확하게 궤도를 가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5년 전 1주일 사이에 어머니와 장인어른의 장례식을 거의 동시에 치르면서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 시작하였다. 죽음이 이처럼 코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 나였지만 두 번의 장례식을 동시에 치르면서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라는 생각을 시작하였다. 그래서였는지 두 번 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눈물을 흘리지 못하였다. 이번 테오도라의 죽음과 작은어머니의 죽음에도 역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친척 어른 중에 한 분이 이런 나에게 감성의 문제가 있다고 나를 타이르듯 나무라셨다. 내 귀에는 그 언어들이 호통으로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뭐라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죄송합니다.라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의 말씀만 전해드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슬픔에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공감 결여 환자인지도 모른다. 그런 병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런 병이 있다면 분명 치료가 필요한 환자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은 이처럼 너무도 단순하다. 살아있다고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죽었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한 방식이고 연장선일 뿐이다. 죽으려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밀쳐내는 것이 삶이라는 니체의 말에 공감해서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언젠가는 삶을 끝내야만 한다. 죽으려는 무언가는 수도 없이 많다. 그 싸움에서 이기려는 시도는 중요하지만 어느 선까지만 허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이나 소멸이 없다면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흙이나 모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풍화나 침식작용을 견디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바위로서만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이다. 바위는 깨져 나가고 바다로 향하면서 자갈이 모래가 되고 끝내는 진흙이 되는 것이다. 그 진흙이 뭉쳐지고 굳어지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은 삶과 죽음이 결국은 연결되어 있는 하나라는 반증이다. 인간이나 동물은 물론 식물들도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것도 본능적으로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질서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우리 인간만이 죽음을 부정하려 든다는 것이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고 그 죽음 저편에는 두려운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종교를 통해서 배우고 종교를 통해서 극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현상을 예를 들어가며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하며 기존의 세상의 체계를 거부하고 그 논거들을 제시하는 저서들을 여러 권 남겼다. 나는 니체의 모든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종교적인 측면은 그의 사상을 대부분 맏아들이고 있다.

     

삶을 정의하는 그의 짧은 문장들에는 죽음마저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죽으려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밀쳐내는 일을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에이징(Ageing)이라는 것에 맞서려는 현상이다. 나이 들어가는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거부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하지만 진시황제마저도 이를 거부하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불로초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사람을 동원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그는 결국 5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진나라라는 제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늙어가는 것을 늦추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어떤 보이지 않는 행위들을 한다. 그러한 노력은 헛되지 않고 적절하게 효과를 볼 수도 있다. 그래서 100세까지도 무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100세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뉴스를 통해 매일 들려오는 사고들에는 죽음이 동반된다. 안타까운 죽음들이 대부분이다. 사람이 죽지 않은 사고였다면 뉴스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아직도 죽음이라는 현상은 타인에게마저도 슬픈 것이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래서 뉴스가 되고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뉴스는 매일 접한다. 그리고 며칠 지나면 잊어버린다. 그러한 죽음은 현실이기는 하지만 남의 일일 뿐이다. 나에게 그런 일이 닥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젠가는 닥칠 수도 있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의 실체다. 테오도라가 그것을 우리 가족에게 보여주었듯이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그것 또한 삶의 일부이고 연장선인 것이다. 그녀는 떠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물론 가족의 가슴속에는 세월이 가도 그 죽음이 희미해지지 않을 것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든 일상이 모여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많은 죽음들을 거부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을 잊고 살뿐이다. 생각에서 죽음을 떨쳐낼 수 있을 때 행복한 일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상조차도 죽음을 완벽하게  밀어내지는 못한다. 그 일상들이 모여 죽음에 점점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귀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은 가능하면 가장 치열해야만 하는 것이다. 비록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어도 말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다.

