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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27. 2019

어머니는 시골 로비스트였다!

귀한 집 딸이었고 꿈 많은 여자였던 나의 어머니 #1


왼쪽 군인 아저씨가 3사단 백골부대의 큰 형님, 가운데 건달 같은 아저씨가 둘째 형님, 옆에 서있는 키 큰 아줌마(170)가 어머니다. 40년 전 철원 백골부대 앞에서 촬영한 사진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여동생이 카톡으로 보내온 40년 전의 어머니 사진이다.

요즘, 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자주 한다. 내 몸이 아플 때마다 어머니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해본다.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몇 년을 고생하시다 요양원에서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그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채 나는 공감능력을 상실해가는 천하의 불효막심한 넷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단지 나의 어머니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조금이나마 용서받고 싶어서다.




어머니는 지금으로 치면 금수저였다. 강남이 논밭이었고 과수원이던 시절 어머니는 명동의 부잣집 큰 딸이었다. 어머니가 시골의 농사꾼이었던 아버지에게 시집을 간 스토리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그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연재를 시작한다. 대부분 어머니와 외할머니께 들은 내용이라 일부는 와전된 것일 수도 있음을 미리 밝힌다.


어머니는 일신, 큰 이모는 연희, 막내 이모는 리라 국민학교를 나왔다. 명동 주위에 있던 사립학교들이었다.

그 시절에도 기사가 학교 앞까지 승용차로 태워다 주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가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떡 방앗간을 운영하시면서 우리 6남매를 키워내셨다.

교육열만큼이나 치맛바람도 대단하셨다.

시골 마을의 농사꾼이 된 어머니는 친구들이 대부분 선생님들이었다.

나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선생님들은 모두 어머니에게 포섭되었고 매달 한 번씩은 술과 떡과 고기를 준비해 선생님들 전체에게 대접을 하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선생들과 교직원들의 배구 시합이 열릴 때를 맞추어 어머니는 집요하게 로비를 펼치셨다.

그 시절에는 먹고살기도 바쁘고 쌀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어머니의 성의를 선생님들은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 성의에 대한 답례는 당연히 우리 자식들에게 돌아왔다.

특히 주목을 받았던 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어머니의 치맛바람의 광풍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 대치동 어머니들은 그 시절 어머니의 맹활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시절에는 선생님들께 선물을 농산물로 하던 시절이었다.

계란 한 묶음(12개)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씨암탉이었다.

우리 형제가 모두 졸업해도 어머니는 선생님들과 교류를 하였다.

서로 경조사도 챙기고 전주의 식당에 모여 식사도 하셨다.

그 시절의 선생님들은 모두 전주에서 출퇴근을 하셨다.

첫차의 직행버스에는 선생님들이 가득하였다.


요즘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다.

어쩌면 100 세 시대의 혜택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오늘 여동생이 보내준 40년 전의 사진 한 장을 보며 어머니 장례식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카페에 사람들만 없었더라면 엉엉 울어버렸을 것이다.

아이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

그동안 공감을 하지 않은 게 아니고 억지로 참고 또 참은 것뿐인지도 모른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카뮈의 이방인의 첫 구절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한 말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시청 공무원이었던 뫼르소는 요양원에서 사망한 어머니에게 가는 도중에도 버스에서 앉아서 존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마리라는 여자 친구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어느 날 전혀 의도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사막의 강열한 태양 때문에 순간적으로 방아쇠를 당겨 아랍인을 살해한다.

그리고 그는 법정에 선다.

솜방망이 처벌을 예상했던 법정에서 판사는 사형을 언도한다.

결국은 어머니가 죽었다는 이 한마디 때문에 뫼르소는 살인을 하고도 처형되었다.

그 당시 알제리에서 프랑스인은 살인을 해도 약한 벌을 받았다.

식민지에서 피지배 국민 하나쯤 죽인다고 큰 죄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공감할지 모르는 사이코패스 취급을 받으며 판사는 사형을 구형했고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당시 뫼르소가 바로 나와 아주 유사하였다.

그래서 더욱 카뮈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지고 있다.


8월의 끝자락에서 더위도 한풀 꺾이고 있다.

목요일 나의 희귀 난치병 검사가 삼성서울병원에서 있다.

그래서인지 유독 어머니가 보고 싶어 진다.

어머니의 그 화려했던 치맛바람이 그리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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