     



유서 한 장도 없이

     

갑자기 죽으면 유서를 쓸 시간이 없다. 그만큼 삶과 죽음은 밀도 있게 붙어 다닌다. 테오도라의 부검 결과는 공식적으로 사인 불명으로 나왔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가족이나 담당 형사들은 병사가 아닐 확률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물론 어떤 범죄에 연루될 수도 있어서 이 부분도 강하게 수사를 요청했지만 아무런 단서나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살이라고 결론지을만한 단서도 없었다. 테오도라의 머리맡에 쓰다 남은 하나의 주사기와 앰플 만이 유력한 용의자 취급을 받았다.  주사로 인한 쇼크사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100일이 지난 시신을 부검해도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인불명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그 주사기와 앰플 외에도 몇 달 동안 수면제가 들어간 약을 처방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수면제가 들어간 약이라면 내가 복용하고 있는 우울증 약일 가능서도 있다. 우울증의 특징 중 하나가 불안장애와 함께 나타나는 불면증이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들은 취침 전 약을 복용해야 한다. 그러면 30분 후 자연스럽게 잠이 오고 숙면까지는 아니지만 자다 깨다를 반복하지 않고 잘 수가 있다. 그 약들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먹고 잘 수 도 있다. 테오도라가 20대 초반에 그런 경험이 한번 있었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그 부분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어디에도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 휴대폰 메시지 내용들에도 노트북 어디에도 아무런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사인불명의 일등공신은 바로 100일이란 시간이었다. 100일 만에 발견되어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시신을 부검한다고 단서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부검의의 말이었다. 주사기로 인한 쇼크사도 증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우울증이 심할 때는 매일 죽음과 싸웠다. 모든 생각의 고리들은 종국에는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고리들을 끊어내는 일이 나의 삶의 의미였고 살아있다는 증명서 같은 것의 발행이었다. 그 지난한 작업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나의 삶은 끊임없이 죽음을 떨쳐내는 일의 연속이었다. 죽음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측면이 강하였다. 그 순간, 즉 찰나의 고비만 넘기면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른 사람과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우울증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미 유서도 써 두였고 블로그에 묘비명도 그럴싸하게 올려두었다. 죽음을 경시하거나 무시해서가 아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정의하고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내가 떠난 후에는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 유품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러한 사고의 전환으로 나의 삶은 단순해지기 시작하였다. 소위 말하는 미니멀라이즘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을 정의하고 나서부터는 삶이 단순하고 명료해지기 시작하였다. 목표가 뚜렷해지고 하루도 대충 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치열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죽이는 Killing time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이다. 갑자기 나의 죽음에 대한 정의로 인해 테오도라의 죽음이 문제시되는 듯해 미안해진다. 하지만 이미 지난해 1월 신림동에서 만나 점심과 커피를 마시면서 나누었던 내용들이다. 단순하게 살라고 몇 번을 강조하였지만 그녀는 그럴 힘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1년에 한두 번 연락하거나 만나는 사람들이 무슨 가족이냐고 비난해도 우리는 감수해야만 한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테오도라는 점점 집에서 나오지 않기 시작하였고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도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20대는 굉장히 발랄하고 대담하였다. 자신감도 넘쳐났다. 친구들도 제법 많았고 술도 잘 마셨다. 나와도 자주 마셨고 힘들 때는 나의 직장이 있는 빌딩 지하에 와서 퇴근시간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녀의 소극적이고 수줍어하는 성격에서는 한번 결혼에 실패한 아픔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래서 더욱 결혼에 집착하였고 항상 남자를 사귀고 있었다. 테오도라가 사귀던 남자들의 대부분은 좋은 차를 몰고 귀티가 나던 남자들이었다. 그녀의 잘못된 판단을 여러 번 지적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일단 돈 많은 남자를 원하였다. 첫 번째 결혼도 몇 달 가지 못하고 끝난 것도 이유가 있었다. 집신도 짝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테오도라는 분명 집신이었다. 그런데 유리 구두를 잠깐 빌려서 신고 백마 탄 왕자를 찾아다닌 것이다. 백마 탄 왕자들은 그녀의 유리 구두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하는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락이 끊어지곤 하였다. 테오도라가 실연을 당하고 찾아오면 술이 취할 때까지 마셨고 술이 취하면 주정을 부렸다. 그 술주정에는 항상 “돈 많은 놈들은 똑같다 “ 라며 한탄하였다. 나는 그 상황에서 아무런 조언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는 집신이니까 너에게 맞는 집신을 찾아보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꿈과 야망은 컸다. 그 비틀어진 야망은 점점 그녀의 삶을 죽음으로부터 도망 다니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23년 전쯤에도 그녀가 수면제를 먹었던 이유도 그녀의 비틀어진 야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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